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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3월, 약관 20세의 김정태는 순수하게 등반을 목적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 인수봉에 올랐다. 그 길이 인수봉 전면 벽에 처음 열린 인수 B코스다. 그 등반이 후일 한국 등반사의 귀중한 초석이 되리라는 것을 그가 생각했는지는 확인할 바 없다.

…(중략)영국인 외교관이었던 아처가 1929년 5월에 북면으로 인수봉을 처음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기록상일 뿐이라는 단서를 달아야 옳다.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의 부친 이해문의 말에 의하면, 1924년 봄 인수봉 정상에서 누군가 쌓아 올린 돌탑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처 역시 인수봉에 오르기 전에 정상에 선 사람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 책속에서

열린 길만큼이나 많은 등반가들이 떨어지고…

<한국 바위열전>겉그림
 <한국 바위열전>겉그림
ⓒ 마운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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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개척의 시작, 즉 한국 등반의 시작은 이렇게 김정태로부터 시작된다. 김정태는 한국의 산악 등반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요. 인수봉 암벽에 뚜렷하게 새겨진 이름이다.

또한 눈길을 끄는 것이 인수봉 검악길의 '69년 12월 검악'.

1968년 여름, 우이동 버스 종점. 장대같은 비를 피해 평양상회 앞에 서 있던 김정명은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고급 외제차에서 내려 평양상회로 들어서는 여자와 마주친다. 인수봉 검악길 십자로에 '69년 12월 검악'이라 새기게 되는 '백명순'과의 만남이다.

건강을 위해 산에 자주 오른다는 숙명여대 4학년 백명순과 김정명은 쉽게 가까워진다. 세 살 위인 김정명을 백명선은 스스럼없이 따랐고 좋아했다. 그리하여 결국 김정명에게 이끌려 검악 산악회에 입회까지 하게 된다.

1969년. 인수봉의 많은 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늘길, 동양길, 서면 슬래브, 서면벽, 피톤길, 우정 A코스, 우정 B코스 등의 굵직한 길들이 태어났으며, 검악길, 크로니길, 숨은벽도 개척되기 시작한다.

한국 최초의 산악 잡지인 <등산>이 창간된 것도 이해 5월이니 1969년은 한국 등반사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해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고 또한 뒤따른다.

2월에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훈련대원 10명이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5월 31일에는 백운대 정상 아래 '마등'에서 백명순이 추락사한다. 김정명을 만난 이듬해였다.

김정명과 검악 산악회 회원들은 비석을 세워 그녀를 추모한다. 그리고 그해 9월, 김정명은 검악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백명순이 평소 열십자로 그어진 인수봉 남면을 가리키며 "저 곳에 바윗길을 만들면 얼마나 멋질까?"하고 자주 읊조렸기 때문이다.

검악길 셋째 마디 횡단 길 구간. 난이도보다는 고도감이 심한 곳이다(책속 사진 설명)
 검악길 셋째 마디 횡단 길 구간. 난이도보다는 고도감이 심한 곳이다(책속 사진 설명)
ⓒ 손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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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악길 십자로를 횡단중인 클라이머들. 십자로는 남성적이라고 표현되는 인수봉의 대표적 이미지다(책속 사진 설명)
 검악길 십자로를 횡단중인 클라이머들. 십자로는 남성적이라고 표현되는 인수봉의 대표적 이미지다(책속 사진 설명)
ⓒ 손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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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윗길을 처음 만든 사람들 이야기

하지만 김정명은 백명순이 자주 가리키던 십자로를 지나 횡단 길을 지나던 중 바위길 내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의 빈자리를 끝내 이겨낼 수 없었던 것. 이후 원준길, 이인희 등에 의해 1970년 5월 말에 검악길이 마무리된다. 그녀가 떠난 지 꼭 1년 만의 일이다.

인수봉의 수많은 바위길 중 하나인 검악길은 이렇게 열리지만, 김정명은 결국 1971년에 산을 영영 떠나버린다. 그리고 이민을 떠나고 만다. 그런 김정명이 20년도 훌쩍 넘은 어느 날 귀국하여 자신의 젊은 날 사랑이 아로 새겨진 검악길을 등반한다. 저자와 함께.

<한국 바위열전>은 한국의 대표적인 바위인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에 바윗길을 처음 만든 사람들 이야기다. 저자는 그들과 함께 한국산악운동의 중심이 되어 온 그 현장, 인수봉 25곳 바윗길들과 도봉산 14곳을 오르며 그 길만의 오롯한 사연들을 들려준다.

김정명과 백명순의 사랑이 아로새겨진 검악길뿐일까? <한국 바위열전>에서 만나는 길마다  산악인들의 도전과 개척, 집념과 열정, 사랑, 우정 등이 스며있다. 그들이 피투성이 손등과 깨진 손발톱으로 깎아지른 바위들을 조금씩 나아가며 열어놓은 그 바윗길들마다.

1987년 에베레스트 동계 등반 후 매년 히말라야 등반과 트레킹을 하고 있는 산악인인 저자의 경험들이 더해져 이야기들은 훨씬 생생하다. 또한 자연과 산을 소재로 몇 차례의 사진전을 연 사진가이기도 한 저자의 현장에서만 담을 수 있는 사진들이 아찔할 정도다.

산은 좋아하나 등산은커녕 암벽 등반은 꿈도 못 꾸는 내게는 흥미와 긴장, 아찔함이 범벅된 책읽기였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주먹을 꼭 쥐고 있을 정도였다. 책을 통해 한국 등반사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암벽 등반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목숨까지 위험한 암벽등반, 그들은 왜 바위에 죽고 사는가?' 이렇듯 평소 궁금하기 짝이 없던, 암벽 등반 중 목숨을 잃은 사고 소식을 접하며 더러는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던, 내게 '바위에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다.

<한국 바위열전>에 소개되고 있는 길들은 39곳. 등반에 큰 도움이 될 등반 요령, 주의할 점, 그 길만의 '등반 길잡이'와 '등반 지도' 등을 덧붙여 놓았는데 마디마다 거리, 코스별 성격 등을 세심하게 적어 놓았다.

바윗길 위치, 형태, 등반 거리, 총 마디, 최고 난이도, 주요 장비, 소요 시간 등 등반에 필요한 사전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180여 개 바윗길 길잡이 도표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암벽 등반에 필요한 부록이 많아 산악인들에게는 단비 같은 책이 될 것 같다.

책속 현장 사진1
 책속 현장 사진1
ⓒ 손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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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 현장 사진 2
 책속 현장 사진 2
ⓒ 손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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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한국을 대표하는 바윗길들을 초등자들과 다시 함께 오르며 완성한 작품으로, 사료적 가치와 통쾌한 사진, 그리고 문학적 향기가 두루 어우러진 명품이다.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이 개척되던 1960~1970년대는 '한국 암벽 등반의 황금시대'라 할 만하다.

그때의 자랑스러운 산악인 선배들은 암울한 현실과 조악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전인미답의 바위 위에 새 길을 냈다. 그 가난한 시절의 아름다운 기록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터져 나오는 웃음과 젖어오는 눈시울을 가눌 길 없다. 바위에 오르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산악인 손재식이 그 '삼위일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바로 이 책을 탄생시켰다.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산(마운틴북스 편집인)

쉽게 나올 수 없는 이색적인 책이고 목차와 내용이 워낙 흥미롭지만, 전문 자료가 충실해 자칫 전문가들을 위한 책으로만 볼 일반 독자들도 있을 수 있겠다. 또 전문용어 설명이 없어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더딘 산행(책읽기)이 될 수도 있을터. 저자도 편집인도 이미 해외 트레킹 중이란다. 그리하여 지난 4일 출판사의 또 다른 편집자에게 이 책에 대해 물어보았다.

-<한국 바위열전>은 일반인들을 위한 책인가. 전문가들을 위한 것인가?
"굳이 구분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은 한국 암벽 등반의 개척사, 즉 한국 산악 등반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황금기는 60~70년대이다. 가장 많은 등반길을 개척한 시기다. 등반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오래 전에 활동한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지금 막 등반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이야기들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산을 오르지 않는 일반인들은 산과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재미있고 쉽게 만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일반인으로서 조금 아쉽다. 등반 전문용어를 간략하게라도 언급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어림짐작으로 전문용어들을 이해하였으나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전문용어 설명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선 미안하다.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다시 책을 인쇄할 때 용어 설명을 추가해 보도록 하겠다."

-책에는 북한산 인수봉 개척이 대부분이다. 인수봉은 우리 등반사에서 어떤 곳인가?
"인수봉 개척사를 읽으면 우리나라 암벽 등반의 역사를 읽는 것과 같다. 인수봉은 우리나라 암벽 등반의 심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수도처럼 우리나라 등반사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등반과 상관없이, '우리 민족의 상징적인 산'으로서, 그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등반가들에게 인수봉은 어떤 곳인가? 인수봉을 왜 좋아하는가?
"바위가 훌륭하다. 웅장하고 멋있다. 규모가 크다. 길이 다채롭다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만이 아니다. 세계 등반가들도 좋아한다. 도심에 이만한 규모의 아름다운 바위가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부러워하고 놀란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한 바위인 요세미티는 몇 시간을 일부러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인수봉은 쉬운 말로 지하철 타고도 갈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해외 등반 전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한국 바위열전>- 집념의 마력, 바위에 미친 행복한 도전자들/손재식 사진과 글/마운틴북스 2008.5.16/25,000



한국 바위 열전 - 집념의 마력, 바위에 미친 행복한 도전자들

손재식 지음, 마운틴북스(2008)


태그:#인문교양, #암벽, #인수봉, #선인봉, #한국 등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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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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