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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정전
▲ 인정전 창덕궁 정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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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궁이 경복궁이라면 창덕궁은 이궁(離宮)이다. 허나, 이것은 공식적인 문서나 궁궐에 드나드는 대소신료들의 이야기 일 뿐, 편한 것을 좋아하는 백성들은 경복궁을 서궐, 창덕궁을 동궐이라 부른다. 도성의 동과 서에 자리 잡고 있다는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궐(闕)과 백성들의 삶 사이에는 벽과 괴리가 있다는 냉소가 깔려있다.

골육상쟁으로 집권한 태종은 격무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새 궁궐터를 찾으라고 서운관에 지시했다. 당대의 도참 유한우와 윤신달이 백방으로 뛰어 찾아낸 곳이 매봉 아래 향교동이다. 수려한 경관에 매료된 태종은 음기가 세어 부적절하다는 이양달의 반대를 물리치고 공사를 명했다. 1년 만에 인정전, 소덕전, 선정전을 짓고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을 완공함으로서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창덕궁이다.

신궁(新宮)에 드나들며 휴식을 취하던 태종이 더 깊숙한 곳에 아담한 궁궐을 한 채 더 지으라 명했다. 세자 양녕을 폐하고 충녕대군에게 양위하려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던 태종으로서는 시급한 문제였다. 이미 지어진 전각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아담한 건물이 완공되었다. 새 궁전에 입주하는 부왕의 만수무강을 빌며 변계량에게 의뢰하여 세종이 지어 올린 이름이 수강궁(壽康宮)이다.

창덕궁 정문
▲ 돈화문 창덕궁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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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지어진 집, 상왕전이 되지 않을까...

수강궁에 날이 밝았다. 궁노들의 발걸음이 부산하고 노산군을 호송할 군사 50여 명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의 지휘를 받으며 대기했다. 예전 같으면 호위청 군사들의 호위였지만 지금은 금부 산하 호송 군사들이다. 격이 달라진 것이다. 판내시부사 홍득경이 월대에 부복했다.

"마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호칭이 사라졌다. 어제까지 상왕 전하로 모셨던 분을 하루아침에 노산군이라 부르기에는 저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어정쩡하게 넘어갔다.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산군이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오늘은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내일은 볼 수 없다. 마음이 싸하다. 천정을 쳐다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천정에 할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쉽지 않은 얼굴이었다. 직접 본 기억은 없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태종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상왕이 좋아서 이곳에 들어오셨지만 저는 숙부가 하라고 해서 억지로 상왕이 되었습니다. 하라는 숙부가 나쁠까요? 싫다고 생각하는 제가 나쁠까요?"

태종은 무슨 말인가 할 듯 하더니만 빙그레 웃음만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수강궁에서 상왕을 즐기셨지만 저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아름답게 지어진 이 집이 대대로 상왕전이 되지 않을까 저어됩니다."

뼈있는 한마디에 태종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밝은 모습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집에서 잘 있다 갑니다. 언제 다시 이 집에 들어올런지는 알 수 없지만 꼭 다시 오고 싶습니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또 다른 할아버지 얼굴이 어른거렸다. 언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세종 할아버지였다.

"할바마마! 수양 숙부가 무서워요."

뛰어가 품에 안기고 싶다. 허나, 할아버지는 천정에 있다. 내려와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았지만 내려오지 않고 인자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저를 살려주세요."

눈물이 핑 돌았다. 내려와서 손이라도 잡아주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때였다. 호송 군관 김자행의 굵은 목소리가 수강궁을 울렸다.

"떠나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경칭은 없다. 앞뒤 다 잘라버리고 사뭇 명령조다. 정통 무인으로 단련되어서일까? 목소리가 건조하다. 노산군을 영월까지 호송한 김자행은 훗날 그 공이 인정되어 첨지중추원사에 승차하고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성주목사에 올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김자행은 애꿎은 백성을 고문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에 잡혀와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멀리 보이는 홍화문은 성종 때 건립되었다
▲ 선인문 멀리 보이는 홍화문은 성종 때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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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부시다. 일산을 받쳐준 사람도 없다.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린 노산군이 가마에 올랐다. 죄를 받고 귀양 떠나는 죄인에게 가마는 허용되지 않는다. 허나, 노산군은 가마를 탔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어제 밤늦게까지 격론이 벌어졌다. '죄인이니까 함거에 실어 보내야 한다'는 공조판서 주도의 강경파와 '말 태워 보내자'는 우참찬을 비롯한 중도파, '백성들의 눈과 귀가 있으니 가마 태워 보내자'는 이조판서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가 각을 세웠다. 첨예한 대립 중 온건파에 힘을 실어준 사람이 도승지 한명회였다.

동궐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동쪽에 정문 못지않은 큰 문을 지어야 한다는 말은 있지만 아직 착공조차 하지 못했다. 죄인의 정문 통과는 금기 사항이다. 노산군을 태운 가마가 언덕을 내려가 선인문을 통과했다. 시전과 배오개 시장에서 궁궐에 납품하는 곡식 수레와 채소가 드나드는 문이다. 훗날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상여가 빠져나간 문이기도 하다.

18세기 겸재 정선이 바라본 흥인문 주변. 성 밖에 작은 마을이 있고 동묘가 있다. 그 사잇길 오른쪽으로 가면 영도교가 나온다
▲ 동문조도 18세기 겸재 정선이 바라본 흥인문 주변. 성 밖에 작은 마을이 있고 동묘가 있다. 그 사잇길 오른쪽으로 가면 영도교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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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 여며 쥔 여염집 아낙...알고보니 '중전'

배오개 시장 어름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꺾은 가마가 흥인문을 향하여 빠르게 움직였다. 그 뒤를 대여섯 필의 말이 뒤따르고 창을 꼬나 쥔 50여 명의 군사가 종종걸음 쳤다. 예사롭지 않은 행렬을 발견한 연도의 백성들은 그것이 숙부에 의해 영월로 귀양 가는 노산군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때였다. 정업원에 있던 송씨에게 노산군의 귀양행렬이 흥인문을 동과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화들짝 놀란 송씨가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한참 뛰다보니 맨발이었다. 정신없이 뛰어가느라 버선이 벗겨지는 줄도 몰랐다.

흥인문을 통과한 가마행렬이 역일계(驛一契)에서 주막을 끼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삼남에서 올라온 나그네들이 도성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 국밥에 탁배기 한 잔을 걸치던 주막이다.

지체 높은 사람은 소나기가 퍼부어도 뛰어서는 안 된다. 양반의 품위유지법이다. 서인으로 강등되었지만 한때는 이 나라의 국모였고 지금도 시녀들로부터 중전으로 불리는 송씨가 숨을 헐떡이며 뛴다는 것은 남세스럽다. 허나,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행렬을 놓치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표지석
▲ 영도교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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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시장에 이를 무렵 호송 군사 후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치마를 여며 쥔 송씨가 군사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백성들의 통행이 많아 통행을 통제하기 하여 다리 들머리에 가마가 멈춰있었다. 광나루와 송파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입성하는 중요 다리라 하여 왕심평교라 불리기도 하고 영미골에 있다하여 영미다라라 불리기도 한 다리는 한양 입성의 중요 길목이었다.

"바람을 쏘이고 싶소. 가마에서 내려도 되겠소?"

비좁은 가마에서 답답함을 느낀 노산군이 호송대장 김자행에게 나직이 물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노산군이 가마에서 내렸다. 군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행인을 통제하고 수레를 건너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상쾌한 바람이 코 속을 드나든다.

"정업원이 어디 있소이까?"

중전이 정업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흥인문 밖 인창방 이라는데 어디쯤일까 궁금했다. 떠나기 전 중전이 있는 그곳이라도 한 번 바라보고 싶었다.

"저기 석산 끝자락에 비구니 승방이 있는데 그곳에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순간,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바람결에 휘날린 머리칼이 단정하지 못했고 치마를 여며 쥔 모습이 여염집 아낙 같기도 했지만 분명 중전 송씨였다.

노산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송씨 역시 심장이 멎는 듯했다. '전하!'라고 부르며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몸은 굳어버렸다. 팔딱거리며 뛰던 가슴이 잦아들며 숨이 멎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다.

"오르소서."

판내시부사 홍득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에 오르려던 노산군이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분명 여인이 그대로 서있었다. 망부석이라면 눈물도 없으련만 그 여인의 두 눈에서는 빗물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헤어진 다리를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 불렀다.

살곶이다리
▲ 전곶교 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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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를 통과한 행렬이 살곶이 다리에 이르렀다. 세종이 도성을 드나드는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특별히 명하여 공사를 시작한 다리다. 허나, 258척(78m)에 이르는 강폭이 너무 길어 세우면 무너지고 세우면 무너졌다. 토목공법이 홍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앙상하게 교기(橋基)만 남아 있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토교(土橋)를 건넜다.

드넓은 벌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군사 훈련용으로 쓰던 강무장이다. 가장자리는 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왕실 사냥터로 쓰이던 구의동 능선과 아차산이다. 할아버지 세종의 손을 잡고 사냥 구경을 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세종대왕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며 단종이 마지막 예를 받았던 곳이다
▲ 화양정터 세종대왕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며 단종이 마지막 예를 받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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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정에 도착했다. 세종이 즐겨 이용하던 별장이다. 수양이 특별히 환관을 파견했다.

"상왕 전하를 정중히 모시라는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비록 노산군으로 강등되었지만 안노(安璐)가 상왕으로서의 마지막 예를 갖추었다.

"아니 와도 되련만 무거운 발걸음을 시키셨습니다."

환송연이 시작되었다. 군사들 밥을 먹이고 간단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허나, 웃음 없는 잔치였다. 수양이야 면피하기 위한 환송연이었지만 귀양 떠나는 노산군 즐거울 리 없다.

"성삼문의 역모를 알고 계셨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뭘 알고 싶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불쾌했다.

"알았던들 어떠하리 몰랐던들 어떠하리
가신 남 살아올 수 없고 산 님 떠나는데
떠나간 기러기는 언제 다시 돌아오려나"

시 한 수를 남긴 노산군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호송대장 김자행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광나루에 도착했다.

겸재 정선이 강 중심에서 바라본 광나루. 뒤에 보이는 산이 삼각산이다.
▲ 광진 겸재 정선이 강 중심에서 바라본 광나루. 뒤에 보이는 산이 삼각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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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는 광진, 광나루, 송파나루, 삼전도, 삼밭나루, 한강나루, 사평도, 서빙고나루, 동작진, 동재기나루, 노들나루, 삼개나루, 밤섬나루, 서강나루, 양화도, 버들고지나루가 있다. 위치도 다르고 쓰임새도 각각 다른 크고 작은 나루 중에서 도(渡)에는 도승관이 있고 진(鎭)에는 수군이 주둔하고 있다. 진(津)과 진(鎭)을 겸하고 있는 광나루는 군사요충이다.

나루에는 세척의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노산군과 판내시부사 홍득경, 시종 나인들이 탈 맹선(猛船)을 개조한 군선. 호송 총책임자 어득해와 군관 김자행, 그리고 호송 군사들이 탈 나룻배. 군마와 수레 그리고 식량을 싣고 갈 거룻배. 이렇게 세 척의 배가 잔잔한 강물위에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일행이 승선하자 수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닻을 올렸다. 삿대를 강안에 들이밀자 육중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력을 받은 배가 서서히 강심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하늬바람이 불어왔다. 돛 때를 기다리던 군장의 령이 떨어졌다.

"돛을 올려라."

수군들의 손과 발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한 때는 용상에 있었던 높으신 분을 태워 황송해서일까? 황포돛단배가 부드럽게 강심으로 미끄러졌다. 노산군이 고개를 들었다. 아차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성에서 보면 해가 뜨는 산이다.

"언제 다시 보려나?"

고구려가 쌓은 석성이다
▲ 아차산성 고구려가 쌓은 석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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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심은 한양이다. 한양을 차지한 자가 한반도의 주인이라는 설이 있다. 한성백제가 한양을 차지하고 있을 때 장수왕이 쳐들어 왔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이다. 아차산에서 일합을 겨룬 개로왕은 죽음을 당했고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했다. 그 이후 백제는 한양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순간, 보따리 싸서 남녘으로 내려가던 백제의 모습과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숙였다. 물빛이 눈부시게 푸르다. 한강물이 이렇게 푸르다는 것은 예전엔 몰랐다. 강물이 뱃전에 부셔지며 포말을 일으켰다. 기포가 만들어지고 터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에 하얀 얼굴이 만들어졌다 부셔지고 부셔졌다 만들어졌다.

자세히 바라보았다, 여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더 가까이 접근했다. 보이던 포말이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중전 송씨가 하얗게 웃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독자여러분의 사랑을 받아왔던 역사소설 <수양대군>이 차회(70회) 끝으로 연재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동안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묶어 도서출판 청년정신에서 책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성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독자여러분을 위하여 작은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차회를 기다려 주세요.



태그:#단종, #광나루, #수양대군, #영도교,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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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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