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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우주소년 아톰>을 가장 재미있게 보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필자의 주변 어른들은 <사파이어 왕자>를 많이 이야기하신다.

어른들이 어린 시절에 재미있게 본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데즈카 오사무의 막대한 영향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그는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서까지, 편집자에게 "제발 일거리를 달라"고 떼를 쓴 엄청난 의욕의 소유자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의욕적으로 그린 만화, 그가 그린 세계는 어른들의 가슴 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와 동시에 현대의 만화에도 큰 자취를 남긴다.

<사파이어 왕자>는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이 크게 반영됐다. 데즈카 오사무가 어릴 적 살았던 곳은 효고현 다카라즈카였는데, 그곳에선 '다카라즈카 가곡'이라는 일본식 뮤지컬이 번성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그것을 즐겨봤던 데즈카 오사무는 학창 시절에 직접 배우로도 활동한 적이 있으며, 자기 스스로 <리본의 기사>(<사파이어 왕자>의 원제목)를 일컬어 "가극에 대한 중독 증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이라고 고백했다.

사실 필자는 데즈카 오사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만화를 알아가고, 많은 만화를 보면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만화가 없다는 것을 크게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사파이어 왕자>의 단행본과 애니메이션을 어렵게 구해서 감상하게 됐다.

<사파이어 왕자>, '왕자'의 눈망울을 기억하시나요

▲ 원제 <리본의 기사>로 되돌아간 최신단행본
ⓒ 학산문화사
<사파이어 왕자>는 1953년 1월부터 1956년 1월까지 고단샤 발행 잡지인 <겟간 쇼우죠 클럽>에 연재됐고, 1967년에 애니메이션이 제작된 만화다. 우리나라에서는 TBC에서 <꼬마기사 랑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MBC에서는 1971년, 1979년, 1985년에 <사파이어 왕자>, <꼬마기사> 등의 제목으로 여러 차례 방영됐다.

<사파이어 왕자> 이전의 일본 소녀만화는, 우리가 아는 소녀만화와 차이가 있었다. 이전의 소녀만화는 신데렐라처럼 계모 밑에서 고생하는 불쌍하고 착한 소녀를 그린다든지, 돌아가셨거나 잃어버린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야기(1980년대 한국만화의 주요 구성이기도 하다)가 주요 구성으로 통했다. 특히 태평양전쟁 도중에는 현모양처형의 부녀자를 양성하려던 국가 이데올로기의 개입으로 장르 자체가 퇴보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사파이어 왕자>는 무엇보다 소녀만화와 순정만화의 시초라는 점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일본만화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 등장인물들의 커다란 눈과 반짝이는 눈망울은 데즈카 오사무가 이 작품을 통해 완성한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기초를 닦아놓은 이 상징들은, 훗날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캔디 캔디>의 미즈노 히데코의 손을 거쳐 진화한다. 소녀만화의 또다른 상징인 화려한 너울주름이 달린 드레스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상징들 역시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요술공주 밍키> 등이 등장하면서 다시 발전했다.

<우주소년 아톰>에서 '피노키오'의 흔적이 진하게 감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파이어 왕자>에도 서양 동화의 흔적이 다양하게 반영됐다. 공주와 왕자의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와, 동화의 이면에 숨은 어른들의 권력 다툼에 대한 풍자 등은 서양의 동화에서 이따금씩 다루었던 소재들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서양의 동화가 다루었던 기존의 주제에, 당시 일본에 필요했던 현실적인 이야기들과 특유의 복선이 깔린 구성을 혼합함으로써 <사파이어 왕자>를 독창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부모'와 '여성'을 이야기하는 <사파이어 왕자>

▲ <사파이어 왕자>의 한 장면
ⓒ 무시 프로덕션, 후지TV
<사파이어 왕자>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하지만, 태어나기 이전에 천사의 사소한 장난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마음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오직 남성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실버랜드 왕국에서 그녀는 '왕자'로 자라는 운명을 맞이한다. 작은아버지인 '듀랄민 대공'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증거를 잡아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는 야망을 불태운다.

<사파이어 왕자>에는 전반적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지적과 풍자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기본적인 얼개에서도 그 지적이 느껴진다. 아이가 겪는 고난과 혼란은 대개 어른들의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다. 데즈카 오사무는 특유의 복선과 중층적인 구성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더욱 확대한다.

<사파이어 왕자>에는 4명의 '자녀'들이 등장한다. '사파이어'와 적국의 '프란츠 왕자', 듀랄민 대공의 아들 '플라스틱'과 마녀 '헬 부인'의 딸 '헤케트'가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모들의 '목적'과 '극성' 때문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사파이어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으며, '프란츠 왕자'는 어쩌다가 마녀의 딸과 결혼해야 하는 운명에 이르러 자신을 길러준 작은 아버지와 반목한다.

바보 같지만 착하고 순수한 '플라스틱'도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정치적 암투의 중심에 서게 되고, 야무지고 당당한 '헤케트'도 극성스런 어머니에게 결혼을 강요받고 있다. 만화 속 이야기지만 현실적인 구성이다. '본인들'이 하는 결혼이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나 외적인 여건에 크게 좌우되는 것은 요즘 세상에도 빈번한 일이다. 결혼이란 어디까지나 본인들의 애정과 관심, 의지가 중요한 법인데, 복잡한 인간 세상에서는 이런저런 일들이 늘 꼬이기 마련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4명의 '자녀'들이 겪는 혼란과 변화를 대단히 치밀하게 이야기에 연결해 특유의 중층적인 구성을 완성한다. <사파이어 왕자>에 나오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운명을 강요하다가 큰 코 다치기도 한다. 평소에 '만화가'라는 직업 때문에 부모들의 고정관념과 싸울 일이 많았던 데즈카 오사무의 직설적이면서도 풍자적인 비판이 엿보이는 장면들이다.

특히 그 비판은 "왜 여성은 왕이 될 수 없느냐"는 이슈 탓에 실버랜드 왕국에 한바탕 난리가 나면서 점입가경에 접어든다. '여성 천황'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일본의 현실 덕분에 지금 시점에서 본 <사파이어 왕자>는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사파이어 왕자>의 뒤를 이은 '오스칼'과 <란마 1/2>

▲ 다카하시 루미코의 만화 <란마 1/2>의 한 장면. 다카하시의 <우루세이 야츠라>의 후속작이면서, <사파이어 왕자>의 틀을 이어받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판 <란마 1/2>는 더 많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 후지 TV
<사파이어 왕자>는 현대의 드라마 연속극 시리즈의 주된 장치인 운명과 오해, 엇갈림 등의 장치를 활용해 소녀만화에서도 꽤 감칠맛 나는 스릴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이 한 몸에 동시에 있다는 주인공 설정은 훗날 많은 만화에 영향을 미치는데,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이나, 남자로 됐다가도 찬물을 맞으면 여성이 되는 주인공을 그리는 <란마 1/2>은 그 직접적인 예라고 할 만하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소녀만화의 틀과 기법, 범위는 더욱 다양해졌다. 특히 야구만화 <터치>는 소녀만화의 캐릭터와 감수성을 스포츠만화에도 이식한 작품이라고 할 만한데, 이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스포츠만화의 상징인 '열혈'은 늘 접하다 보면 쉽게 피곤해지는 성격의 것인데다, 가난했던 그 시절을 넘긴 후로는 그만큼 공감을 얻기도 어려워진다.

만화는 당당하게 소비자층을 이루고 있는 소녀들의 취향을 무시하고는 발전할 수 없다. 데즈카 오사무도 그것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취향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소년만화와 스포츠만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야기의 구성은 물론이고 그림체의 변화에도 영향을 준다.

그 모든 것의 시초가 <사파이어 왕자>였다는 것을 안다면, 어른들이 즐겨봤던 <사파이어 왕자>는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데즈카 오사무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면서까지 "제발 일거리를 달라"던 그 열정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는 과연 '신'이라 불릴 만했다.

덧붙이는 글 | 1.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2. 언급한대로 원제는 <리본의 기사>지만, 어른들은 <사파이어 왕자>라는 제목을 더 뜻깊게 생각하시는 듯해서 <사파이어 왕자>를 기사에 적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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