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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순 역
 뤼순 역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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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일 2009년 11월 3일]

14층 고층 객실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자주 깼다. 그런데다가 언저리는 온통 불야성이었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 밖을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났다. 다롄에는 내가 묵고 있는 숙소보다 더 높은 건물도 꽤 많았다.

지금 세계는 여러 나라들이 높이뛰기 선수들처럼 고층건물 짓기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다가 정전이나 단수가 된다면 여기가 바로 지옥이 아니겠는가. 몇 차례 자고 깨기를 반복한 뒤 6시 30분에 일어났다. 세면을 한 뒤 짐을 꾸리고는 아침 산책을 나갔다.

 다롄역 앞 고층빌딩
 다롄역 앞 고층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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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택시기사

내 체험에 따르면 도시, 특히 항구의 아침은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다롄도 예외가 아니었다. 몇 곳 밥집을 기웃거려도 문을 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역 앞 만두집에서 요기를 한 뒤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는데 택시기사가 왔다. 내 짐을 트렁크에 싣고서 뤼순으로 달렸다.

그는 박용근씨에게 전화로 나를 태워간다고 말하고는 나에게까지 바꿔주었다. 날씨가 좋다는 아침인사를 나눴다. 택시는 분명 전용으로 나를 태웠는데도 나에게 묻지도 않고 일방으로 다른 손님을 합승시켰다. 다롄에서 뤼순으로 가는 외곽 택시정류장에서 막 택시에 타려고 하는 손님 앞에다가 차를 세워 가로치기해서 태우고는 잽싸게 달렸다.

뒤에 있던 택시기사가 문을 열고 나와 사라지는 우리 택시를 향해 팔뚝을 치켜들고 항의를 하는 데도 기사도 손님도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아마 합승을 하면 요금이 싼 모양이었다. 하기는 지난날 우리나라도 이런 풍경이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는 100킬로미터 이상 고속으로 달리는데 신호를 거의 지키지 않았다. 뤼순까지 가면서 세어보았더니 그날 아침에만 세 곳에서 차가 부서져 있었다.

뤼순 일본관동법원

 옛 여순일본관동법원
 옛 여순일본관동법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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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0. 박용근씨의 안내로 현재 뤼순구 인민의원으로 쓰이고 있는 옛 일본관동법원을 찾아갔다. 늘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던 역사 현장을 실제 보는 감동이란. 박용근씨는 그곳 관리인들과 친분이 매우 두터운 듯, 내 짐까지 사무실에 보관 시킨 뒤 뤼순을 떠날 때 찾아가라고 했다.

출국 전에 들은 바는 뤼순에서 법원과 감옥소를 관람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을 뿐더러 뒷돈이 든다고 하였는데 2005년부터는 중국 당국이 방침을 바꿔 오히려 관람객을 유치한다고 하여 나의 염려는 한낱 기우였다.

 관동법원 재판정
 관동법원 재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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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법원청사로 들어갔다. 어귀에는 여러 글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 '屠刀下的天平(도도하적천평)'이란 말을 안내인 박용근씨는 "짐승을 잡는 칼날 아래 저울질을 하다"라고 풀이를 했다. 곧 "칼로 법을 마음대로 유린했다"는 말이었다.

 "칼날 아래 저울질하다"라는 말
 "칼날 아래 저울질하다"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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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의 재판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안중근 재판 당시의 마나베(眞鍋十藏) 지방법원 재판장, 히라이시(平石氏人) 고등법원 재판장,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 등 일본 재판 관계자들의 사진과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러일강화 회의 장면 등이 걸려 있었다.

포츠머스 조약 결과 다롄 일대도 다시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의미 있는 사진이기에 거기에 게시한 듯하다. 하기는 우리나라도 그 회담 결과 사실상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거나 다름이 없었다.

고문 기구들

마침내 지방법원 법정에 들어갔다. 1910년 그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맨 앞 열에는 가운데는 '재판장' 그리고 좌우에는 '판관' 아래 열에는 '피고' 다음 열에는 '통역관' '서기' 다음 열이 '원고'  '공소인'  '변호사' 자리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마침 법정에는 아무도 없기에 나는 피고석에 앉았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는 안중근 사건에 대한 제6회 언도 공판이 있었다. 이날 마나베(眞鍋十藏) 재판장은 판결을 언도했다.

"피고인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우덕순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인 유동하, 조도선을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이날의 안 의사 모습을 대한매일신보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피고석에 앉은 안중근은 조금도 동요치 않고 빙그레 웃으며 "이보다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재판장에게 더 극형을 요구하였다.

 통모(용수), 죄수의 얼굴을 가리는 기구
 통모(용수), 죄수의 얼굴을 가리는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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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벽에는 관람객을 위해 안중근 의사의 여러 사진과 안 의사가 폭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 등을 한문과 우리말로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다. 옆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 등이 감옥에서 재판정으로 오갈 때 탄 마차 수레와 '筒帽(통모, 용수)'가 전시되었고, 이어 법원장실, 검찰관장실 등이 있었다.

 포화로
 포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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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방부터는 각종 고문 기구들이 전시돼 있는데 '碎身具(쇄신구, 시체의 흔적을 없앨 때 쓰는 기구로 맷돌처럼 만들었음)', '抱火爐(포화로, 손과 발을 도르래에 달아 쇠사슬에 묶어 난로에 몸을 붙여서 타 죽게 함)', '剝皮具(삭피구, 사람의 살갗을 벗기는 고문기구)', '匣脚(갑각, 인체를 고정시키고 발가락에 바늘을 박는 고문기구)', '弔大掛(조대괘, 동시에 두 사람을 매다는 고문기구로 허리나 뼈가 탈골케 하거나 골절되게 하는 고문기구)' 따위의  숱한 고문기구들을 진열해 놓았다.

 쇄신구
 쇄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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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대괘
 조대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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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이번 답사를 계획하면서, 그리고 간밤까지만 해도 이제 나라를 빼앗긴 지 100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먼저 일본을 용서하고 새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자세로 보고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이들 고문 기구를 보니까 '사람의 탈을 쓴 이들이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일본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싹싹 빌지 않는 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한 시간 남짓 숨을 죽이며 법원 안팎을 둘러본 뒤 그곳 책임 관리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는 택시를 타고 뤼순감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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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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