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학교를 급히 조퇴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문턱. 그곳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침울하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위생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떨리는 한 걸음을 뗐다. 곧바로 엄마가 보였다. 순간 나는 낯선 모습에 당황했다.

엄마는 민머리를 한 채 누워서 허공만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민머리엔 철심이 바늘로 꿰맨 실밥처럼 박혀있었다. 의사 말로는 뇌수술 때문에 머리를 밀었고 철심은 두개골을 열고 난 후 봉합하기 위해 박아 놓은 거란다. 난 무섭고 낯선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나를 엄마가 바라봤다. "언니" 엄마가 내게 건넨 첫 마디였다. 순간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울컥.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엄마, 떼쟁이가 되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당시 의사는 엄마의 상태를 보며 "뇌수술로 인해 정신연령이 유아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웃픈(웃기면서 슬픈) 추억. 내 생애 가장 아름답게 남은 추억이 이렇게 시작됐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르면 성장기 아동은 원초아(ID)와 자아(EGO)가 순차적으로 발달한다고 한다. 원초아는 본능적 욕구를 말한다. 구강기에는 본능만이 존재하며 이것을 통제하는 자아는 항문기에 접어들면서 발달한다. 구강기에는 본능만이 존재한다. 욕구가 이성을 앞선다는 것이다. 엄마는 정확히 이 시점에 있는 듯 했다. 덕분에 누나와 나는 '엄마 돌보기'에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대소변부터 식탐, 떼쓰기까지 낯선 행동을 보이는 엄마를 감당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나도 나도 점점 지쳐가게 됐다.

'웃픈' 모성을 느껴

그러던 어느 날 떼쟁이 엄마에게서 '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조금씩 회복기를 보이던 때였다. 당시 엄마는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며 갖은 떼를 부렸다. 다행히 여윳돈이 있었던 누나와 나는 떼쟁이 엄마와 함께 놀이동산으로 향했다. 엄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어찌나 즐거워하던지, 엄마의 환한 미소는 지금도 눈가에 훤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때였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슬픈 신이 시작된 것이다. 엄마는 어디서 생긴 건지 가방 속에서 꼬깃꼬깃 넣어둔 쌈짓돈을 꺼내더니 매점으로 들어갔다. 매점에서 나온 엄마의 두 손엔 핫바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엄마는 두 손에 핫바를 꼭 쥐고 어린애처럼 신이 나서 걸어왔다. 그리고 누나와 내 손에 핫바를 꼭 쥐어줬다.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당신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누나와 내가 자식이란 걸 느꼈던 걸까.

떼쟁이 엄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짜 엄마가 내 눈 앞에 있었다.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나는 말없이 아린 가슴 부여잡고 핫바를 먹었다. 어린애같은 엄마의 행복한 미소를 보면서 즐거웠던 날이었다. 더불어 한없이 가슴 아린 모성을 느꼈던 날이었다. 그렇게 웃기면서 슬픈 추억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엄마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

그 후로 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없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별거 중이었는데 회복이 진행되던 어느 날, 엄마는 덜컥 아버지와 이혼하고 내 곁을 떠났다. 엄마가 떠난 건 그동안의 고생을 떨쳐내고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를 미워하진 않는다. 그리고 미워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난 이미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모성의 결정을 얻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어느 놀이동산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수술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엄마, #수술, #나의 수술 이야기, #모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