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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가상 제작 발표회이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내 동료 중 한 명은 이런 말을 했다. 노무현은 나중에 위인전에 실릴 수도 있을 만한 인물이라고. 솔직히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그건 좀 오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가 위인전에 실리게 생겼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역사적 평가는 결론이 난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비주류로서 기득권에 저항하다 무참하게 꺾여버린 개혁가의 이미지로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되었다. 100년 정도 흐른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은 역사 교과서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운의 개혁가로 배우게 될 것이다.

그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세력들의 후손들은 조상들을 부끄러워 할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의 시련과 서거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 노무현은 현실에서는 처절하게 패배하고 역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현실에는 지고 역사에는 이긴 사람, 노무현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지난 2109년 5월 23일 사극 <노무현> 제작 발표회가 (주)참여 프로덕션 주최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많은 기자들이 뜨거운 취재 경쟁을 벌여, 이 드라마에 쏠린 국민 기대와 관심을 가늠케 하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 배우 김재성이 주인공 노무현 대통령역을 맡았는데, 김재성은 드라마 제작이 결정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님 역을 맡고자 고군분투하였다고 전해졌다. 다음은 기자회견 전문이다.

사회자 : 사극 <노무현> 제작 발표회에 와 주신 기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우리 드라마의 감독님께서 드라마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다.

감독 : 안녕하십니까. 사극 <노무현>의 감독을 맡은 이태호입니다. 드라마 <노무현>은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신 노무현 대통령님의 일대기를 다루는 사극입니다. 그분의 일생은 매우 파란만장했기 때문에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너무 자주 영화화되어 식상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저희는 신선한 시각과 참신한 내용 전개로 차별화 하고자 합니다.

사회자 : 그러면 이제부터 기자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한 분씩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자1 : <경향신문>의 김아름 기자입니다. 주연을 맡으신 김재성씨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김재성씨는 데뷔 이후 많은 작품에 출연하셨습니다만,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논란을 달고 다니셨습니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님은 대단한 미남이 아니셨기 때문에, 미남 배우보다는 연기력이 훌륭한 배우가 맡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비판 여론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재성 : 첫 질문부터 아주 날카로워 당황스럽습니다. (웃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제가 노무현 대통령 역할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평생 비주류로 사셨고, 주류 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으셨던 분입니다. 대통령으로 계실 때조차도 그분을 대통령 취급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는 모든 배우의 정통 코스인 배우학과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 연기에 대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혹평만 듣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제 팬클럽 재사모는 과거 노사모가 그랬듯 저를 열성적으로 지지해 주시고 저의 모든 드라마와 영화를 모니터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팬클럽의 이름 재사모도 제가 노무현 대통령님을 연상시킨다며 팬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만든 이름입니다. 이분들이 노사모 촬영분에 적극 출연해 주시겠다고 벌써 팬카페에서 준비를 하며 역사 자료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님의 모습이 제 모습과 겹치는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연기력 논란은 이번 드라마를 통해 얼마나 악의적인 혹평이었는지 확실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기자2 : <한국일보>의 성현민 기자입니다. 이명수 작가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이번 드라마를 선 굵은 남성 사극으로 만들겠다고 하셨는데요, 기존에 노무현 대통령님을 다룬 사극과 어떤 면에서 차별화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명수 : 남성 사극을 표방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님의 정치적 행보에 중점을 둔 정치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기존의 드라마는 주로 서민적인 대통령 노무현에 무게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임기 중 혹은 퇴임 후의 소박하고 서민적인 모습을 주로 조명하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님의 업적에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의 정치적 치적을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역사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여정부의 개혁과 좌절의 과정이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노무현 대통령님을 다룬 영상물 중 정치적 측면과 평가를 제대로 다룬 것이 없어서 아쉽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드라마를 재미와 감동을 주는 사극으로서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새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려주는 교육의 장으로도 만들고 싶습니다.

기자3 : <오마이뉴스>의 이윤진 기자입니다. 김재성씨께 묻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모든 한국 정치인들이 모범으로 삼고 그 후계자를 자처하는 분입니다. 그분에 대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어떻게 연기하실 생각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김재성 : 노무현 대통령님은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님>이라고 존칭을 붙여 불러드리는 유일한 분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 후 정치인들은 모두 입만 열만 대통령님의 정책을 계승한다, 대통령님의 후계자다, 대통령님께서 지향하신 바는 이런 것이었다며 노무현 대통령님 따라 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필수적으로 노무현 대통령님의 묘소를 찾아뵙고 헌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교과서와 위인전에서 그분의 개혁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긍정적으로 배웠지만, 당대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시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그 시절 영상자료나 신문 등을 읽어보니 기가 막히고, 그 시절을 살아간 조상들이 미워졌습니다.

어리석은 그들은 대통령님의 소탈하고 탈권위주의적 행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경박하고 대통령답지 못하다며 욕을 했다고 합니다. 수구 세력들의 농간과 거짓말에 속아 대통령님이 아마추어라느니, 대통령님이 경제를 망쳤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며 다음 선거 때는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님의 정책에 반대한 당에게 표를 주었다고 합니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노무현 대통령님이 생을 마감하시는 서거 장면입니다. 순수한 개혁 의지로 충만하셨던 분이 어리석은 국민들의 외면으로 좌절하고 결국에는 반대파에 의해 무참히 도덕성을 난도질 당하여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설득력 있는 내면 연기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기자4 : <프레시안>의 강영미 기자입니다. 저는 강의민씨께 묻겠습니다. 강의민씨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로 작품 속 인물 해석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극찬을 받고 계십니다. 강의민씨가 생각하는 김명준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연기해 나갈 계획이십니까?

강의민 : 저도 강사모라는 팬클럽을 가지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님과 참 닮은 점이 많은데, 아무래도 얼굴에서 김재성씨께 밀린 것 같습니다. (웃음) 김재성씨에게 주인공 자리를 빼앗긴 원한이 있기 때문에 김재성씨를 미워하는 연기를 아주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동 웃음)

저는 악역인 김명준 역을 맡았습니다. 이 사람은 가상의 인물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반대하고 개혁을 반대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고 명확하게 한 명을 특정할 수 없기에 반대 세력 전체를 김명준이라고 하는 인물로 만든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천수를 누리다 돌아가셨다면, 지금처럼 개혁을 하다 기득권 세력에 의해 제거된 불행한 개혁가의 이미지를 갖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 세력을 온몸을 던져 대변해 보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반대 세력들이 노무현 대통령님을 영웅으로 만들어 준 일등 공신입니다. 물론 본인들은 전혀 원하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하신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바르게 평가를 받게 되고 대한민국에도 존경할 만한 지도자를 갖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이들도 일정 정도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오늘 기자 회견은 진정 노무현 대통령님을 다룬 사극 제작 발표회 답습니다. 모든 분들이 노무현 대통령님 스타일대로 예리하면서도 솔직하게 질문하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럼 이상으로 오늘의 제작 발표회를 마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역사에서 개혁가는 항상 실패했고 비난을 받았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하다 서인반정으로 쫓겨났는데, 수레에 태워져 귀양가는 그에게 무식한 백성들을 돌을 던졌다고 한다. 그의 중립 외교가 전쟁을 막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다음 왕인 인조의 무모한 친명반청 정책이 전쟁을 불러올 줄도 모르는 채.

송의 개혁가 왕안석은 송을 살리기 위해 신법을 실시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인 구법당이 그의 신법을 반대했고, 결국 그는 실각했으며, 낙향해서 그가 추진했던 신법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다르다. 광해군은 살아서는 폐주였지만, 현재는 중립외교 정책을 펼친 현명한 군주로 평가 받는다. 사람들은 그가 반정으로 쫓겨난 것을 안타까워한다.

왕안석은 당대에는 모든 유학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와 대립한 사마광을 나라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자기의 이익만 수호한 수구세력으로 생각한다. 그가 자치통감이라는 명저를 남긴 훌륭한 학자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도, 역사에서 승리한 이가 현실에서는 패배한 일은 슬픈 일이다...



태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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