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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인마. 최소한 2남 1녀 그리 못하면 1남 2녀라도 봐야지. 공짜로 해 준다고 딸 둘 낳고는 땡강 잘라 버려?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영숙(친구 아내)씨가 좋아하겠다. '우리 남편이 20세기 내시(內侍) 됐다'고···."
"····."

십년지기 친구가 정관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앞뒤 사정은 살피지 않고 질타를 날렸다. 1970년대 말 자녀가 최소한 '셋 이상' 있어야 한다는 정서로 딸을 둘 낳고 정관수술을 했다는 친구 얘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자존심도 상했다. 그래도 친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부모에게 폐백을 드리는 아내와 나(1982년 2월 20일)
 결혼식이 끝나고 부모에게 폐백을 드리는 아내와 나(1982년 2월 20일)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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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4년이 지난 1982년 2월 20일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아내와 내 나이는 서른세 살 동갑내기였다. 사람들은 '만혼(晩婚)'이라 했다. 결혼 후에도 '자녀 셋'에 대한 희망과 주장은 변함이 없었다. 결혼 전까지 정신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했던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결혼하고 4~5개월 지나서 아내가 임신했다. 총각이 결혼하고, 아이 아빠가 되는 것을 일상적인 절차로만 알았는데 막상 당하니까 기분이 묘했다. 설레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다. 아내가 서른이 넘은 '지각' 산모인데다, 골반까지 좁아 자연분만은 어려울 거라는 얘기를 듣고부터였다.

아내는 임신 기간 10개월을 취미인 글쓰기와 독서로 보내고, 이듬해 2월 귀여운 여아를 낳았다. 오전에 산기가 보여 산부인과로 후송, 자연분만을 시도했으나 오후에 의사가 자연분만은 할 수 없으니 제왕절개로 분만해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수술동의서에 사인하고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건강한 여아를 출산했다고 알려와 안도와 함께 환희를 맛보았다.

장모님과 형제들도 아내에게 고생했다며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갓 태어난 핏덩이가 내 후손이라니 볼수록 신기했다. 아내는 봉지 우유를 사오라고 하더니 빨대를 배냇짓 하는 아이 입에 물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찬 우유를 먹여도 되느냐며 한마디씩 했으나 간호사 출신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두 번은 얘기하지 않았다.

하늘의 축복이 있었는지 아내는 회복이 빨랐다. 그러나 5개월 후 문제가 발생했다. 아내가 또 아이를 가진 것. 임신은 크나큰 기쁨이자 축복이지만, 기뻐만 할 수 없었다. 아내가 입덧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기력이 쇠해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좋아하는 음식도 먹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둘째를 봐야겠다고 우겨댈 용기가 멀리 달아났다.

온갖 잡념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결혼 전 아내에게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못해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줄 자신은 있다'고 했던 약속도 떠올랐다. 결국, 어머니와 상의한 끝에 둘째는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문제는 둘째를 포기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소파(搔爬) 수술을 받고 차에서 내리는 아내가 얼마나 애처롭게 보였던지. 차에서 내리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얼굴도 출산 직후보다 더 창백하고 고단해 보였다. 아내를 중환자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죄책감에 뭔가 해결점을 찾아야지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신의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 정관수술... 그 후유증
 
'20세기 내시'가 되어 평생 딸 하나만 보면서 지낼 것인가. 만에 하나 일어날 불행한 사태들을 상상하면서 보름 가까이 고민하다가 작심하고 총각 때 단골(?)로 다니던 모 비뇨기과에 갔다. 결혼 전 아내에게 했던 약속,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호르몬 통로를 절단하는 정관수술밖에 없었던 것. 누군가와 상의하면 마음이 변할까봐 혼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30년 전에도 정관수술은 '구멍 난 양말 꿰매기'만큼이나 쉽게 인식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고, 평생 불구자가 된다는 강박관념, 수술받은 예비군이 부작용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는 뉴스 등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지만, 아내 배를 두 번 가르게 할 수는 없었다. 

비뇨기과 원장은 총각 때 포경수술은 물론 결혼을 한 달쯤 앞두고 찾아가 소변검사를 했을 정도로 신뢰하는 의사였다. 내 결심을 거듭 확인한 원장은 옷을 갈아입는 등 수술을 준비했다. 집에서부터 몇 번 다짐하고 수술대에 올랐지만, 불안감은 떨칠 수 없었다. 성기 근처 피부가 따끔하게 느껴지더니 조금 후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은 예리한 가위 부딪치는 소리가 20분쯤 진행됐다. 수술을 마친 원장은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술은 만족스럽게 잘 되었고, 활동에도 지장이 없으니 당분간 술을 삼가고,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원장의 말이 생식기관을 절단한 데서 오는 허탈함을 감해주었다. 병원을 나오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런데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중고교 동창과 후배 합해서 8명이 매달 한 번씩 만나는 부부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순번을 정해 매월 각자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먹는 자리인데, 갑자기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이 시작됐던 것. 참다못해 살며시 옆방으로 건너가 청바지 지퍼를 내리는 순간 입에서 "억!"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얇은 고무풍선처럼 탱탱하게 부어오른 고환은 처음. 얼마나 놀랐는지,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통증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지퍼를 올리면 내 머리통 크기로 부어오른 고환이 금방 터질 것 같았다. 색깔이나 모양이 어렸을 때 놀이기구였던 돼지 오줌통과 너무도 흡사했다. 정신을 조금 차리니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처음 겪는 일이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나오는 것은 한숨과 후회뿐. 겨우 안정을 되찾고 안방에 있는 아내를 불렀다. 이내 달려온 아내가 내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간호사 출신 아내 얼굴에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곧장 병원으로 가야지, 한가하게 앉아 전후 사정을 묻고 따질 일이 아니었다. 낮에 수술받은 비뇨기과가 한마장 거리이고, 원장도 집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전화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병원에 도착하니 밤 8시쯤 되었다. 죽어가는 듯한 내 몰골을 본 비뇨기과 원장은 표정이 굳어지면서 가깝게 지내는 외과 의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의사들이 도착해서 마취도 하지 않고, 두 번째 수술에 들어갔다. 집도 의사는 모두 네 명.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천정이 희미하게 보이면서 통증과 함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눈으로 확인은 안 되지만, 진득한 액체가 엉덩이와 사타구니를 간질이는 것으로 피를 많이 흘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술은 새벽 1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뇨기과 원장은 안정을 취하면서 열흘에서 보름쯤 쉬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일주일쯤 지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을 정도는 될 것으로 알았는데, 열흘이 지나도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통증에다 발을 뻗으면 아랫배가 땅겼다. 이대로 앉은뱅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기도 했다. 보름이 가까워지자 슬며시 화가 치밀면서 법원에 피해보상을 청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마음뿐.

가까운 지인들도 소식을 듣고 찾아와 위로를 해주었다. 개중에는 농담을 섞어 조롱하거나 질책성 질문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딸 하나만 낳고 정관수술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 역시 대답은 하나. "몸이 허약한 아내에게 배를 두 번 가르라고 할 수는 없었어요!"라고 답변했다.  

자리에 누운 지 20여 일 만에 일어나 가게 손님도 만나고 대외활동도 했다. 2~3개월 지나자 이번에는 친구들로부터 질타와 원망을 들어야 했다. 아내들이 내 이야기하면서 '더 괴롭히지 말고 정관수술하라!'고 다그친다는 것. 친구들은 원망하고, 그 아내들은 칭찬하고, 어느 줄에 서야 할지 답답했다. 마흔이 넘도록 친구들에게 원망을 들었는데, 아내를 위해 내린 결단의 대가가 너무 비싼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수술이야기' 공모 기사입니다.



태그:#정관수술, #아내와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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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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