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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광주(光州)에서 대학을 졸업한 나는 서구 화정동에 있는 한 교회의 전도사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말이 전도사였지 그 교회의 책임자나 다름없었다. 전세 건물인 그 교회는 한 쪽은 칸을 막아 예배당으로 활용했고, 다른 쪽은 살림집 역할을 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해 혼기가 다 차지 않았기에 나는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살림집에는 약간 넓은 방 하나와 좁다란 부엌 그리고 창고방 하나가 있었다. 창고방에 각종 서적들을 넣어두고, 안방과 같은 곳에서 기거하면서 교세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난다.

신도 수는 20여 명 내외였지만, 정적인 유대감은 좋았다. 좋게 말해 옹기종기였지만, 일요일 예배시간에는 자리의 절반 정도가 빌 정도였다. 스물여섯의 꽃청년(?)이었던 나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빈 의자를 다 채우고 싶었다.

'솔선수범해야지, 이런 모습을 보고 신도들도 따라올 거야, 전도의 가장 빠른 길은 신도들이 스스로 지인을 한 사람씩 데려오는 거라고 했어.'

그래서 7일금식을 결정했다. 금식(禁食)이란 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입에 넣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물까지 안 먹으면 말 그대로 단식(斷食)이다. 20일 이상을 금식한 사람은 부지기수고, 10일 이상의 단식에 성공한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3일금식을 해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7일 또한 어렵지 않을 걸로 단정했다. 7일 금식을 한 후 배고픔 때문에 또는 다른 이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 또한 내 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금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배가 고플 적마다 물을 마시며 의지를 불태워 갔다. 금식 3일째로 기억된다. 아랫배 쪽에서 찌르르한 느낌이 감지되었다. 미세한 아픔이었다. 늘 밥을 먹다가 오랜만에 금식을 하니 뱃속에서 밥 달라는 신호 정도로 여긴 나는 의지를 더욱 굳세게 가졌다. 4일째에도, 5일째에도 마지막 날까지도 그 아픔은 계속 이어져 나갔다. 그럴수록 어떤 일이 있더라도 7일금식을 완수할 거라며 이를 악물었다.

금식이 끝난 후 12시 경, 교회식구가 준비해 둔 미음 등을 먹으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금식이 끝나고 동료와 지인들과 만나 음료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했다. 금식이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기에 밥이 나오면 물에 말아서 천천이 먹는다든지, 음료수의 농도가 강하면 물을 섞는다든지 하면서 건강에 신경을 써나갔다.

그런데 왠지 이상했다. 금식이 끝나고 뱃속에 먹을거리가 들어가면 찌르르한 아픔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아픔의 도수는 더 강해졌다. 밥을 먹다가 음료를 마시다가 가끔씩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쓰기에 자리를 같이한 지인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나는 일종의 금식 후유증으로 치부해 버렸다.

"미세한 아픔이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느껴진다면 병원에 가보렴."
"그 부위가 오른쪽 배 부근이니 맹장염이 될 수도 있어."
"참는 게 능사가 아니네."

그들은 조언하고 또 조언했다. 한 사람도 아닌 3명 이상의 말을 들으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사자성어도 떠올랐다.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교회가 시 외곽에 있으니 주변에 병원이 없어 중심부로 나갔다.

검사 결과는 참혹했다. 독단과 아집이 문제라는 걸, 소통이 필요하다는 걸 이때 확인했다. 복막염! 의사의 말에 따르면, 맹장이 터져 복막으로 전이가 됐다는 것이다. 며칠만 더 늦게 왔으면, 치명적인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치명적이라는 말을 직접 들은 나는 동료들과 지인들이 고마울 뿐이었다.

1991년 3월 말, 교회 중심 멤버들의 도움 속에 입원 소속을 밟았다. 고향에서 농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교회 신도들은 책임자가 병상에 누워 있으니 순번을 정해 교대로 간호를 해주었다. 다음날, 고향 섬에서 여객선을 타고 올라온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존재는 사랑이었다. 일 때문에 이틀 정도만 병원에 있다 고향에 내려갔지만, 아들의 옆에만 있으면서 모든 걸 도와주었다. 따뜻한 위로의 말도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시골에 사는 아버지 또한 내가 아프기 몇 년 전에 맹장수술을 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적당한 아픔은 참아버리지만, 이날은 보통의 아픔이 아니었다고 어머니는 반추했다. 그래서 비상연락망을 취해 야심한 시각, 배를 타고 목포의 병원에 입원해 맹장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아들이 가스를 몸 밖으로 배출하는 걸 확인하고 그 다음날 낙향하셨다.

의사는 보름 정도 입원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상태에 따라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첨언했다. 보통 맹장수술은 3일이면 퇴원 가능하지만, 내 경우는 지극히 예외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의사 선생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주변 식당으로 가서 여름철 복날에만 먹는다는 보양식도 몇 번 챙겨 먹었다.

정확히 17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해 찬란한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나는 바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아프면 참지 말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그래서 가까운 병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라고 역설(力說)하고 싶다.

1991년 3월과 4월 사이, 꽃 피는 봄날에 나는 멋지고 예쁜 봄꽃을 야외에서 감상하지 못하고, 병상 주위에서만 느껴야 하는 아픔을 가졌다. 동시에 지나친 아집은 문제이고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함을 절절히 체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 혼자의 생각에 따라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관계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살아나가고 있다.

수술한 지 어느새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배꼽 오른쪽 부근에 5㎝ 정도의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복막염의 경험을 전해주고 있다. 샤워를 할 때마다 이 부위를 보면서 건강을 깨닫고,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지만, 병에 있어서는 예외다. 평소와는 다른 통증을 느꼈으면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금식은 다음에도 또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인간의 생명은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한 번만의 삶이기에 이 소중한 경험을 각인하면서 오늘도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고자 노력한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마땅하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느낌의 존재이다. 자기의 몸은 누구보다도 자기가 훨씬 잘 느낀다. 그래서 나처럼 병을 키우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맹장수술만 하면 3일에서 길어야 7일 이내에 퇴원해도 될 일을 갖고서, 나같이 17일 만에야 세상빛을 보게 되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수술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수술, #복막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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