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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나는 왼쪽 볼을 감싸 안았다. 찌르르한 고통이 퍼져서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뭐지?' 당황해서 멀뚱멀뚱 서있는 사이, 소리를 듣고 3층에서 주인집 아줌마가 달려 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보일러에 붙어있어야 할 덮개가 없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후끈해진 뺨을 부여잡고, '화상을 입은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행히 화상은 아니었다. '단지' 보일러에게 뺨을 맞았던 거다. 지금부터 비유나 은유나 반어가 아닌 '진짜로' 보일러에게 왼쪽 뺨을 있는 힘껏 얻어맞은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입에서 연기 나네... 나 혹시 용가리?

사건은 늘 그렇듯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추운 날 보일러를 켜지 않고 밖에 나갔다가 그만 꽁꽁 얼어버린 거다. 얼마 전에도 한 번 보일러를 끄고 다니는 바람에 온수가 꽁꽁 얼어서 혼쭐난 경험이 있었다. 다행히도 날씨가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녹았는데, 그날 기억은 깡그리 잊은 채 밖에 나간 몹쓸 주인 덕에 보일러는 또다시 동파됐다.

텔레비전에는 연신 '영하 15℃'의 추위를 강조하며 동파 방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는데 나는 몰랐다. 왜냐면 요즘 텔레비전을 전혀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날씨가 예사롭지 않아 내복을 껴입는 정도의 대비를 했을 뿐, 보일러까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1월 8일부터 10일까지 일이 있어서 잠시 집을 비우기까지 했다. 한 2초 정도 망설이다가 보일러를 끄고 밖에 나갔다. 그 사이 서울에는 맹추위가 달려들었고, 돌아와서 보니 손쓸 수 없이 보일러가 꽁꽁 얼어버린 거다.

밖에서 벌벌 떨다가 집에 들어온 시각은 토요일(10일) 자정. 정말 추워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날씨지만 밖이나 방이나 온도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갑자기 러시아에서 추위로 40명이 죽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덜컥 겁이 났다.

숨을 내쉬자 용가리처럼 입 밖으로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평소에는 2℃만 올려도 뜨끈뜨끈하던 옥장판 온도를 5℃씩이나 올렸는데도 따뜻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춥기도 추운데다가 하필이면 주말이었다. 주말에는 보일러 수리하는 아저씨가 오지 않는다.

있는 이불을 다 꺼내서 (정확하게 말하면 이불 한 개에 무릎 담요 두 개) 코끝까지 덮고 오돌오돌 방 안에 누워서는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보일러를 켜두고 갈걸! 얼마나 아낀다고, 보일러를 끄고 간 덕에 이게 뭐야?’, '추워, 춥단 말이야!', 그러나 상황은 결코 되돌려지지 않았다.  

결국 터져버린 보일러, 내 뺨을 '강타'하다

그렇게 '이글루'에서 주말을 보내고 돌아온 월요일(12일)!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눈을 뜨자마자 상태가 어떤지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에 보일러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눌러본 것 같기는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어서, 다시 덮개를 닫고 옥상 한 귀퉁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싸늘한 보일러 앞에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이런 곳에 보일러를 설치하다니, 얼지 않는 게 더 이상한거야!'라며 속으론 욕을 좀 하고 있었다.

그러다 "펑" 했다. 굉음이 들리면서 보일러 덮개는 맹렬한 속도로 날아 허공 저편으로 사라졌다. 반대편 지붕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것 같은데, 결국 찾지 못했다. 물론 날아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왜냐면 날아가는 보일러 덮개에 얼굴을 강타당하고 있었으니까.

보일러 덮개가 날아간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 덮개가 내 뺨을 치고 날아간 것은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웃긴 일이다. '몸 개그'로 승부하는 영화 <덤 앤 더머>에나 나올 상황이었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빛과 같은 속도로 날라 가는 보일러 덮개에 맞아 입술이 터지고, 결국엔 입주위에 시커먼 멍 자국이 남았다.

보일러 교체하는 데 55만원? "오 노!"

덮개가 날아가버린 '흉측한' 보일러의 모습이다.
 덮개가 날아가버린 '흉측한' 보일러의 모습이다.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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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올라온 지 9개월째 접어들지만, 한 번도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름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와서, 춥디추운 옥탑방 옥상에 덩그러니 서서 보일러에게 뺨 맞고 입술에 피를 흘리면서 서 있는 걸까?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돈 없어서 옥탑에 사는 게 서럽고, 칠칠치 못한 내 성격이 서럽고, 고장 난 보일러가 서럽고, 매서운 바람도 서러웠다.

나는 보일러고 뭐고,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은 극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일은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추운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도착한 보일러 아저씨는 이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유유히 사라졌다.

"보일러가 터져서 새 걸로 교체를 해야 합니다. 아래 파이프까지 다 얼어버렸으니, 오늘 못하겠어요. 내일 합시다."

그리고 보일러 견적으로 55만원을 제시했다. 55만원! 55만원! 55만원! 이라니!

"네? 55만원요?"
"보일러 가격이 50만원이고, 파이프까지 하면 5만원 추가 됩니다."
"그걸 제가 다 내야하나요?"

눈앞이 캄캄해졌다. 난 억울했다. 10년도 더 넘은 보일러를 내가 새 걸로 교체해야 하다니! 그 순간은 내 과실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 집도 아니고, 단 몇 달을 살았을 뿐인데, 내 잘못도 있지만 밖에 보일러를 설치한 탓인데, 날씨가 너무 추웠던 탓인데, 내가 돈을 다 주고 보일러를 바꿔야 한다니!

그냥 보일러를 안 고치고 살고 싶었다. 계약이 끝나고 나갈 때 보일러를 떼어 가겠다고 '빡빡' 우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고 보일러로 바꾸고도 싶었다. 하지만 난 결국 아무 말도 못했다. 시무룩하게 멀찍이 서서 또다시 나의 부주의를 저주했다.

'보일러만 안 끄고 나갔더라면…, 얼었더라도 괜히 해본다고 이것저것 눌러보지만 않았더라도 터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 바보, 이 바보.'

도착한 '신상' 보일러, 30만원 꿀꺽

다음 날(13일), 오전 9시 반에 찾아온 보일러 아저씨는 장장 4시간이 넘게 씨름한 끝에 보기에도 훨씬 고급스런 '신상' 보일러를 옥탑방에 장착했다. 하지만 그 덕에 어제 막 들어온 한 달 치 '알바'비 29만482원에 만원을 더 해서 총 30만원을 몽땅 날렸다.

원래는 55만원이지만 주인집에서 반을 부담해주기로 한 탓이었다. 보일러 아저씨는 지나가는 말로, 보통 이런 경우에는 세를 든 사람의 과실로 주인집에선 신경도 안 쓰는 경우가 많다고 좋은 주인을 만난 거라며 거들었다.

어차피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나마 30만원을 내고 고치는 것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더군다나 주인집은 추위에 떠는 내 안위를 걱정하면서,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점심을 차려주기도 했다. 물론, 주인집과의 오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마웠다.  

왼쪽에 있는 파란선이 동파 방지를 위해 제작한 열선이다. 오른쪽은 보일러 아저씨의 007가방! 보일러를 설치하는 김에 열선도 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절대 동파되는 일은 없겠지?
 왼쪽에 있는 파란선이 동파 방지를 위해 제작한 열선이다. 오른쪽은 보일러 아저씨의 007가방! 보일러를 설치하는 김에 열선도 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절대 동파되는 일은 없겠지?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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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끝내고 다시 나는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가야 했다. 한 시간에 5000원짜리 알바를 하러 가면서, 택시를 타는 '사치'를 누린 나는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 살짝 열까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택시 아저씨에게 내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보일러가 추워서 동파된 것, 그래서 견적이 55만원이 나온 것, 부산에서 올라온 이야기, 옥탑에 사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하다 보니 다시 살짝 서러워졌다. 아저씨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로 딱하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조금만 고생하면 될 거야. 힘내라고!"

그래 돈이 무어 그리 대수냐. 이만한 일로 좌절하지 말자. 이까짓 돈 30만원 안 벌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결국엔 다 좋게 끝나지 않았나. 그 순간 나의 불만과 불평과 울음 섞인 자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으로 주인집의 따뜻한 진짜 정도 느꼈고, 보일러 아저씨는 친절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주고 갔으며, 새로 설치한 보일러는 온수도 더 잘 나오고, 바닥도 뜨끈하게 쌩쌩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보일러 덮개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던 경우였다. 다행히 멍든 내 입술은 많이 가라앉았다. 그러면 된 거다.

매 순간순간들은 후회해도 결코 돌아올 수없는 시간들이다. 그러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주위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또 하루는 좌절하면서, 나는 내일도 이 옥탑방에서 좀 더 열심히 하루를 시작해 보고 싶다.


태그:#동파, #옥탑방, #보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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