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지난해 8월 KBS는 크게 술렁거렸다. 국가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한 '정연주 사장 찍어내기'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됐고, 8월 8일 그 최종 단계로 이사회가 정 사장 해임을 결의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날 이사회는 경찰 병력이 KBS 사내에 진입한 상태에서 진행됐다. 노동조합이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750여명의 사원들은 즉각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사원행동'을 만들어 이같은 흐름에 저항했다. 

 

같은 달 27일, 우여곡절 끝에 '낙점'된 이병순 사장의 첫 출근 역시 순탄치 않았다.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은 '해체 이사회' '사수 공영방송' 손피켓을 들고 이른 아침부터 본관 계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사장을 태운 자동차가 본관 앞에 설 무렵, 본관 입구쪽에서 안전관리팀 요원 수백 명이 우르르 내려왔다.

 

이 사장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안전관리팀 요원들과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이 뒤엉키고 넘어졌다. 안전관리팀 요원들은 필사적이었다. KBS 본관 계단과 민주광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옷이 찢어지고 셔츠 단추가 툭툭 떨어져 나갔다. 여기저기서 안전관리팀 요원들에게 사지를 붙들린 사원들이 들려나왔다. 여러 사원들이 민주광장에 주저앉아 울고 부르짖었다.

 

내부 출신 첫 사장, 이병순의 KBS 시대는 지금

 

안전관리팀 요원들의 적극적 보호 아래 이 사장은 금세 본관 취임식장으로 올라갔다. 민주광장의 육탄전이 진정되기도 전에 사내망을 통해 이 사장의 취임사가 퍼졌다.

 

이 사장은 우선 자신이 KBS 출신 사장임에 의미를 두며 취임사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KBS 선후배 동료 여러분! 반갑습니다. KBS 공채 4기 이병순입니다. 지난 77년, 최고의 기자가 되겠다며 KBS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지 31년이 흐른 오늘 - 지금에 와서야, KBS는 오랜 염원 한 가지를 이뤘습니다. KBS가 공영방송으로 출범한 지 35년 만에 첫 내부 출신 사장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벅찬 감회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5개월 뒤, 공채 4기 이 사장은 결국 그날 민주광장에서 '사수 공영방송' 피켓을 들고 몸을 던졌던 공채 후배들에게 칼을 휘둘러 찍어내고 쫓아냈다. 그가 언급했던 '무거운 책임감'은 파면, 해임 등의 무거운 징계로 돌아왔다.

 

이 사장은 취임사에서 "존경하는 시청자와 국민들께" 몇 가지 약속을 한다.

 

"KBS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KBS는 지난 몇 년 동안 공정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공정성을 잃을 경우 KBS가 어렵게 쌓아올린 국민적 신뢰는 한 순간에 추락하고, 공영성 여부까지 문제될 소지가 클 뿐더러 나아가 정보의 왜곡으로 민주주의의 발전까지 저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KBS의 신뢰도와 영향력이 위협받고 있다. 뉴스 보도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엔 신뢰도 1위를 놓친 자체 설문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런 약속도 했다.

 

"시청자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KBS는 시청자의 다양한 시각들을 충실히 대변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정 이해집단에 치우치는 방송은 KBS의 존립근거를 스스로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사회통합과 조정의 역할 대신, 지나친 편향성으로 시청자의 따가운 지적을 받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병순 사장이 지킨 약속 한가지는 무엇?

 

이 사장이 지금 다시 이 취임사를 읽는다면 몹시 민망해야 할 일이다. 가깝게는 지난해 말 재야의 종 방송 당시 KBS는 '다양한 시각들을 충실히 대변할 의무'를 저버렸다. 현장을 숨기고, 가리고, 입혔다. "지나친 편향성으로 시청자의 따가운 지적을 받"았다. 시청자들의 비난글이 KBS 게시판을 꽉 채웠다.

 

취임사에 비춰볼때 아직 이병순 사장은 시청자와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닌 부분도 있다. 

 

"지금까지 대내외적으로 비판받아 온 프로그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도 변화하지 않은 프로그램은 존폐를 진지하게 검토하겠습니다. 제작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시청자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변화하겠습니다."

 

이 약속은 재빠르게 지켰다. 이 사장은 "일방적인 폐지 반대" "정권 입맛에 맞춘 개편 반대"를 외친 KBS PD, 기자들의 잇따른 집단행동에도 불구하고 <시사투나잇>과 <미디어포커스>를 폐지했다. 취임사에 언급한 내용중 가장 빨리 지켜낸 '약속'이 이것이었다.

 

이 사장은 또 "KBS의 독립성 확보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는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과 저의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겠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이 사장의 신념과 철학은 사원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 같다. 대통령 주례방송 추진 과정에서 KBS 라디오 PD들은 "독립성 훼손이 우려된다"는 의사를 줄곧 피력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이 방송을 통해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1월 12일 라디오 방송)하는 일까지 벌어져 PD들의 우려가 현실이 됐지만 재검토한다는 말은 없다.

 

8명의 KBS 사원들이 중징계당한 지금 시점에서 곱씹어볼 이병순 사장의 취임사 중 백미는 지금부터다. 취임사에 분명히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동안 조직 안에서 빚어진 갈등들을 해소하고 조직의 화합과 안정을 통해 'KBS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습니다. 이를 위해 사장으로서 공평·무사의 원칙을 지키고 편 가르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원 모두의 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직종 간 갈등도, 신구세대간 갈등도 이제 모두 씻어버립시다! 서로 전문가로서  존경하고 선배는 경륜으로, 후배는 젊음과 패기로 '하나된 KBS'를 위해 손을 잡읍시다. 모두 '하나된 KBS'를 위해 어깨동무로 전진합시다!"

 

'따뜻한 사람' 이병순의 그릇, 파면·해임밖에 안 되나 

 

KBS는 징계 통보 이후 비판 여론이 들끓자 수차례에 걸쳐후 "일부에서 현 경영진에 반대해 보복성 징계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번 징계는 현 경영진이 취임하기 전에 일어난 이사회 업무 방해 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결코 보복성 징계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경영진이 취임하기 전에 일어난 일을 왜 5개월이나 지난 지금, 그것도 해를 넘긴 시점에서, 파면 해임 등의 중징계로 다스리는 것일까. '파면'이 뭔가? "KBS의 모든 것을 잊으라"는 통보다. 

 

'공영방송 KBS'의 수장이 '사수 공영방송'을 외치던 사원들을 미묘한 시점에 해고했다. 그리고는 "난 모르는 일이며, 이사회 요청에 따라 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손 잡자"고, "어깨동무하자"고, "갈등 씻어버리자"고 했던 공채 선배 사장이 5개월만에 이렇게 안면 싹 바꿔도 되는 것인가

 

결국 취임사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하는 KBS 선후배 동료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알려진 것보다는 더 따뜻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사람, 자신과 동료에게, 파괴나 분열보다는 희망의 무지개를 그려주는 사람들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지시와 독촉의 호루라기는 절제하는 대신 격려의 박수를 더 크게 쳐주는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선배님과 후배 여러분, 희망은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합니다. 분열과 갈등의 골을 메우고, KBS 깃발을 다시 세우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감사합니다."

 

희망의 무지개… 격려의 박수… 동반자… 좋은 단어가 많다. 하지만 최근 KBS의 사정과는 많이 동떨어지는 단어들이다.

 

2009년 1월, 이병순 사장 스스로 선택지를 던졌다. '파면, 해임자가 유감 표명이나 사과를 하면 징계 수위를 낮춰줄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사원들은 이 소식에 더욱 분노하고 있다. 이병순 사장의 '그릇'에 실망하고 있다.

 

이제 곧 '공영방송법'이 KBS에 들이닥칠 것이다. 이 사장은 충성스런 몇몇 간부들만 있으면 2월 KBS에 몰아닥칠 이 파고를 가뿐히 넘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KBS에 대한 심드렁한 반응이 꽤 많아진 요즘, '알려진 것보다는 더 따뜻한 사람' 이병순 사장은 취임사를 다시 꺼내 읽어볼 일이다.


태그:#KBS, #이병순, #취임사, #양승동, #공영방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