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진 찍을 때마다 브이자로 자세 취하는 막내딸의 재롱어린 모습. 수술자국 사진 좀 찍어도 돼냐고 묻자 "어딜 숙녀의 배를 찍느냐?"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 장난끼 넘치는 막내딸 성결이 사진 찍을 때마다 브이자로 자세 취하는 막내딸의 재롱어린 모습. 수술자국 사진 좀 찍어도 돼냐고 묻자 "어딜 숙녀의 배를 찍느냐?"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 이종락

관련사진보기


차가운 샛바람이 옷속으로 스며드는 작년 3월 13일. 친구 한 명이 캐나다로 떠나기에 오랜만에 서울에서 대학동기들과 송별식 겸 모임이 잡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겨우내 움츠린 몸의 기지개를 켜고 오랜만에 시골을 벗어나 서울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눌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땔감 정리 등 집 주변을 둘러보고 아내와 초등학교 2학년 막내딸과 함께 상주 시내로 나갔다. 며칠 전부터 계속되는 막내의 배탈 증세에 아내가 "더 이상 동네 의원으론 안 되겠다"고 해 시내 병원으로 함께 길을 나섰다.

막내딸의 통증, 동네 병원에선 배탈로

동네 의원에선 소화불량이라 했지만 아이의 배탈 증세는 계속되었고, 전날엔 구토까지 했다. 시내 병원에선 "아무래도 장쪽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오늘밤 잘 지켜보라"고 했다. 버스 시간 때문에 아픈 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가는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지만 그저 배탈이나 체한 정도로 여기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눈을 감으니 배가 아파 찡그리는 아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버스가 문경을 지날 무렵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큰 병원에 왔는데, 아무래도 배탈이 아닌 것 같아."
"음... 알았어."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버스는 아랑곳없이 속도를 냈다. 서울 친구에게도 전화가 왔다. 열심히 서울 오고 있느갸고. 이미 달리는 버스에 붙잡힌 몸이라 지금 가고 있다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그저 큰병 아니길 바라면서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무렵, 다시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수술해야 된데. 장이 꼬였다고."

아내의 목소리엔 이미 울음이 잔뜩 들어갔고,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천천히 울지 말고 얘기해 봐."
"장이 꼬여서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대. 동의서 써야 하고."
"알았어. 당황하지 말고... 내가 곧 돌아갈 테니."

아내의 놀란 목소리와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서울 가서 친구 만나 술 한 잔하겠다는 약속은 이미 끝이라 생각했다.

장이 꼬인 아이는 수술실로, 아빠는 서울로

버스는 벌써 수안보를 지나 충주로 향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아내가 옆에 있지만 어린 딸이 수술하는데, 아빠란 사람이 서울 가서 친구들과 술잔을 주고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문제는 돌아가는 길이었다.

긴급히 고속버스 기사님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조금만 더 일찍 얘기 했더라면 직전의 휴게소에서 같은 회사 버스를 탈 수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다음 휴게소에서 무조건 내려야 했다.

아직 봄바람이 차갑게 부는 3월의 저녁 무렵이었다. 기사님이 일러준 대로 휴게소 옆 산길 비상통로를 이용해 건너편 휴게소로 갔다. 휴게소엔 버스보다도 화물차와 승용차가 많았다. 몇몇 승용차와 트럭에 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동행을 요청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았다.

해는 기울고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에서 군인 몇 명이 탄 승용차가 눈에 띄었다. 마침 대구로 향하는 군인 일행은 처음엔 약간 머뭇거리다가 급한 사정을 듣더니 동행을 허락했다. "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고, 나 역시 대구의 한 부대에서 근무했던 기억 등을 이야기하니 어느덧 차는 상주로 진입했다. 

시내까지는 미안해 유턴하는 지점에서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런데 앗차! 택시 한 대 없이 차량이 쌩쌩 달리는 국도변이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또다시 카풀을 해야 했는데, 지나가는 차를 세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30분 지나서야 겨우 트럭 한 대가 섰다.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가 따로 없었다. 짧게 얘기를 나눴더니 트럭 운전사 역시 귀농한 농부였다. 그는 육식의 해로움을 강조하면서 고마움은 채식하는 걸로 갚아달라고 했다. 자료까지 건네주면서 말이다. 너무 고마운 사람이었다.

한걸음에 병원으로 뛰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가 딸아이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내가 스스로도 대견스럽고 뿌듯했으나, 아내는 덤덤하게 맞았다. 

고생했다고 손을 잡아주니, 아빠의 목소리에 눈을 뜬 딸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으나 맹장보다 큰 수술이라 수술 자국이 제법 길었다. 조그만 여자아이의 배에 저런 칼자국을 내다니.... 가슴이 아팠다. 한동안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아빠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내 판단으로 큰 일 면한 딸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딸은 유독 다치는 일이 많아 나와 아내의 속을 태웠다. 그 전해엔 학교에서 다른 아이와 심하게 부딪혀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해 구미까지 가서 미세수술을 받기도 했다.

대구의 한 시장 먹자골목에서 엄마와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찰칵. 앞으론 수술 같은 일 없이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랄 뿐이다.
▲ 시장에서 엄마와 함께 대구의 한 시장 먹자골목에서 엄마와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찰칵. 앞으론 수술 같은 일 없이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랄 뿐이다.
ⓒ 이종락

관련사진보기


지금도 딸은 가끔 아랫배의 수술 자국을 가리키며 "아빠 이거 크면 없어지는 거야?"하며 신기한 듯 바라본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아내가 큰 병원에 가지 않고 의사 말대로 집에 가서 상태를 지켜봤다면, 아이 상태가 어떻게 전개됐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쿵쿵 뛴다. '장중첩증'이라는 이 병은 자칫 시간을 오래 보내면 생명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내의 순간적 기지가 아이를 살렸으니,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고속도로에서 내려 돌아온 그날의 숨가빴던 아빠의 기억을 막내딸은 얼만큼 알고 있을까?


태그:#수술, #막내딸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