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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당시 사진
 군 복무 당시 사진
ⓒ 박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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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2003년 가을. 이제 막 상병이 꺾였을 때(상병이 '꺾인다'는 표현은 상병 복무 개월 수를 절반 이상 채웠다는 의미다) '그놈'이 발견됐다. 엉덩이에서 오른쪽 허벅지를 향해 약 6~7cm 정도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그곳에서 고름이 나와 속옷에 묻어나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2B연필심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나는 곧장 의무대로 달려갔다.

"단결! 상병 박주초, 의무대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수핵탈출증(흔히 디스크라 말하는 것)으로 의무대를 자주 다녀서 군의관은 내 얼굴을 잘 알고 있다.

"진통제?"
"아닙니다. 오늘은 그게… 고름이 나옵니다."

나는 허벅지를 가리켰다.

"뭐? 한 번 보자."

나는 서있고 군의관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나의 부끄러운 부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동안 다소 어정쩡한 포즈로 나와 군의관은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다이아몬드 두 개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빛나며 적막함을 위로하고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군의관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랍에서 연고를 하나 꺼내 들고는 환부에 발라줬다. 그가 꺼내든 것은 유명 제약회사의 복합 연고였다.

"금세 아물 거야. 이제 가봐!"

'신의' 같던 군의관, 당신을 믿었건만...

의학적으로 의지할 곳은 군의관밖에 없는 군대에서 나는 진심으로 그를 믿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치료를 받은지(연고를 바른지) 하루 만에 고름이 멎었다. 나는 신과 같은 처방과 조치를 내린 군의관에 감사하며 허리 아래쪽의 일은 잊어버렸다. 하지만 새살이 쏙쏙 나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불과 한 달도 안 돼 무너졌다. 같은 곳에서 다시 고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같은 처방과 치유, 그리고 재발을 반복하며 10개월이 흘렀다. 이후 내 이마에는 개구리(예비군 마크의 군대식 표현)가 박혔다. 2002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입대한 나는 2년하고도 1개월 후인 2004년 8월 4일 전역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은총(?)으로 약속된 26개월에서 1개월 빨리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니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대학교 2학기 복학을 1주일 앞두고 가족들과 상의 후 집에서 걸으면 5분 거리에 있는 항문외과를 찾았다.

"아이고….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됐어요?"
"한 열 달 정도요."

의사의 진단은… '치루'였다. 삼형제 중에 막내인 나. 형들은 자신들의 전처를 밟는다고 놀려댔다. 우리 삼형제는 모두 비염 수술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두 형은 모두 치핵(흔히 치질이라 불리는 것) 수술 경력도 있었다. 나는 당당히 외쳤다.

"치루는 치질이 아니야!"

나의 외침은 형들의 놀림을 멈추게 할 힘이 없었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려놨다. 바로 입원 수속을 마치고 수술대에 올랐다. 기대와 우려, 그리고 해방감이 뒤섞인 가운데 수술은 빠르게 진행됐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수술이 끝났다. 내 허벅지에서 항문까지, 깊은 수술의 흔적이 남게 됐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하반신 마취라는 색다른 경험을 한 뒤 병실에 옮겨졌다. 진통제와 링거 하나를 달고 마비된 하반신을 바라봤다.

'이제... 끝났다.'

"진짜 장난 아니야, 너무 아파"... 다 이유가 있었다

간호사는 내 침대로 다가와 이것저것 확인하다가 진통제 병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간호사는 내 침대로 다가와 이것저것 확인하다가 진통제 병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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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의식하지 못한 채 3시간이 지났다. 마취가 슬슬 풀려오는지 통증이 조금씩 엄습했다. 하지만 이내 말을 못할 정도로 고통이 심해졌다. 나는 황급히 간호사를 불렀다.

"걱정 마세요. 원래 마취 풀리면 아파요. 진통제 맞고 계시니까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마치 고객센터 상담원처럼, 친절하지만 무신경한 응대를 마친 간호사는 병실을 떠났다. 숨을 고르며 참아도 참아도 통증은 계속됐다. 그렇게 참기를 4시간, 오후 7시가 됐다. 작은 형이 문병왔다.

"형, 너… 너무 아프다."
"엄살 부리지마."

나를 보며 놀려대는 형이지만 왠지 의지하고 싶었다. 형과 함께 있을 때 간호사를 부르면 왠지 더 자세히 봐줄 것 같았다(참고로 나의 작은 형은 전직 씨름선수이다).

"형. 진짜 장난 아니야. 간호사 좀 불러줘."

다시 나타난 간호사, 형이 있어서 그랬는지 간호사는 조금 더 세심하게 내게 질문을 던졌다.

"많이 아프세요?"

간호사는 내 침대로 다가와 이것저것 확인하다가 진통제 병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왜? 하나도 안 줄었지?"

진통제 병에서 링거 바늘 쪽으로 연결된 고무줄 사이에는 작은 밸브가 하나 있다. 흔히 링거의 양과 분출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때, 간호사의 한 마디.

"어! 진통제가 잠겨 있었네?"

나는 화가 나고, 간호사는 어찌할 줄 모르며 미안해하고, 형은 옆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렇다. 마취가 풀렸는데 4시간 동안 진통제도 안맞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연신 미안해하는 간호사에게 대인의 풍모를 보이며 "괜찮다" 말하고 내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진통제의 기운을 마음껏 느꼈다. 그리고 통증보다 두려운 지루함을 견뎌내고 3일 후 퇴원했다.

퇴원하며 의사에게 3일 후부터 학교를 가야 한다고 말하니 방석과 특별한 진통제 하나를 처방해줬다. 아마 의사는 간호사와 진통제에 얽힌 사연이 있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그 진통제는 노란 고무팩에 담겨있어 링거처럼 몸에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고무팩의 압력으로 진통제 액이 조금씩 몸에 밀려들어 가는 방식으로 한 번 달면 3일 정도는 거뜬했다. 일반 링거처럼 손목보다 꼭 높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어서 휴대가 편했다.

링거·방석 덕분에 '전설의 복학생' 되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개인 방석을 갖고 다닐 정도로 깔끔을 떠는 특이한 복학생 선배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개인 방석을 갖고 다닐 정도로 깔끔을 떠는 특이한 복학생 선배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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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복학생들이 기다리는 개강일.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가는 1시간 동안 방석과 진통제는 내게 든든한 벗이 됐다. 처음 좌석에 앉는 순간은 조금 고통스럽지만, 계속 앉아있으니 금방 익숙해졌다. 책가방 옆에 방석을 달고, 진통제 팩을 주머니 넣고 캠퍼스의 낭만을 누렸다. 강의실에서는 학구열에 불타 맨 앞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방석을 깔고 링거를 책상에 꺼내놓고(주머니에서 빠질까봐)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들 사이에서는 '학구열에 불타 링거까지 맞으며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개인 방석을 갖고 다닐 정도로 깔끔을 떠는 특이한 복학생 선배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교수님들이 "치료를 마치고 수업에 들어와도 된다"며 내 걱정을 했지만, 나는 개강 후 2주 동안 방석과 진통제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복학 후 첫 학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대 직후의 복학이어서 그런지 학기 말까지 불타는 학구열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학기 초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는지 나는 복학 후 첫 학기 성적을 모두 A학점으로 장식했다(물론 공부를 열심히 한 덕도 있지만). 방석과 진통제에 대한 소문은 한 학기 동안 후배들과 친해지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이후 맞은 겨울 방학. 나는 평소 좋아했던 후배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캠퍼스 커플이 됐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그 후배는 내 아내가 됐다.

얼마 전, 친한 형님 내외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자리에서 그 형님은 "곧 치질(치핵) 수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내 아내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오빠도 했어요."
"치루는 치질이 아니야!"

분명히 선을 그은 후 아내와 형님 내외에게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설명해줬다.

"좌욕은 꾸준히 하시고요. 방석도 잘 골라야 해요."

설명 마친 후 다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아내의 입에서 나왔다.

"제가 오빠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아세요? 사실 오빠랑 학과는 같은데 반이 달라서 같이 수업을 못들었거든요. 근데 친구가 그러는 거에요. '특이한 선배가 있다, 며칠 전에 허벅지 쪽에 큰 수술을 했다는데 링거를 꼽고 방석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다'라고. 그래서 그 선배를 한 번 보려고 찾아갔죠. 불과 얼마 전에 큰 수술을 했는데도 공부를 하겠다고 링거에 방석까지…. 다른 복학생 선배들과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했죠. 솔직히 멋져 보였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온 거죠. 그런데 내 참… 그게 치질이었다니."

나는 아내와 나의 인연을 만들어준 치루에 감사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내에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보, 치루는 치질이 아니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수술 이야기"응모글입니다."



태그:#박주초,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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