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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조간 1면 머리기사는 똑같다. 거의 모든 신문이 비정규직 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강행 처리된 것을 머리로 뽑았다.

당연해 보인다. 15개월을 끌던 주요 법안이 질서유지권까지 발동된 상태에서 강행처리 됐다. 기사 가치는 충분하다. 어제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다른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민노당의 노회찬 의원과 박용진 대변인은 한나라당이 '물타기' 차원에서 비정규직법안 처리에 동조했다고 강력 비판했다. 지난 22일 여야 4당 원내대표가 모여 비정규직법안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지 않기로 합의했는데 한나라당이 이 약속을 저버리고 열린우리당에 동조한 데에는 '최연희 성추행 사건'을 희석시키려는 목적이 깔려있다는 주장이다. '물타기용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민노당의 이 주장을 접한 뒤 다시 조간 1면을 뜯어보니 실제로 그렇다. '최연희 성추행 사건'은 비정규직법안 강행 처리에 밀렸다. 민노당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단정하긴 이르다. 한나라당이 비정규직법안에 대한 입장을 '최연희 성추행 사건' 이후에 바꿨다고 보긴 어렵다. 한나라당이 입장 표변 조짐을 보인 건 어제가 아니다. 여야 4당 원내대표 합의 다음날인 지난 23일 열린 열린우리당과의 양당 정책협의회에서 비정규직법안을 해당 상임위에 맡겨 조속히 처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시점은 '최연희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기 하루 전이다. 최소한 '최연희 성추행 사건' 이전부터 한나라당이 오락가락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민노당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이 비정규직법안 처리에 '의기투합'한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여겨 볼 대목은 있다. 비정규직법안과 금융산업구조개선법에 대한 한나라당의 태도는 완연히 달랐다. 두 법안이 상임위를 통과한 시점이 모두 어제이고, 한나라당이 두 법안 처리에 임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처리 태도는 달랐다.

한나라당은 금산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열린우리당과 적잖이 입씨름을 벌였다. 기명 투표를 주장하는 열린우리당에 맞서 무기명 투표를 주장하면서 지리한 공방을 벌이다가 막판에 가서야 기명투표에 응해 반대표를 던졌다.

반면 비정규직법안에 대해서는 열린우리당과 "의기투합"(세계일보)했다. 한나라당 소속 이경재 환경노동위원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했고, 법안 처리에도 적극 '협력'해 개회를 선언한 지 10분 만에 속전속결로 법안을 처리했다. 비정규직법안이 재계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았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던 한나라당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열린우리당과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행위의 결과를 놓고 보면 민노당의 '물타기용 고육지책'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행위의 개시시점을 놓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판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명쾌한 판정이 쉽지 않은 만큼 다음에 언급될 사실은 '병기'하는 것으로 갈음하자.

'후폭풍'의 측면에서 보면 두 법안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금산법의 경우 당사자격인 삼성이 국회 입법결과를 수용하겠다고 밝힌 상태였기 때문에 '후폭풍'이 불 여지가 별로 없다. 반면 비정규직법안은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야기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이미 총파업을 예고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철도노조 등의 파업이 임박해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자. '최연희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자 한나라당은 즉각적인 조치에 나섰다. 어제 당 윤리위원회를 열어 징계를 논의하는 한편 국회 윤리특위에 최연희 의원을 제소했다. 비록 최 의원이 탈당계를 냈다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우리 식구'였던 사람에 대해 초강경 조치를 초스피드로 내린 것이다.

'대구 술자리'와 '맥주병 투척' 사건을 대충 사과하던 한나라당이...

사안이 엄중하고 파문이 크기에 한나라당의 이런 조치는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이전 사례와 비교하면 그렇지가 않다.

'치매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하는 전여옥 의원의 경우는 그렇다 치자.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당이 나서기가 껄끄러울 것이라고, 백번 양보해서 보자(이 논란도 당이 나서 실상을 파악하면 금방 드러나는 일이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경우는? 2004년 9월 12일 발생한 김태환 의원의 '골프장 경비원 폭행사건', 2005년 6월 4일 터진 곽성문 의원의 '맥주병 투척사건', 그리고 지난해 국정감사 기간에 발생한 '대구 술자리 사건'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이 초강경 조치를 취했던가? 그러지 않았다. 다른 당 의원과의 '징계 형평성'을 제기하며 파문 주인공을 엄호하거나 대충 사과하는 선에서 때웠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기에 '이번'과 '이전'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일까? 피해자의 신분이 다르기 때문일까? '이번' 피해자는 힘 센 언론사 기자이고, '이전' 피해자는 '빽'없는 골프장 경비원과 술집 종업원이기 때문일까? 이렇게 보면 비애감이 너무 커진다. 말문도 막힌다.

애써 다른 측면을 보자. '이번'과 '이전'을 가르는 차이가 있다. '이번'은 전시인 반면 '이전'은 평시다. '이번'엔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지만 '이전'엔 그런 과제가 없었다. 마음보다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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