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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달릴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의 내게 각인된 말이다.
 '엄마는 달릴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의 내게 각인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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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달릴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의 내게 각인된 말이다. 엄마가 다치거나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걷는 데는 무리가 없는 엄마였지만, 선천적으로 약한 무릎 때문에 계단만 마주해도 우선 한숨을 쉬었다. 때로는 목발을 짚은 엄마를 본 적이 있다. 소풍을 나선 공원에서든 학교 운동회에서든 나는 한 번도 엄마의 손을 잡고 달려 본 적이 없다. 이따금 내가 엄마에게 함께 달리자고 심술을 부릴 적이면 엄마는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 엄마는 못 뛰어. 달릴 수가 없어."

그런데도 끝내 엄마의 무릎 상태가 나빠져 수술을 받아야 했던 건 2000년 여름의 일이었다. 엄마의 직업이 교사인지라 강단에 서서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약한 엄마의 무릎은 그것조차 견디지 못해 탈이 났다. 수술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회복기였다. 엄마는 양 무릎을 수술한 뒤 깁스를 한 채 입원하게 될텐데 그건 엄마가 침상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뇨관을 쓸 수 없었던 것은 엄마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출근해야 하는 아버지, 초등학교 4학년이던 동생 대신 나는 그 해 여름방학, 엄마의 '간병인'이 됐다. 상황은 이해했지만 나는 못마땅했다. 나는 그런 꺼림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열네 살 남자 아이에게 병원은 도서관이나 학원 이상으로 갑갑한 공간이었다. 맛없는 밥, 오래돼 시원하지 않은 냉방기, 동전을 넣어야만 볼 수 있는 로터리식 TV, 거기에 병원 특유의 무기력하고 불편한 공기. 나는 그런 곳에 엄마와 단둘이 앉아(큰 병실이 없었기에 엄마는 2인실을 사용해야 했다. 나머지 한 자리는 한 달 뒤 퇴원 때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지냈다.

나는 엄마의 잔심부름을 도맡았고, 때때로 엄마가 요의를 느낄 적이면 엄마를 둘러업고 병실에 딸려 있는 화장실에 앉혔다. 남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엄마는 입원 중 되도록 '마실 것'을 삼갔는데, 나는 그걸 참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자존심도, 직업적 자부심도 강했던 엄한 엄마의 '교사적' 말투는 날로 부드러워졌다. 그것은 되레 나를 더 멋쩍게, 그래서 언짢게 만들었다. 병원 생활이 일주일도 채 안 됐을 때 나는 '여름이 너무 길구나'라고 생각했다. 병실 속 나는 오만상을 찌푸린 퉁명스러운 아들이었을 것이다.

늦게 도착한 병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엄마가 입원하고 2주쯤 지났을 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그날도 병원에서 점심을 먹고 학원에 간 나는 학원에서 치르는 '일일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수업 후 '나머지 공부'와 재시험을 마쳤을 때는 이미 평소보다 두 시간 이상 늦어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한 시간을 더 보낸 뒤에야 병원행 버스를 탔다. '왜 늦었느냐'는 엄마의 꾸지람에는 나머지 공부와 재시험의 떳떳한(?) 핑계를 내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나도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때, 내가 늦는 것이 엄마에게 어떤 곤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었다.

병실의 문을 열었을 때, 엄마는 울고 있었다. 목발을 당겨 쥐었으나 그것을 이용해 걸음을 딛지는 못한 채, 침상에 갇힌 엄마는 울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우는 것을 난생처음 봤다. 무섭고 불안했다.

"아들. 엄마 화장실에 가고 싶어. 그런데 걸을 수가 없어."

엄마를 업은 채 걸으며 나도 덩달아 울었다. "엄마 미안. 엄마 미안." 내가 엄마를 기다리게 한 것은 세 시간 반 남짓이었다. 엄마는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번이라도 걷는 데 어려움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것은 우스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껏 열 발자국 떨어진 화장실에 가기 위해 세 시간 반을 기다리면서도 연락 없이 늦는 아들을 걱정하다 마침내 스스로 걸을 생각을 한 것마저 실은 불가능하다는 게 분명해졌을 때 엄마는 당황했을 것이다.

나는 미처 간호사를 부르지 못한 채 엄마가 울음을 터트린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왜 간호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다시 침상에 앉은 엄마에게 안겨 되뇌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노라고. 엄마의 남은 입원 기간 동안 나의 태도는 사건 발생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 사건 때문에 아빠의 불호령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그 일을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후 2주일이 더 지나고, 엄마는 퇴원했다.

엄마에게 말하고픈 게 있다
    
이 기사를 쓰며 많은 게 생각났다. 나는 여전히 목발 짚은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일 뿐, 전혀 실감 나지 않는 것이 됐다. 그만큼 엄마의 다리는 건강해졌다. 엄마에게 수술받던 때의 일을 물어보니 엄마는 '왜 그걸 물어보느냐'고 했다. 나는 기사를 쓰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당신은 자신이 교사 탁구회의 주요 전력임을 꼭 써달라고 한다. 무릎 상태가 많이 좋아진 엄마는 이제 가볍게 뛸 수도 있게 됐다.

다행이란 생각, 동시에 그 안도감이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로부터 13년, 그사이 나는 어느덧 스물 일곱이 됐다. 의젓해진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엄마에게 '함께 달리자'고 조르지 않는다. 여전히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다가오는 봄, 나는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엄마, 봄이 되면 운동장에서 호흡을 맞춰 달려보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수술 이야기" 응모 글입니다.



태그:#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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