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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말, 내가 좋아하는 이문재 시인이 등단 20여년 만에 첫 산문집을 펴냈다.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의 내 카트에 쌓아두었다가 올해 초에 주문을 내어, 이번 겨울에 한국을 다녀온 딸아이 편에 가지고 오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황혼병을 앓고 있는 이문재 시인의 시선이 자주 가서 머물렀을 저물녘 서쪽 하늘의 노을빛에서 빌려왔음직한 단색의 주홍색이 표지 앞뒤를 통째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노을빛 위에 필시 시인이 육필로 쓴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산문집의 제목(옛 선인들의 문집처럼 거두절미하고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제목을 삼다니!)이 하얀 새털구름처럼 떠 있고, 그 구름 아래로는 이 산문집에 수록된 짧은 글들의 제목을 타자기로 친 작고 검은 활자들(이십대 초반, 그가 애용했던 크로바 타자기로 친 것일까?)이 도시의 골목길처럼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 도서출판 호미
그런데 날아갈 듯 춤추며 오른편이 다소 올라간 육필도, 모음과 자음의 배치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타자기 활자체도 내게는 모두 낯설었다. 그것들은 한때 내게도 익숙한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낯선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표지에서부터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문재 산문집>은 한때 익숙한 것들이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일상에서 낯선 것이 되고 만 것들에 대한 추억들로 가득 차 있다.

부채, 골목길, 마당, 우물, 걷기, 한옥, 편지, 동네 극장, 필름 카메라, 보리밥 등이 그러한 추억들의 목록인데, 그는 그러한 것들을 단순히 추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삶의 목록으로 현재화하는 노력도 함께 기울일 것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다.

그 설득의 방식으로서, 위에 언급한 추억의 세목들과 동시에 오늘날 그것들을 대체하고 있는 것들 즉, 에어컨, 엘리베이터, 주차장, 수도, 자동차 타기, 아파트, 이메일, 백화점, 디지털 카메라, 패스트푸드 등을 함께 내세워 서로 견주어 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 문명의 반인간적인 성격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문재 산문집>이 쉽게 읽히지만 쉽사리 덮어버리기는 힘들며, 읽는 동안 가슴이 따뜻해지다가도 날카로운 칼날이 들어오는 듯한 서늘함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

일찍이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이 대중매체에 쓰는 칼럼을 일기라고 말했다. 시인은, 문인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지식인은 대중 매체에 일기를 쓰는 것이다. 나는 겨우 시인이어서, 지식인이라는 자의식이 강하지 못하다. 다만 시인으로서 산문을 제법 많이 쓴 경우에 속하는데, 에코의 저 발언에 기대어, 일기를 쓰듯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원고 청탁에 응하려고 했다. '청탁 불문'의 결과가 바로 이 산문집이다. 시인이기 이전에 나는 기자이기도 해서, 진실 이전에 사실을 보려고 애를 썼지만, 한데 모아 놓고 보니 저널리즘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이상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내가 느려서, 게을러서 그렇다. (12쪽, 글을 묶으면서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이문재 시인이 자신의 첫 산문집을 묶으면서 밝히고 있는 이러한 소회와 자평은 솔직한 고백인 만큼 옳은 것이기도 할 터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자잘한 자신의 일상이나 가족, 직장 동료 및 친구들 사이에서 있었던 대화나 사건들이 일기처럼 드러나 있는 글들이 여러 편 보인다.

그러나 청탁 불문하고 쓴 이러한 글들이 글의 질이나 수준을 불문하는 개인적인 일기로까지 떨어진 것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문인으로서의 자의식에는 철저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이 책에는 어떤 주제를 두고 쓴 본격적인 에세이에서부터 신문 문화면에 실릴만한 짤막한 서평에 이르기까지 글의 형식과 내용과 길이를 달리하는 글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다양한 글들을 이루고 있는 그의 언어는 한결같아서 <이문재 산문집>이 결코 '이상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게 구사된 언어 속에서도, 그 언어가 거느리고 있는 그림자와 그윽하게 숨기고 있는 그늘과 오래도록 울리는 메아리까지 풍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문체는, 그가 기자이기 이전에 시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따라서 나는, '일기도 아니고 저널리즘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세이도 아닌 이상한 산문집'이라는 이문재 시인의 자평을 '일기이면서 저널리즘이면서 또한 에세이이기도 한 매력적인 산문집'이라고, 고쳐 읽을 수밖에 없다. 나의 호평이 그의 겸손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위 인용문에서 내가 그의 겸손이라고 여기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마지막 문장뿐이다. 이미 문단 안팎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발문가'로 소문이 나 있고 스스로도 '청탁 불문'하고 산문을 제법 많이 썼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등단 20여년 만에 첫 산문집을 펴내는 것은 게을러도 이만저만 게으른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생각도 이 책을 중반 정도 읽어나간 무렵쯤에는 바뀌고 말았다. 다음 구절을 만났기 때문이다.

궁핍의 여러 목록 가운데 하나가 시간이 없다는 것인데, 자기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사람처럼 가난한 사람도 또 없다. 한때 게으름이 아름답다면서 이 브레이크 없는 가속도의 시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슬렁거리는 산책을 해야 한다고 확성기를 틀어 왔으면서도, 정작 나는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최근에 한용운의 시를 읽다가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라는 문장 앞에서 숨이 컥, 하고 막힌 적이 있다. 그렇다. 바쁜 것처럼 게으르고, 부도덕하고, 반인간·반자연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라는 한 문장 때문에 나는 회사에 휴가원을 내고 사흘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밀린 잠을 잤다. 내 몸의, 내 삶의 생태는 잠도 모자랄 만큼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140-141쪽, '피넌가루에서 라다크로')


그렇다. 시인으로서 5년에 한 권꼴로(비교적 긴 시간이다) 시집을 묶어 내는 일만으로도, 기자로서 여러 매체에서 청탁한 글들을 써내는 일만으로도 그는 정신없이 바빴던 것이다. 너무나 바빠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산문들을 추려서 다시 손보고 보기 좋게 편집해서 책으로 묶어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나 바빠서 산문집을 펴내는 일에 게으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글에 욕심이 많은 독자인 나는, 이제부터는 그가 시집과 산문집을 펴내는데 게을러지지 않도록, 진정으로 느려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가속도로 질주하는 시대에서 '느리게 사는 삶'이란 몹시도 어렵고 힘겨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틈틈이 피맛골 골목길을 산책하고, 직장 근처에 있는 농업박물관에 들어가서 우리밀 싹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15박 16일 간의 지리산 팔백오십 리 도보 순례에 참여했으며, 가족들을 데리고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는 청송 한옥체험관에서 이틀 밤을 묵고 나온 바 있는 이문재 시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느리게 사는 삶은 단지 속도의 변화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느림은 빠름을 전제하고 빠름에 저항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림이 단지 속도의 테두리에 가두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대안적 문화가 느림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다. 느림에서 돌봄이 나오고, 나눔이 나오며, 더불어 살기가 나온다. 돌봄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고, 뭇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이다. 나눔은 전 지구적 차원의 생태 문제를 인지하게 하여,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을 도모하게 한다. 그리고 더불어 살기는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느림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처음이자 끝이다. 느림이 미래로 가는 문이다. (221-222쪽,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그 책은 느림에 관한 책이다')

이보다 더 간명하고 적절하게 '느리게 사는 삶'을 정의하고 있는 글을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느림에서 돌봄으로, 다시 나눔으로, 마침내는 더불어 살기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림이란 어쩌면 게으름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매일매일 아니 매순간 일상의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진정한 느림, 진정한 '느리게 사는 삶'이란 얼마나 부지런해야 이룰 수 있는 힘겨운 일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 힘겨움 앞에서 자주 넘어지고 무너진다. 나도 매일매일 넘어지고 무너지고 있다. <이문재 산문집>은 그 넘어지고 무너진 자리에 놓아야 하는 책이다. 이문재 시인이 자신의 시에 인용한 바 있는 보조국사 지눌의 '땅에 넘어진 자는 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因地而倒者 因地而起)'라는 법어처럼, 이 책에서 그가 고백하고 있는 그가 무너졌던, 어쩌면 지금도 무너지고 있을 그 땅을 짚고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3.

아아, 그러고 보니 <이문재 산문집>의 앞뒤 표지를 장엄하게 물들이고 있는 주홍빛 노을이 이제는 봄기운이 올라오는 남도의 붉은 땅으로도 보인다. 노을 지는 하늘에 뜬 새털구름의 책 제목은 그 붉은 땅 위에 아직도 더러 쌓여 있는 녹지 않은 잔설로도 보인다. 그 아래 타자기 활자체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글의 제목들은 그 잔설 아래 움트고 있는 검은 씨앗들로도 여겨진다.

그렇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하나이듯이 그 사이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도 그 하늘과 땅을 닮아야 함이 마땅하다.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의 삶이 그러했다. 느리게 사는 삶이란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하늘과 땅(자연)을,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이 누렸던 삶의 방식을 되돌려 받는 삶이다. 그것이 <이문재 산문집>을 읽으며 내가 깨달은 오래된 미래다. 나의 라다크다.

그 오래된 미래가 보여주는 주홍빛 노을 물든 하늘과 움트고 있는 검은 씨앗들을 품고 있는 붉은 땅이 나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눈부시고 따스해서, 내가 떠나온 고국 땅에서 막 봄이 시작되는 3월 초하룻날에 이 글을 적는다.

덧붙이는 글 | <이문재 산문집>

ㅇ 이문재 지음
ㅇ 도서출판 호미 펴냄
ㅇ 2006년 11월 29일 처음 펴냄
ㅇ 값 10,000원       

이 기사는 인터넷 서점 YES24의 독자리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문재 산문집

이문재 지음, 강운구 사진, 호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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