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초가을 머금은 호박잎쌈 드세요
ⓒ 이종찬
우리나라 쌈문화의 대명사 호박잎쌈

이른 새벽이면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이불을 끌어당기게 되는 초가을. 테니스공처럼 동그랗게 영글고 있는 예쁜 애호박과 보름달처럼 통통한 누렁덩이(늙은 호박)가 매달린 호박넝쿨 곳곳에 촘촘촘 돋아난 호박잎이 제철을 맞았다.

호박잎은 마악 넝쿨을 이리저리 뻗으며 노오란 호박꽃을 줄줄이 피우는 여름철보다 애호박이 아이 머리통만하게 매달리는 늦여름에서 초가을까지가 가장 제 맛이 나는 때이다. 호박잎은 너무 작고 부드러운 것보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로 자라 까실까실한 솜털이 송송송 붙어있는 것이 호박잎 특유의 향긋한 맛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감칠맛이 배어 있다.

호박잎은 예로부터 미나리잎과 쌈쓰럼한 머위잎, 씀바귀, 상추와 쑥갓, 취, 깻잎, 콩잎, 고구마잎, 아주까리잎, 배추잎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쌈문화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있다. 하긴 어디 이뿐이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땅에서 나는 채소 중 잎사귀가 조금 크다 싶으면 거의 모두 쌈을 싸먹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쌈을 싸먹는 채소도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봄에는 미나리잎과 머위잎, 씀바퀴, 상추와 쑥갓 등을, 여름에는 취, 깻잎, 콩잎 등을, 가을에는 호박잎과 고구마잎, 아주까리잎, 배추잎 등을 생잎 그대로 혹은 밥솥 위에 쪄서 쌈으로 먹는다. 그리고 겨울에는 정월대보름날 김 위에 오곡밥과 취나물을 함께 올려 싸먹는 복쌈이 있다.

▲ 호박잎은 늦여름부터 초가을이 가장 맛이 있다
ⓒ 이종찬
칼로리 낮아 여성들의 다이어트 식품으로 그만

어디 그뿐이랴. 바다에서 나는 김과 다시마, 미역 등도 아주 좋은 쌈 재료였다. 게다가 요즈음에는 무를 얇게 썰어 삼겹살이나 불고기 등을 싸먹는 무쌈이 있는가 하면 밀가루 반죽을 동그랗고 얇게 부친 전에 여러 가지 해물이나 고기, 채소 등을 함께 싸먹는 밀전병과 달걀을 후라이팬에 얇게 부친 달걀지단도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 채소와 해물 등으로 쌈을 싸먹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중 호박잎쌈은 김치와 풋고추, 된장, 고추장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민들의 가난한 밥상 위를 푸짐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좋고, 사람 몸에 좋은 식이섬유까지 골고루 들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

특히, 잎이 넓고 솜털이 까실까실하게 솟아난 초가을 호박잎은 섬유소와 비타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칼로리가 낮아서 여성들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그만이다. 그리고 밥솥 위에 쪄서 강된장과 함께 먹는 호박잎은 사람 몸속의 산화물질을 없애주며, 항암작용의 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명의 허준(許浚, 1546~1615)이 지은 <동의보감>에 따르면 호박잎은 산모의 부종(젖이 부은 병)과 삔 곳이나 허리 아픈 곳, 멍이 든 곳에 효과가 있다. 부종에는 서리 맞은 호박잎을 가루 내어 물에 개어 바르면 좋고, 삔 곳, 허리 아픈 곳, 멍이 든 곳에는 싱싱한 호박잎을 따서 나무망치로 잘게 으깨 바르면 효과를 볼 수가 있다는 것.

▲ 어린 호박순을 따서 된장에 넣어도 맛이 참 좋다
ⓒ 이종찬
이마 깨지고 벌에 쏘인 데는 호박잎에 된장이 그만

"옴마(엄마)! 인자 클 났다."
"야(얘)가 야가 각중에 와 이래 숨이 넘어가노? 와(왜) 또?"
"저어기 서산댁에 올개(올해) 다섯 살 묵는(먹는) 알라(아기) 하나 안 있나? 그 알라가 도랑가에서 가재로 잡다가 오산댁 알라가 던진 짱돌에 맞아가꼬 고마 마빡이 다 깨지뿟다카이."
"누가 그랬노? 설마 니가 그랜 거는 아이제?"
"내는 아이다. 오산댁 알라가 납작한 돌을 주워가꼬 물 튕기기(물수제비) 놀이로 하다가 고마 돌로 잘못 던지가꼬 그래 된 기다. 내가 보이(보니까) 머리에서 피가 출출 나는 기 반쯤 다 죽어가는 거 것더라."
"그으래. 박 터지고 벌에 쏘인 데는 호박잎에 된장을 발라가꼬 붙히모 그만인데…"


지난 1970년대, 내 나이가 열 살쯤 되었을 무렵 초가을이었다. 내가 살았던 마을 앞에는 배암처럼 길게 꼬부라진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그 도랑은 우리 마을 꼬마들이 물 속에 잠겨 있는 납작한 돌을 뒤집어 가재나 고디(다슬기)를 잡기도 하고, 소금쟁이나 물방개를 잡으며 노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그날도 꼬마들은 도랑가 여기저기 앉아 송사리 새끼와 민물새우를 잡기도 하다가 심심하면 맑은 도랑물 위에 물수제비를 날리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근데, 오산댁 꼬마 하나가 물수제비를 날리다가 돌을 잘못 던졌다. 그 돌은 도랑둑에 박힌 바위에 맞고 튀어나가더니 이내 옆에서 놀고 있던 서산댁 꼬마의 머리에 정통으로 부딪쳤다.

그때 서산댁 어머니께서는 오산댁 꼬마를 바라보며 '쯧쯧쯧, 내일 모레 핵교를 가야 할 나이에 시근머리(깨우침, 지혜)가 없기는'하며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서산댁은 피가 출출 흐르는 꼬마의 머리를 도랑물에 깨끗이 씻더니, 손에 들고 온 호박잎 위에 된장을 펴 발라 꼬마의 머리 위에 붙이곤 그만이었다.

▲ 찜통에서 살짝 쪄낸 맛깔스런 호박잎
ⓒ 이종찬
호박잎은 찌기 전에 물기를 깨끗이 빼내야 제 맛

"아빠! 오늘 저녁 반찬 뭐야?"
"오늘따라 그건 왜 물어? 특별하게 뭘 먹고 싶은 게 있어?"
"호박잎 좀 삶아주면 안 돼?"
"왜? 갑자기 호박잎에 쌈을 싸먹고 싶어?"
"엊그제 외할머니께서 된장국물에 호박잎쌈을 싸주시는데 맛이 너무 좋아서."
"그럼 그때 외할머니께 호박잎쌈을 좀 싸달라 그러지?"
"그날 저녁에 호박잎을 몽땅 다 먹어버렸는 걸 어떡해."
"걱정하지 마. 빛나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만들어 줘야지. 지금 당장 아빠가 텃밭에 가서 호박잎을 많이 따올께."


지난 6일(수) 저녁 7시쯤이었을까. 가까운 학원에 다녀오는 작은딸 빛나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호박잎쌈이 먹고 싶다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학원 다녀오는 길에 어떤 아주머니께서 텃밭에서 호박잎을 하나 둘 따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갑자기 호박잎에 밥을 싸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꿀떡처럼 나더라는 것이었다.

그렇찮아도 '오늘 저녁은 또 뭘 먹지?' 혼잣말을 지껄이고 있었던 내게 작은딸 빛나가 고민을 깨끗하게 씻어준 것이었다. 게다가 요즈음 같은 초가을에 솜털이 보송송하게 돋은 파아란 호박잎이 한창 맛이 있을 때가 아닌가. 그리고 올해 들어 지금까지 한번도 호박잎쌈을 싸먹어보지 못했지 않은가.

그날, 나는 집 옆에 있는 텃밭에 가위를 들고 나가 손바닥만한 호박잎을 제법 많이 땄다. 그리고 호박잎이 달린 순의 껍질을 벗기고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완전히 뺐다. 호박잎에 물기가 남아 있으면 호박잎을 찜통에 넣고 살짝 쪄도 잎이 늘어지면서 호박잎 본래의 향긋한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 고봉밥 한 그릇, 호박잎쌈 그리고 강된장
ⓒ 이종찬
▲ 호박잎은 강된장과 찰떡궁합이다
ⓒ 이종찬
"아무래도 아빠 손이 맛손인가봐"

사실, 호박잎은 예전 어머니께서 하시던 것처럼 밥솥에 밥을 하다가 뜸을 돌릴 때 익어가는 밥 위에 살짝 얹어 쪄내는 것이 제 맛이 난다. 하지만 그리 하자면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압력밥솥에 호박잎을 넣고 찔 수도 없다. 그렇게 세게 찌면 호박잎에 물러터져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호박잎과 궁합이 척척 잘 맞는 강된장을 끓이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집에서 담근 막된장과 고추장 약간, 매운 고추, 붉은 고추, 찧은 마늘, 송송 썬 대파, 멸치 맛국물 등만 있으면 된다. 먼저 막된장에 고추장을 약간 풀고, 멸치맛 국물을 적당히 부은 뒤 센불에서 보글보글 끓이다가 나머지 재료를 몽땅 다 넣고 중간불에서 한번 더 보글보글 끓여주면 끝.

"아빠! 아빠가 호박잎쌈 하나 싸서 내 입에 넣어줘."
"아니 왜? 말 만한 녀석이 호박잎쌈도 제대로 못 싸 먹어?"
"아빠가 싸주는 호박잎쌈이 훨씬 더 맛있단 말이야."
"그 녀석도 참! 그러니까 호박잎쌈을 쌀 때 강된장을 조금 많이 넣어라 그랬잖아."
"그렇게 해도 내가 쌈을 싸면 이상하게 맛이 별로 없어. 아무래도 아빠 손이 맛손인가봐."


하루가 다르게 가을빛이 점점 짙어만 간다. 텃밭 곳곳을 기어오르는 호박넝쿨에 매달린 호박잎도 초가을을 맞아 제 맛이 들었다. 이럴 때 텃밭에 나가 솜털 하얗게 솟아난 호박잎을 따서 살짝 삶아 쌈을 싸먹어보자. 구수한 감칠맛이 맴도는 강된장과 향긋한 호박잎이 가을과 함께 혀끝에 사르르 녹아내리리라.

▲ 호박잎쌈은 향긋하면서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맛이 일품이다
ⓒ 이종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