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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김종배의 뉴스가이드'를 연재합니다. 이 코너에서는 숨가쁘게 움직이는 사회,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의 현안 가운데 관심이 집중되는 뉴스의 흐름을 안내해줍니다. 김종배씨는 미디어전문 주간지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현재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조간브리핑'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기사 수정 : 22일 오전 10시40분]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21일, 미국을 향해 던진 발언은 이례적이다. 반 장관은 미국 고위 관리들이 북한을 향해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잇따라 언급한 것에 대해 "현재의 남북 화해 분위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유감'이란 표현을 썼다. 초강대국을 향해 고강도 표현을 던진 셈이다.

반 장관은 왜 이런 발언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언론의 분석은 일치한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고위 관계자가 20일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미국이 '폭정' 등 우리를 자극하는 발언을 최소한 한달 만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일종의 철회로 볼 수 있다"고 밝힌 사실을 중시한 우리 정부가 입 단속에 나섰다는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면담 이후 잇따라 내보이는 북한의 유화 태도를 21일부터 시작된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로 한단계 끌어올리고, 종국에는 북한을 6자회담 테이블로 이끌기 위해서는 북한을 자극하는 돌출발언을 단속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미국측 발언이 김정일 위원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분석한 것이나, 더 나아가 <경향신문>이 "과도하게 북한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냐는 힐난도 나온다"고 지적한 것은 모두 이런 분석에 터 잡고 있다.

하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적지 않다. 정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김-정 면담을 통해 6자회담 재개의 중요한 계기를 확보한 마당에 미국과 각을 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에 6자회담 복귀 명분을 주기 위해서 한·미 양국이 공히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미국 고위 관리들이 잇따라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고,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국에 날을 세우는, 엇박자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미국 고위 관리들의 발언이 미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1일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비판한 폴라 도브리안스키 국무 차관은 "북핵 문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관료"이고, 19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말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발언에 대해서는 미국이 이미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는 뜻을 우리에게 알려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식 채널인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와는 '인식을 공유한 상태'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콧 매클랠런 백악관 대변인과 애덤 어럴리 미 국무부 부대변인이 한·미간 인식 공유 이후에도 북한의 유화 태도를 평가절하하면서 "6자회담 날짜를 정하라"고 요구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미국의 이런 반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동영 장관이 17일, 서울로 귀환해 공식 브리핑을 한 지 두시간 여만에 미국은 국무부 대변인과 부대변인이 나서 회담 날짜를 명시하지 않은 점을 들어 김-정 면담 결과를 평가절하한 바 있다. 이 때만 해도 미국이 김-정 면담 결과를 언론 보도로만 접하고 피상적인 논평을 내놨다고, 그래서 우리가 상세히 설명한 뒤 미국 태도가 변하는지를 지켜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도록 미국의 태도는 불변이다.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가 정동영 장관을 만난 19일 이후에도, 이태식 외교통상부 차관이 워싱턴으로 직접 날아가 김-정 면담결과를 상세히 설명한 뒤에도 미국의 태도는 변하지 않고 있다. 한·미간 정보 공유에 문제가 있어서 나오는 반응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단서는 <중앙일보>의 보도에 있다. <중앙일보>는 우리 정부의 대미 강경 태도에는 '주도적 역할론'이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 세웠던 북핵 관련 3대 원칙 중 북핵 불용과 평화적/외교적 해결 원칙은 관련국들과 어느 정도 공유돼 왔지만 우리 정부의 주도적 역할론은 아직 공론화 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김-정 면담을 계기로 그것이 가능해졌다는 게 정부 판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미국쪽에 대입할 경우 이런 잠정 추론이 나온다. 김-정 면담을 계기로 북핵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려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미국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로 인해 조성될 전면적인 남북 공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미국 고위 관리들의 잇따른 발언은 한국 정부의 입지를 좁히려는 계산 아래서 이뤄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분석이 맞다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정세는 북·미간 대립국면에서 한·미간 갈등국면으로 전이되고, 북한은 그 틈새에서 보폭을 조절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뒤따라온다. 아울러 반기문 장관의 발언이 "과도하게 북한의 눈치를 살피는" 차원에서 나온 측면 못지않게, 미국의 의도를 적절하게 조절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는 분석도 가능케 한다.

반기문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의 벨기에 만남이 주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북한과 미국의 복잡미묘한 줄다리기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인지는 두 사람의 그날 표정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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