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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황도
ⓒ 박상건

▲ 모황도 앞에 있는 형제섬
ⓒ 박상건

기암괴석에 핀 배추꽃이 아름다운 섬

전남 완도군 완도읍 본섬에서 동남쪽으로 12㎞ 해상에 모황도가 있다. 완도 바로 건너편 섬 신지도에 딸린 섬이다. 면적은 0.13㎢ 해안선 길이 2.2㎞에 이르는 아주 작은 섬이다. 봄이면 먼 바다에서 바라 뵈는 섬의 기암괴석 사이에 핀 배추꽃이 노란 솜털 같다하여 뱃사람들은 모황도라 불렀다 한다. 안개 낀 섬에 핀 노란 배추꽃이 꽤 장관이었던 모양이다.

또 다른 섬사람들에 따르면 이 섬에 보리가 누렇게 익었을 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모황도라 불렀다는 설도 전한다. 아무튼 기암괴석에 핀 식물들이 참 아름다운 섬이었던가 보다. 모황도 앞 바다엔 형제도, 진섬, 외룡도, 내룡도 등 작은 섬들도 서로 어깨 걸고 출렁이고 있다.

섬문화연구소는 지난 8월 신지도에서 섬사랑시인학교 캠프를 열었다.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이 섬에 가서 낚시대회를 하는 것이었다. 정기여객선이 다니지 않아 신지도 가인포구에서 그물을 털러 가는 어부의 어선을 타고 섬으로 향했다. 모황도 주변 바다는 도미, 놀래미, 멸치 등 어족이 풍부하다. 그래서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멸치가 많이 잡혀 완도군은 이 일대를 낭장망어장지대로 지정하고 있다. 낭장망은 조류가 빠른 곳에 설치하여 멸치를 잡는 어구를 말한다.

무인도에서 다시 유인도가 된 섬

그래서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섬이 모황도이다. 해안가에서 보면 2~3미터 깊이의 바다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청정해역이다. 바위마다 따개비와 전복, 해삼 등도 즐비하다. 모황도는 1914년 행정구역 신지도 월양리(가인리)에 소속되었다 몇 차례 소속이 바뀌었던 섬이다. 1999년까지만 해도 4가구 12명의 주민이 살다가 잠시 무인도가 되었던 섬이다. 현재는 1가구 3명의 가족이 생활하고 있다.

150년 전 7가구가 살았던 이 섬은 생활의 변천사와 함께 주민들도 서서히 육지로 떠났다. 그것이 95년의 일이다. 아이들 교육과 의료시설, 전기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던 섬이었다. 2003년을 마지막으로 노부부가 유인도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할머니가 서울로 떠나 잠시 무인도가 되었다.

▲ 캠프 참가 일행들이 모황도에 도착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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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황도 지킴이 조양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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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인도가 된 것은 현재 조양배(52)씨가 고향 섬으로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유인도 족보를 이어간 조씨는 본디 신지도에서 살다 부산에서 23년 간 타향살이를 했다. 풍진세상을 떠돌던 그이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 운명적으로 이 섬에 당도했는데 당숙모가 150년 전 이 섬에 살았음을 알았다. 결국 조씨 핏줄이 이 섬의 역사를 써가고 있는 셈이다.

조씨는 3년 전 이 섬으로 들어왔다. 전기불이 없던 섬에 이제는 자가발전 시설도 갖추었다. 섬 주민들에게 면세 혜택이 주어지만 공짜로 쓰는 것은 아니어서 어지간해서는 발전기를 돌리지 않는다. 그이는 섬 모퉁이에 그물을 쳐서 고기 잡고 소라 등을 채취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따금 낚시꾼들을 안내하며 민박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 그이에게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섬 주민들처럼 큰 어장을 갖고 있거나 바다에서 채취한 것을 육지로 나가 파는 것이 생업도 아니어서 어업이 직업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 그래서 전기 사용료는 금값이다. 그러나 외딴 섬에서 생활하는 그이 가족들은 바다만큼이나 넓은 가슴을 품고 있었다.

섬 소년의 뱃노래와 구리빛 눈동자

한 여름 열대야에 땀 흘리며 도착했을 때 일행들에게 제일 먼저 건넨 것은 시원한 보리차였다. 물이 귀한 섬에서 이방인에게 베풀기엔 어려운 장면이다. 배를 타고 나가 고기잡이를 했을 때도 자신이 물속에 들어가 잡은 소라 해삼까지 섬을 떠날 때 선물로 챙겨주었다. 이 선물은 캠프에 참가자들에게 현지 해산물 맛보기라는 더없이 좋은 추억으로 나눠 가질 수 있었다.

▲ 8세 섬소년 기흠이가 뱃머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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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황도에서 잡은 고동과 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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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아들 늦동이 기흠(8)군은 이런 부모님의 낙천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그대로 닮았다. 녀석은 맞은 편 섬에 있는 신지동초등학교에 다닌다. 매일 어선을 타고 그 섬을 오간다. 날마다 부자의 아름다운 동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학교를 오갈 때 아버지는 선장이 되고 말동무가 되어 준다. 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아버지가 키를 잡고 아들은 닺을 캔다.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그 손놀림만은 여느 섬 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아주 능수능란했다.

집 앞 포구를 빠져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뱃머리가 방파제에 부딪치지 않도록 삿대질을 해야 했다. 그 때마다 녀석의 손놀림은 키를 움직이는 아버지와 신들릴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았다. 큰 배에서 다시 노를 젓는 작은 배로 바꿔 타고 갯바위 낚시를 갈 때도 녀석은 흔들리는 뱃머리에서 자연스럽게 닺을 캐고, 그 뱃머리에 서서 대중가요를 불렀다.

구리 빛 피부에 빛나는 섬 소년의 눈동자에서 그토록 당당하고 밝은 모습을 발견한 것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것이었다. 일행은 내내 웃음꽃을 피우며 녀석의 노래 가락에 맞춰 영화나 소설에서 접한 그런 낭만의 뱃놀이를 즐겼다. 한편으로는 낚시를 하던 중 한 시인이 우럭 한 마리를 낚아 올린 후 가판에서 자꾸 고기를 놓치자 아가미를 눌러 잡아 올리며 “선생님들, 저를 잘 보랑께요? 우럭은 몸통을 잡는 것이 아니랑께요. 이렇게 아가미를 살짝 부르면 된 당께요”라고 말했다.

▲ 모황도 앞 바다 은빛 멸치 떼와 멀리 외룡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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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통배가 노젓는 목선을 이끌고 포구로 돌아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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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서 더러는 비워놓고,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기흠이의 꿈은 탤런트이다. 동행한 방송국 피디가 방송국에 꼭 한번 오라고 했다. 녀석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 곡조를 더 뽑았다. 섬에서 동무 없이 자란 아이가 왜 이리 어른스러운 것일까? 어머니 김숙자(56)씨는 “늘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낚시꾼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말솜씨가 어른스럽고 대담해진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억척스럽지 않고서는 생활하기 어려운 섬 생활. 녀석은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푸른 파도처럼 힘차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맑고 밝은 모습이 아주 아름다워 보였다. 모황도 앞 바다에 서서히 노을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한 편의 시, 한 폭의 수채화였다.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갈밭머리 해 어스름녘/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한 마리 해오라기처럼”(송수권, ‘적막한 바닷가’ 중)

그렇게 우리 일행은 노을 진 섬을 떠났다. 한 점 섬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포구에서 소년은 내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움 탓일 게다. 노을에 젖은 섬처럼 소년은 그렇게 우리들 가슴 깊은 자리에 젖어들어 가고 있었다.

▲ 포구에 도착하여 먼저 뛰어내린 기흠이가 밧줄을 동여매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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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척의 배가 정박한 가운데 모황도가 노을에 젖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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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부터 섬 아이들 ‘수도서울 문화체험단’으로 상경

그로부터 얼마 후 서울에서 만난 우리 일행은 그 섬 모황도 이야기를 꺼냈다. 그 섬 그 소년처럼 섬에서 섬으로 학교를 오가는 낙도분교 어린이들을 초청하자는 것. 그들에게 수도서울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오는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기흠군을 비롯하여 완도 섬 지역 낙도분교 5개교 학생들을 서울로 초청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내일을 짊어질 아이들에게 대한민국 심장 수도서울의 행정 교육 언론 문화 현장을 체험케 하자는 것이다. 행사명은 ‘낙도분교 어린이 수도서울 행정교육언론문화 체험단’이라고 붙였다. 분교장인 선생님과 함께 섬에서 육지로 나와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광주역에서 고속철도를 이용한다. 차방 밖으로 펼쳐지는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악마의 함성이 가득한 시청광장에서 그들도 마음껏 기지개를 켤 것이다.

다시 청계천, 청와대, 고궁, 남산, 명동, 대학 캠퍼스, 언론사, 은행체험 등 서울의 중심문화를 체험할 것이다. 해맑은 섬 아이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시인들은 그들을 시낭송으로 환영할 것이다.

서울여대 학생들은 4일간 함께 이동하며 서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캠퍼스도 둘러보고 언니, 누나들과 함께 강의실 수업도 둘러보고 캠퍼스에서 바비큐를 굽고 연주회 감상도 할 예정이다. 그들이 있기에 나라 미래가 있을 터. 그 바다에 섬이 있기에 각박한 세상에 한결같은 꿈도 사랑도 푸른 파도로 출렁이고 있을 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섬과문화(www.summunwha.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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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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