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9일, 토요일에 찾아간 남간정사, 겨울의 남간정사에는 쓸쓸한 풍경이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9일, 토요일에 찾아간 남간정사, 겨울의 남간정사에는 쓸쓸한 풍경이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조선시대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암 송시열이 학문을 가르치던 남간정사(대전시동구가양동)를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필자 역시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남간정사란 곳이 있는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히 소식을 듣고 가게된 남간정사, 얼마 안 가 그 매력에 흠뻑 빠졌들고 말았다. 그럴만했다. 우암 송시열이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남간정사는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축물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문턱, 필자는 다시 남간정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남간정사의 백미는 봄, 여름의 버드나무와 가을의 아스르한 햇살을 머금은 연못 풍경이다. 하지만 겨울 문턱에 선 남간정사 역시 겨울이란 계절이 내뿜는 독특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남간정사의 겨울풍경을 찾아 떠났다.

문틈으로 바라본 남간정사의 정경
 문틈으로 바라본 남간정사의 정경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문틈사이의 남간정사 정경
 문틈사이의 남간정사 정경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문틈사이의 남간정사 정경,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문틈사이의 남간정사 정경,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집에서 남간정사까지는 꽤 먼거리였다. 자동차로는 금방이었지만 걸어서는 갈 때에만도 30~ 40분씩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굳이 걸어서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에 대해 이유를 대자면 겨울의 정취를, 남간정사의 겨울을 좀 더 느긋하게 감사할 요량에서였다.

하지만 한참을 걸으면서 이런 마음은 이내 후회로 바뀌게 되었다. 겨울의 날씨가 몹시 쌀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간쯤 왔기에, 마음을 굳게먹고 한참을 걸은 뛰에 남간정사에 도착했다. 보람을 느낄만도 했지만 도착해서보니 낭패스런 일이 생겼다. 남간정사의 입구 문은 굳게 닫혀있었던 것이다.

남간정사 정문은  '언연못으로 인한 사고 예방'이란 이유로 굳게 닫혀있었다.
 남간정사 정문은 '언연못으로 인한 사고 예방'이란 이유로 굳게 닫혀있었다.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순간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남간정사 입구 문에 붙어져 있는 안내문을 보았다.  공사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이유는 외외로 단순했고 명료했다. 얼음이 얼어 아이들이 얼음에서 놀다 다칠 위험이 있으니 출입을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성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그냥 돌아가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또한 왠지 닫혀있기에 남간정사에 대한 생각이 더욱 진해졌다. 마치,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시간이 갈 수록 더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겨울의 남간정사 풍경
 겨울의 남간정사 풍경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다행히 남간정사의 담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담 근처를 어슬렁 배회하면서 남간정사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남간정사의 모습은 겨울이라 그런지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신록으로 우거졌던 여름과는 또 다른 겨울의 쓸쓸함. 그런 여운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비록 낮은 담이 할지라도,시야를 가려 남간정사를 제대로 감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담은 거추장스러웠다. 남간정사의 멋진 풍경전체를 보고 싶었지만 담이 눈에 거슬린 것이다. 그렇기에 한참을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그리고 급기야, 입구 문에 슝슝 뚫린 구멍으로 남간정사를 바라보았다. 남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조금 우스워 보였겠지만 정말 보고 싶은 광경이었기에 그런 부끄러움쯤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남간정사의 정경
 남간정사의 정경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지금부터 오래전에도 깊은 애절함을 간직한 채 쓸쓸히 남간정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을까?

남간정사는 지금으로 따지면 '명문 교육기관'쯤 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각지의 내놓으라 하는 양반댁 자제들은 전부 이곳에 몰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분명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몫 ,분명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슴 아프다. 그것이 신분으로 인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바깥에서 본 남간정사 정경, 남간정사는 배움을 꿈꾸는 이들에게 꿈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신분의 차이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바깥에서 본 남간정사 정경, 남간정사는 배움을 꿈꾸는 이들에게 꿈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신분의 차이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평민, 천민, 그리고 힘없는 몰락 양반 자제들에게 남간정사는 절대 올 수 없는 꿈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막혔다고, 희망조차 막아놓을 수 있었을까? 배움을 갈망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남간정사 앞에서 서성 거렸을 것이다.

남간정사의 겨울은, 그 쓸쓸함은, 남간정사에서의 배움을 갈망하던 많은 젊은이들의 눈물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남간정사의 겨울은, 그 쓸쓸함은, 남간정사에서의 배움을 갈망하던 많은 젊은이들의 눈물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곽진성

관련사진보기


아름다운 남간정사 앞에서 흘러나오는 공부 소리에 가슴이 설레고, 문 틈 사이로 양반집 자제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뜨거웠을 것이다. 그 현실이 젊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그런 신분의 벽이 조선 500년 역사동안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고통스럽게 했을까? 어쩌면 남간정사의 겨울은, 그 쓸쓸함은, 남간정사에서의 배움을 갈망하던 많은 젊은이들의 눈물 때문이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 괜한 상상 속에서 나는 마음은 외로워졌다.


태그:#남간정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잊지말아요. 내일은 어제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저널리스트는 오늘과 함께 뜁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