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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인'이라는 단어를 들어 봤는가? 내가 온라인게임의 중독자, 포커 도박의 폐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랬다, 처음 맛보는 온라인 카드게임의 흥분에 그날 이후 아빠와 남편의 역할을 과감히 반납하고 말았다. 포커게임을 하지 못하면 불안해서, 탈수기 안의 빨래처럼 손이 떨렸던 후회와 한탄의 폐인시절을 공개한다.

그러니까 벌써 12년 전이다. 회사에서 경리담당 책임자로 근무할 때였다. 같은 업무를 2년 정도 하니 조금 무료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료직원이 사무실 컴퓨터를 이용해 온라인 카드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삥', '콜', '하프'(전체 판돈의 절반), '다이' 등을 외치는 성우(?)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히든을 쪼는 스릴과 극적인 매력...바로 날 위한 게임?

'어, 포커? 이건 분명히 도박인데…'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인터넷 게임이라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명절에 재미삼아 치는 점당 100원짜리 고스톱이나 해 봤을까. 원래부터 카드 게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취미도 없었던 나였다. 사실 방법을 모르니 재미있는 줄도 모르겠고, 정체불명의 왕들이 등장하는 이상한 게임으로 치부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동료는 한 달 이상을 사무실에서 틈만 나면 "받고 더!"를 외쳐댔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들고 말았다. 관전자 수준에서 한 단계 더 접근하니, 회원가입은 필수였고 내 아이디가 생기니 카드란 것이 참 묘한 매력이 있었다.

고스톱이 기술보다는 운에 의존하는데 비해, 포커 작전에 따라 낮은 패를 가진 사람도 이길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히든카드를 쪼는 짜릿한 스릴(남에게 보여 주지 않은 카드를 쫓는 것)과 승부를 뒤집는 포커의 극적 매력이 나를 점점 매료시켰다.

도박을 소재로 한 드라마 '올인'
 도박을 소재로 한 드라마 '올인'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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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의 '족보'가 무엇인지, 족보가 완성됐다는 의미의 '메이드'란 용어도 전혀 모르는 내가 어느새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0-J-Q-K-A'로 이어지는 이른바 마운틴 족보를 보면 언제부터인가 국적불명의 언어인 '십자쿵카아'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 같은 카드 3장과 2장을 각각 들고 있는 풀 하우스(Full House)족보를 '집', 같은 카드 3장을 들고 있는 트리플 족보를 '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미 용어사용에 있어서는 전문도박인도 울고 갈 기교와 실력을 갖추게 됐다.

특히 족보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게 당연하지만 한 번씩 바닥에 깔린 액면으로도 블러핑(일명 '뻥카드'-자신의 패가 상대방보다 좋지 않을 때, 상대를 기권하게 할 목적으로 거짓으로 강한 베팅이나 레이스를 하는 것)해서 쓸어가는 기교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역시 포커는 무료한 나에게 딱 맞는 맞춤형 게임이었다. 처음 맛보는 흥분되는 그 느낌, 이때부터 회사업무는 뒷전이었다.

회사의 매출집계나 분기계획서를 작성하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고, 당연히 보고서는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점심도 컴퓨터 앞에서 시켜 먹었다. 일 이외의 시간은 무조건 게임에 퍼붓다 보니, 업무에서 오는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도 사라졌다. 처음으로 세상은 참 살만하고 즐겁다고 느꼈으니까….

올인되면 수혈 받으면 되고... 그것, 참 쉽네!

이후 사무실에서 틈만 나면 "받고 더, 콜!"을 외치는 나에게 어느 날 후배가 찾아왔다. 갑작스레 찾아온 후배는 게임화면이 켜진 내 모니터를 바라보며 오히려 환하게 웃는다.

"어? 형님도 포커하시네요? 에이, 그런데 레벨이 별로 안 되시네?"
"아, 심심해서 재미로 그냥 하고 있어. 레벨? 평민, 고수, 영웅 같은 레벨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아직 그런 수준까지는…."
"형님, 여기서 하루 종일 이러고 있어봤자. 푼돈밖에 못 따요. 제가 알려준 방법대로 하면 한 시간이면 사이버머니 1조 원에 최고 레벨(신)까지 갈 수 있어요.
"헉, 1조씩이나?"

기본으로 제공하는 공짜 사이버머니 몇 십만 원으로도 행복을 누리던 나에게 1조 원의 꿈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아, 과연 그랬다. 레벨의 제한이 없이 누구나 입장이 가능한 자유게임방이 있었다. 방제목은 '수혈방'인데 방에 들어가 순서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큰물에서 크게 한방 잡았을 법한 수백조 원의 왕신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리고는 순서대로 수혈(최고베팅을 한 후 일부러 게임을 포기하여 사이버머니를 늘려 주는 일)이 시작됐다.

4~5번 정도 순서를 기다리다 채팅창에 '감사감사'라는 글자만 몇 번 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30여분만 기다리면 몇 십만 원에 불과하던 사이버머니는 금세 1조 원을 돌파했다. 이렇게 획득한 사이버머니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만 참여하는 챔피언 방에서 '한방'을 노렸고, 올인이 되면 또다시 수혈방에 가서 굽실거리는 일과가 되풀이 됐다. 

처음엔 회사에서만 게임을 즐겼다. 정시에 퇴근하여 아내와 쇼핑을 즐기고 아이와 놀아줘야 하고 다음날 출근 걱정을 해야 하니 집에서 게임을 할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평범한 아빠로 다정한 남편으로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회사에서 게임만 하다 돌아오는 두 얼굴의 이중생활 사나이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행복은 딱 여기까지였다.

인터넷 카드게임에 중독되어 있던 당시, 보유한 사이버머니가 많아 아이디가 해킹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인터넷 카드게임에 중독되어 있던 당시, 보유한 사이버머니가 많아 아이디가 해킹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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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PC만이 더 좋은 실력을 보장한다?'

집에서 한두 번씩 재미삼아 게임을 해봤다. 그런데 아내는 강하게 제지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화려한 그래픽에 많은 캐릭터가 그려지는 게임인 만큼, 이를 원활하게 구동시킬 수 있는 컴퓨터가 필요했다. 회사와는 확연하게 떨어지는 집 컴퓨터 사양을 한탄하다 무작정 성능 좋은 고가의 컴퓨터부터 구입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주야장천 불철주야로 게임을 즐기다 보니 이젠 '길드'라는 곳도 알게 되었다.

지역연고의 길드 두세 곳에 가입했다. 그랬더니 퇴근하면 길드원들과 만나 PC방에서 게임을 함께 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법 머니상에게 머니를 사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머니상에게 현금을 입금하면 특정 게임방에 들어가 일정금액의 사이버머니를 일부러 잃어주는 방식으로 게임 머니를 사고판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퇴근 후 길드원들과 신나게 게임을 즐기고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하는 본격적인 폐인생활이 시작됐다. 집에 돌아오면 옷을 갈아입고 씻는 시간이 아까웠다. 자리에 앉으면 넥타이도 풀지 않고 그대로 앉아 동이 틀 때까지 그렇게 마우스를 딸각거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모든 생활은 현실이 아닌 게임세계와 함께 하고 있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서 건강은 나빠졌고, 시력저하까지 왔다.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다. 밥도 제대로 안 먹고 게임의 노예가 돼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참 한심스럽고 앞날이 두려웠다.

아, 그런데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우연찮게 대박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박의 감동에 눈이 뜨이고 가슴까지 뻥 뚫리니 또 다시 폐인생활이 연장되고 말았다. 그날도 잠이 부족한 비몽사몽의 상태였다. 푼돈으로 시작한 게임이 연속하여 기이한 승리를 이끌더니 몇 십조 원까지 오른 것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내가 아니지, 이젠 큰물에서 놀자!'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이버 부자들만 참여한다는 슈퍼챔피언방에 들어가니 또 다시 최고 족보인 '포카드'와 '로티플'이 터져 주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수백조 원 대박... 사이버머니 팔아 환전까지

몇 시간 사이에 수백조 원의 졸부가 되고 말았다. 곁에 있던 아내는 정말 이게 사실인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행운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대박의 추억'을 재현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밤을 새웠지만 여지없이 무너졌다. 올인에 올인을 거듭하다가 수혈방에 들어가 아내를 이용한 미인계까지 했다. 아내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여 만든 아이디로 수혈방에 들어가 굽실대자 왕신이 채팅창에서 대뜸 묻는다.

"혹시, 진짜 여자 맞으세요?"

돈맛을 본 내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정말 여자라는 것을 증명한다며 아내에게 게이머인 척해달라고 강요했다. 사이버머니 앵벌이까지 서슴지 않은 것이다.

2년간 주야장천 불철주야 카드게임을 한 결과 얻은 결과물은 오른손에 박힌 굳은살이었다.
 2년간 주야장천 불철주야 카드게임을 한 결과 얻은 결과물은 오른손에 박힌 굳은살이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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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당구에 빠진 사람은 자려고 누워도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고, 바둑에 몰입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서 있거나 누워있거나 온통 눈앞에 포커 판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자려고 누워도 아른아른, 밥 먹을 때도 아른아른, 세면대에 담긴 물을 봐도 아른아른, 자꾸 눈에서 아른거리고 창가로 고개를 돌리면 딜러가 날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아, 내가 어쩌다 폐인이 되었나 싶어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봤다. 한두 번은 그럴 수도 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았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중독을 넘은 중환자 수준이었다. 역시 후회도 잠깐, 다시 천장에서는 어느새 패가 돌아간다.

회사의 매출마감이 코앞인데도 게임에 몰두하느라 월말을 넘긴 적이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2년을 지내다보니 수면부족, 건강악화는 물론 인간관계도 서서히 단절되기 시작했다. '벽을 보고 쳐도 잃는 게 도박'이라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는 없었다. 

2년간의 폐인생활을 정리하자니 이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PC에 앉으면 로그인은 계속됐고 플레이는 이어졌다. 이윽고 가족들의 시선이 점점 차가워졌다. 쫓기는 기분이었다. 평생 이렇게 폐인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교회 전도사님께 고백, 노숙자와도 대화해보니...

고심 끝에 떨리는 마음을 무릅쓰고 수십 번이나 전화상담센터 전화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한마디도 못해보고 전화를 끊었다. 대신 인터넷으로 상담을 하는 도박중독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저 도박 끊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라는 물음에 상담사의 답장 메일은 '도박은 재미가 아니라 질환, 혼자 힘으로는 절대 못 끊어… 끝은 패가망신, 꼭 명심하라'는 천편일률적인 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교회의 전도사님에게도 고백했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는 아니겠지만 누구에겐가 솔직히 말을 했다는 사실에 힘이 생겼다. 역시, 전화 한번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니 이젠 끊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 소문이 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따랐다. 일부러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불리는 정신요양원 입구에도 가보고, 대합실 노숙자 아저씨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봤다. 그랬더니 거울 속에서 피폐해진 내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쌓아둔 사이버머니를 불특정 다수에게 다 뿌리고, 5~6개에 이르는 아이디도 정지시켰다. 인터넷도박을 끊기 위해 인터넷이 접속되지 않는 공간에 격리될 필요가 있었지만, 업무의 특성상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인터넷 중독이 전화위복이 됐다.

포토샵이나 디자인분야에 일가견이 있던 나는 이때부터 교회홈페이지 웹마스터를 자청했고 홍보업무를 도맡았다. 또, 회원이 1천여 명에 이르는 선천성 환우회 인터넷카페의 운영을 시작했다. 업무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예 하루 종일 교회홈페이지와 카페만 드나들며 관리에 열중했다.

명심하시라. '내가 지금 합법적인 게임을 하는 것이지,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헤어날 수 없다. 도박이라 생각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힘들고, 컴퓨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어 더 유혹을 뿌리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10여 년 전의 폐인시절,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붙들고 창문 너머로 아침이 밝아 오는 걸 지켜보던 꿈만큼이나 무서운 악몽이 또 있을까? 도끼로 손모가지를 자르면 발목으로도 계속 한다는 도박. 호환·마마, 마약보다 더 무섭다는 인터넷도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못할 것은 없다.

결국 내가 폐인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을까? 해방된 게 아니라 여전히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재미삼아(?) 접속하는데, 이 유혹의 싸움은 어쩌면 평생 갈지도 모르겠다.


태그:#중독, #게임중독, #도박, #카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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