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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 겨울방학에 저는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예전에도 종종 생리불순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꽤 생리를 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졌던 것입니다. 소녀에게 '산부인과'란 이름이 얼마나 민망하게 느껴지던지 어머니는 끝끝내 안 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저를 소처럼 끌고 동네 산부인과로 데려갔지요.

툭 건드리면 폭발할 만큼 소변을 참은 배를 부여잡고 초음파 검사를 했습니다. 의사 분께서 검사 결과를 보시더니, 큰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난소에 꽤 큰 혹이 보인다고 말입니다. 화장실을 부리나케 다녀온 저는 조금 놀랐지요. 

택시를 타고 종합병원으로 향하면서 저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가녀린 여자인 듯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초음파 검사를 다시 받고,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난소에 9-10 센티미터 가량의 혹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이런 건 나이 든 아주머니들에게나 생기는 줄 알았는데, 생각 외였습니다. 도깨비 혹처럼 쉽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섭지라도 않을텐데요. 절제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혹 크기가 꽤 커서 자칫 잘못하다 혹이 터지면 맹장이 터진 것같은 통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나요.

정작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수술이 주는 부담감보다는, 수술 전후로 밥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넉넉한 덩치가 잘 말해주듯, 대단한 먹순이입니다. 하루 세 끼는 당연한 거고, 중간중간 간식이 없으면 입의 무료함에 치를 떠는 먹순이였지요. 나름대로 살을 뺀답시고 여섯 시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만, 여섯 시까지 죽을 힘을 다해 꾸역꾸역 먹어두기도 하는. 그런 제게 '금식'이란 말은 일종의 무거운 병을 선고하는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습니다.

눈앞에 '산해진미'... 괴로워 죽을 지경

수술 당일, 이동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마치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습니다. 눈을 깜빡이며 옆을 조심조심 살피는데 아뿔싸. 저를 이동시키던 의사 분들이 모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청년들 아니겠습니까. 그 때 마침 저는 무슨 영문에선지 수술의 편의를 위해 얼굴을 모조리 드러내야 했고, 그러기 위해 머리를 꼬마애들처럼 고무줄로 몽땅 묶어놓은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코미디였습니다. 훈훈한 청년들이 내 넙대대한 얼굴 면적에 웃음을 참고 있진 않을까, 아니 분명 그러고 있을 거야, 하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아예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수술실에 도착했고, "한숨 자자" 는 평온한 말을 들으며 잠들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제 입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먹을 것'을 들고. 곧바로 먹지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맛집 방송을 시청하듯 제 것이었을 음식들이 부모님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영양제로만 버텨야 했는데,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은 정시에 꼬박꼬박 갖다주는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병원 밥이 싱겁고 그리도 맛없다지만, 제게는 그 보잘 것 없는 식단이 산해진미에 버금가게 보였습니다.

"언제 밥 먹을 수 있어요?"
"개스 나오기 전까진 안됩니다."

방귀가 나오기까진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는 간호사의 단호한 말투. '개스'라는 말이 괜히 얄밉고 거슬렸습니다. 방구(사투리. 사투리 아니더라도 이렇게들 쓰지 않습니까)면 방구지. 이게 말이야 방구야. 배고픔이 불러일으킨 짜증은 간호사가 하는 말 족족 트집을 잡게 만들었지요. 금'식'현상은 이렇게 하루하루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많은 음식들이 선물로 왔고, 그 음식들이 다른 이의 입에 들어갈 때마다 일부러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는데 아랫배에 묵직한 느낌이 포착됐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야릇한 확신은 점점 명확하게 변해갔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수술 후유증으로 아린 배를 움켜쥐고, 그러나 어떤 기분 좋은 예감을 안고 화장실로 즐겁게 향했습니다. 한 칸으로 들어갔고, 문 잠그는 소리가 상쾌하게 들렸습니다. 링거 줄이 꼬이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였습니다. 변기 뚜껑을 열고, 산뜻하게 앉는 순간...

방귀 소리, 아기 천사들이 노래 불러줬을 텐데...


뿍!


아기 천사들이 있다면 제 머리 위를 즐겁게 돌며 노래를 불러 주었을텐데. 짧고 높고 시원한 그 소리. 안심할 순 없었습니다. 음식에 대한 갈망이 제 의식을 혼란시켜 환청을 듣게 한 건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아랫배에 집중하고, 한 번 더,

뿌뿍!
뿍!

미션은 임파서블 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공했습니다. 그 날의 쾌감은 지금까지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지요. 이제는 밥을 먹을 수 있다! 천국의 문은 열렸다! 싱글벙글 웃으며 화장실을 나섰습니다. 세상이 제 것이었습니다. 병원의 층층마다 복도 가운데에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잖습니까. 그곳을 지나가다가 흥분에 휩싸인 웃는 얼굴로 이를 씨익 드러내며 간호사들에게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저 방구 뀌었어요!"

몇몇 간호사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제가 우습든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들은 입을 모아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저는 개선장군의 얼굴을 하고 병실로 돌아갔습니다. 엄마, 나 방구 뀌었어! 병실에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히 부끄러운 기억이네요. 환자들도 축하해주었습니다. 기분이 붕붕 들떴습니다. 저녁에 무슨 밥이 나올까, 분명 회진에서 방귀를 뀌었다고 똑똑히 말했으니 밥이 나올텐데, 테이블을 두드리며 저녁 시간만을 기다렸습니다. 세 시를 지나, 네 시가 되고, 다섯 시가 막 지났을 무렵!

죽이 나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밥을 받아든 저는, 전날 저녁으로 죽이 나온 것에 대해 분노하며 열심히 음식을 씹고 또 씹었습니다. 입자가 살아있는 음식을 이빨로 잘개 쪼개고 부수는 일은 정말이지 즐거운 일입니다. 열심히 나오는 병원 밥을 먹었고, 빠른 회복을 위해 심심하면 병동을 천천히 걸어다녔습니다. 일주일은 있어야 차차 회복될 몸이 닷새만에 제 컨디션을 찾았고, 퇴원은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생리 주기가 약간 불규칙적이어서 호르몬제를 처방받아야 했지만, 적어도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 그 정도면 만족했습니다.

수술 때문에 병원에 있었던 날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피식피식 납니다.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요. 고작 밥을 못 먹어서 그렇게 안달이었다니 나도 어지간한 밥순이구나 싶습니다. 혹자는 살기 위해 먹는다지만, 저는 먹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극심한 공복일 때, 배고픔에 허덕여 새벽녘 병원 복도를 서성이던 저를 종종 떠올려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수술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혹, #밥, #배고파요, #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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