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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을 최선의 지도자라고 여기는 이강국

이강국은 대절한 택시 뒷자리에 앉아 서울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서울의 치안은 급격히 문란해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무장을 풀지 않은 채, 화신백화점 길 건너에 주둔하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인민공화국이라고 쓴 깃발이 나부꼈다. 그것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만든 이름이었다. 물론 훗날 북에서 만들어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는 실체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강국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건국사업에 착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성제대 학생들 위주로 구성된 서클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과 매일 두 시간씩 독서회를 진행하며 그들에게 마르크스와 레닌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박헌영은 아직 서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미 중국파 공산주의자들이 서울 '장안그릴'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학생들이 전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을 장안파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강국은 민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 중에서 박헌영이 가장 순수한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외국에 나가 있었거나 숨어 지냈다. 심지어는 광산업을 하며 돈을 번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한 번도 국내 투쟁을 멈추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박헌영과 헤어진 지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제가 먼저 나가 정지 작업을 해놓겠습니다."
"이 동지가 고생 좀 해주시오."

이강국은 박헌영을 인민의 지도자로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경성제대 학생들은 다른 전문대생보다 사회주의에 열정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학교 선배기도 한 이강국을 잘 따라 주었다.

이강국은 벽보와 삐라를 제작했다. 그는 그날밤부터 학생들과 함께 서울 거리에 벽보를 붙이고 삐라를 살포했다.

'박헌영 동지여! 당신이 지하에서 나타나 우리를 이끌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강국은 전남 광주에 있는 박헌영에게 사람을 보내 연락했다.

'닷새쯤 후에 서울로 오시면 됩니다.'

이강국은 사흘이 지난 후 다른 내용의 벽보를 붙인다.

'박헌영 동지가 우리를 이끌려고 곧 모습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강국은 다음날 계동에 있는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에 나갔다. 건준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일본인의 안전 귀국을 위해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를 부탁함으로써 결성된 단체였다. 8· 15 직전 아베를 은밀히 만난 여운형은 안재홍과 상의를 거쳐 해방이 공식화된 8월 15일 저녁에 이 단체를 결성했다.

여운형은 외견상 민족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표방해 온 송진우에게도 합류를 종용했지만 거절당한 바 있었다. 송진우는 건준에 참여한 이영, 정백, 그리고 이강국 등이 공산주의자임을 들어 참여를 거부한 것이었다. 송진우는 재산이 많은 민족주의자였고 김성수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건준은 치안 확보와 건국 사업, 그리고 경제 기반 유지를 목표로 내세웠다. 이강국은 박헌영과 상의한 끝에 그의 조언대로 건준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송진우, 김성수 등에게 설득당한 부위원장 안재홍마저 탈퇴하자, 건준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단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위원장인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좌익계가 주도하게 된 건준은 9월 6일 700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을 통과시켰다. 이틀 후 인민위원회 부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이 5인조 자객에게 테러를 당했다. 여운형은 치료와 안전을 위해 가평 시골집으로 피신했다.

이강국은 여운형의 테러에서 조국에 닥쳐오고 있는 먹구름을 보는 듯했다. 그는 회의의 사회를 맡아 부서 결정은 연기하고 위원 선정만 하려 했지만, 이영 정백 등의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이 부위원장 허헌의 재가를 받아 부서 책임자를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이런 식으로 하면 가뜩이나 소외된 우익을 되돌아오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좌익 내에서도 통일된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분노한 이강국은 건준 해산을 제의했다.

"이대로 가면 갈등의 골이 깊어져 비극적 결과밖에는 얻을 수 없습니다."

건준은 10월 7일 정식으로 해산 절차를 밟는다. 이강국은 좌익 내 통일이 더 화급하다고 느꼈다. 우익도 마찬가지지만 좌익 역시 일제 때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거의 없는 세력들이 더 나대고 있는 실정이 그는 안타까웠다.

미군, 임정요인들을 장갑차에 태우다

한편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이 이루어진 것은 해방 후 100일도 더 지난 11월 23일이었다. 일주일 전 상해에 도착한 임정 요인들은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환영회는 윤봉길이 압제 민족의 설움을 폭탄에 담아 터트렸던 홍구공원에서 열렸다. 김구는 목 맨 음성으로 자주 독립과 통일 조국을 외쳤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1월 23일에 미국 군용 비행기에 탑승한다.

장준하도 임정요인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잘 있어라, 대륙이여. 다시는 너에게 오지 않으마."

비행기에는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김상덕 문화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엄항섭 선전부장 등이 앞자리에 앉았고, 김규식의 아들이자 임정 비서인 김진동을 비롯한 수행원들이 뒷자리를 차지했다. 홍일점으로 안미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김구의 죽은 아들 인의 부인이자 안중근의 조카였다. 늦은 환국이었지만 그나마도 장개석이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었다.

마침내 조국의 해안선이 눈 밑에 드러나자 기내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김구는 입술을 깨물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좌석에 기대곤 했다. 굵은 눈물이 검은 안경테 아래로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준하는 혼란과 환호가 엇갈리고 있을 서울을 생각했다.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 대신에 주둔해 있다는 조국의 거리는 어떠할까? 상해에서 들은 바로는 지금 조국은 각파 각층의 세력과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고 했다. 정치적 훈련이 없었던 우리 민족은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는지?

'쓸데없는 상념일랑 다 버리고 조국에 가서 열심히 일이나 해보자.'

어느덧 비행기는 강화도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공항에 마중 나온 차량은 미군 장갑차들이었다. 임정 요인들은 밀폐된 장갑차 안으로 두 명씩 들어가야 했다. 미국은 독립투사들의 귀국에 민간인들이 환호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장준하는 비행기 창보다 더 작은 장갑차의 셀룰로이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얼마나 보고 싶던 조국 거리의 풍경이던가. 장갑차는 한강 인도교를 지나 용산으로 달리고 있었다. 거리에 나붙은 무수한 벽보들이 조국의 혼란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온갖 격문과 포고문과 선전문들이 담과 벽마다 도배되어 있다시피 했다.

그들이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으로 들어간 것은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미국은 임정요인 환국 사실을 극비에 붙였음이 분명했다. 심지어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조차도 환국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어 경교장에 이승만이 나타났다. 그는 김구를 20여 분 간 만나고 돌아갔다. 얼마 전 그는 임정 요인의 환국을 의식했는지 중앙방송을 통해 말한 바 있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에게만 유일하게 일주일에 한 번 대국민 방송 기회를 주고 있었다.

"나는 임시정부의 한 사람이다. 그들이 와서 타협하기 전에는 아무 데도 관여하지 않겠다. 며칠 안으로 그들이 귀국하게 되면 전 국민이 대환영할 줄 믿는다."

말과 달리 이승만은 김성수를 시켜 한민당을 만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연말까지 연재됩니다.



태그:#건준, #임정요인환국, #박헌영,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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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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