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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욱님 대출하신 도서가 연체되었습니다. 빨리 반납해 주세요. -마산도서관-."


누군들 책 반납을 미루고 싶었겠는가.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을. '바쁘다는 핑계'('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만해의 시 '사랑의 끝판'))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중이다. 보름째다. 도서관 쪽에서 얼마나 갑갑했으면 같은 내용의 문자를 세 번이나 보냈을까.


이문재. 지난 1월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 처음 그의 글을 보았다. 그의 '기사 문장론'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해서 기사를 쓸 때마다 '기사 문장론'을 훑어본다. 당연히 '기억하고 싶어하는 글' 목록에도 올려놓았다.


이문재. 그는 시인이자 전 시사저널 기자 출신이며, 지금은 경희대학교와 경희사이버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언젠가 <녹색평론>에서도 그의 글을 읽었다. '실업'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담담하면서도, 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지난 10월, 우연히 들렀던 도서관. 전자검색대에서 '이문재'를 쳐 넣었더니 시집 <제국호텔>과 함께 <이문재 산문집>이 튀어나왔다. '그 이문재가 맞을까?' 서가 쪽으로 갔다. 책 앞날개를 펼쳤다. 표지 사진의 그 얼굴이 '그 이문재'가 맞았다. 오예!


출판사도 <기자로 산다는 것>의 '호미', 표지 색깔도 엇비슷한 빨강 색이었다. 도서관을 빠져 나올 때 어찌나 기분이 좋든지. 좋은 책을 만나면 마음이 설렌다. 첫 사랑을 만나는 것처럼.


<이문재 산문집>. 제목이 참 깔끔하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그냥 <이문재 산문집>.  원래는 책의 제목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로 달려고 했었다고 한다.


이문재는 "일기를 쓰듯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원고 청탁에 응하려고 했다"면서 "'청탁 불문'의 결과가 바로 이 산문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내게 시와 산문은 아주 가까운 혈연이다. 나는 시를 통해 이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고, 그 급소를 건드리고 싶었다. 내 시에 내장되어 있는 문제의식에 물을 묻혀 번지게 한 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이다"라고 덧댔다.


책을 읽고 나니 잠시 먹먹해졌다. 무심코 지나친 일상이 떠올랐고, 되돌아보게 됐다.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이문재의 글은 불편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있다. 모두 마흔 여덟 편의 글이다. 짧은 것도 있고, 드문드문 긴 글도 나온다. 나는 좋은 글을 보면 밑줄 긋고, 공책에 옮겨 놓는데, 이 책을 읽고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냥 글이 다 마음에 들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대략 난감'이렸다.


'음, 역시 문정우 국장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어.' 지난 6일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이 주최한 제24회 시민언론학교 마지막 강연자로 시사 주간지 <시사IN>의 문정우 편집국장이 왔었다. 뒤풀이 자리가 무르익을 때였다. 내가 이문재 이야기를 꺼내니까 문정우 국장이 이렇게 되받았다.


"이문재는 기자들을 좌절시키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글로 말입니다."


나는 좌절까지는 아니고 '이 사람처럼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좀 따라해 봐야겠다는 정도다.


좋은 글 서너 편을 소감과 함께 뽑아보면(내 마음대로 뽑았다),


1. '하루를 정돈하는 괜찮은 방법': 하루를 정돈하는 방법으로 오늘 '난생처음으로 본 것'과 '새롭게 본 것'을 적어보자고 제안한다.


2. '식탁 위에 올라온 지구':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와 '이 음식은 어디로 가는가'를 가슴에 새기게 됐다. 길지만 옮겨보면, "이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가. 먹을 때마다 이 질문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방식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내 몸에서 나온 이것이 어디로 가는가. 배설을 할 때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실천 가능한 의견들이 모아질 것이다."-이문재 산문집, '식탁 위에 올라온 지구' 169쪽.


3. '백화점, 출구 없는 왕국': 읽고 나면 백화점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백화점 관계자들이 이 대목만이라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역발상 할 수 있는 계기도 되리라.


이문재가 쓴 제목을 오롯이 돌려줘야겠다.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그 책은 느림에 관한 책이다', 이 책 , 느림에 관한 책 맞다!


덤으로 김훈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나온다. 꽤 흥미롭다. 김훈의 글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김훈이 <한국일보> 문학 담당 기자였을 당시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에 대해 기사를 몇 줄 썼는데, 그때 이문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남해금산>을 백 번 읽었다."


그는 많이 읽을 뿐 아니라 깊이 읽는다고 한다. <태백산맥>에 대한 기사를 쓸 때는 소설을 정독하면서 대학 노트에다 인물이며 사건, 구성, 문체 따위를 하나하나 정리했다고 한다. 하여, 이문재의 평, "선배는 탐욕스럽고 까다로운 독자이다."


다음은 글쓰기.


"그의 연필은 그의 온몸이었다. 그는 온몸으로 연필을 밀고 나간다. 선배의 책상 아래 낭하던 파지며, 지우개 똥, 담배꽁초를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느닷없이 연못을 '유유자적'하는 오리가 떠올랐다. 오리가 그냥 떠 있는 것 같지만, 물 속에서 얼마나 부단히 다리를 젓고 있는가 말이다.


아무튼, 지난번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도 김훈에 대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는데, '연타석 홈런'인 셈이다. 출판사 호미를 눈여겨봐야겠다.


어이쿠야, 책 반납을 독촉하는 문자가 다시 들어왔군. 내일은 꼭 반납을 해야 쓰겠다! 그런데 이제 보름 동안 책을 못 빌려보는 처지가 되었는데, 왜 이리 기분이 좋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남도민일보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문재 산문집

이문재 지음, 강운구 사진, 호미(2006)


태그:#민병욱,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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