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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소리를 들으면 '수술'이라는 단어부터 냉큼 떠오른다. 수술은 내게(또 우리 가족에겐) 일종의 파노라마다. 하나같이 기가 막힌 사연들을 지니고 있다. 해서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정신과 육신의 핍진 같은 것을 느끼기에 굳이 회억하여 다시 기록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모처럼만에 다시 컴퓨터 앞에서 긴장의 시간의 갖기로 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세상 일이 너무 재미없고 곤혹스러워 몸과 마음의 핍진을 겪는 통에, 아예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줄곧 무심히 살 수만은 더욱 없으니, 스스로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는 뜻으로, 병고(病苦)와 눈물겹게 싸웠던 나와 우리 가족의 과거 수술 사연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모친이 겪은 네 번의 수술

1988년 당시 60대 중반이었던 모친은 자궁 적출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큰 병원 출입 경험이 없던 나는 주변의 여러 지인들에게서 정보와 의견을 구했다. 여러 지인들이 모친을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라는 말을 했다. 나도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 고장의 문학단체에 함께 참여하는 한 회원이 자신이 사무장으로 근무하는 외과의원을 내게 권했다.

요양병원 입원 100일째 되던 날(2010년 3월 11일)의 노친 모습
▲ 요양보호사와 함께 요양병원 입원 100일째 되던 날(2010년 3월 11일)의 노친 모습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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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대를 나오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오래 근무를 하다가 시골로 내려와 개업을 한 원장의 실력을 그 친구는 내게 열심히 설파했다. 자궁적출 정도는 굳이 큰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원장은 그런 수술을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는 말도 했다. 결국 나는 그 친구의 권유를 따랐다.

고장의 외과의원에서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모친의 참혹한 병고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는데, 모친의 자궁 안에 끼워진 소변 줄로 소변이 나오지를 않았다. 다음날 원장은 나를 불러 재수술 계획을 말하며 동의를 구했다. 나는 수술이 잘못 되었음을 직감하고 지금에라도 큰 병원으로 가는 게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했지만 막상은 실행을 못하고 원장의 권유를 따랐다.       

그날 밤 다른 지역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와 비뇨기과 전문의가 왔다. 외과의원 원장의 친구들이라고 했다. 세 명의 의사가 한참동안 X레이 사진들을 보며 의논을 나누더니 11시쯤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장장 5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수술 도중에 원장이 불러 나는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서 원장이 보여주는 뭔가를 보며 설명도 들었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 후 모친은 그 외과의원에서 무려 3개월 동안이나 병상 생활을 했다. 입원비와 치료비는 들지 않았지만, 특별한 고가의 약과 혈액 값 등은 내가 부담을 해야 했다. 환자는 환자대로 긴 고생을 하고, 나는 나대로 비용 지출이 커서 애초 큰 병원으로 가지 않은 후회가 너무도 컸다. 그래도 나는 원장에게 한 번도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치료에 최선을 다해주기만을 바랐고, 모친이 퇴원하던 날은 원장을 바닷가 생선회집으로 모셔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 후 모친의 방광에 문제가 생겼다. 배뇨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심한 통증을 겪기도 했다. 그리하여 1992년 가을 천안 순천향대 병원으로 모친을 모시고 갔다. 진단 결과 방광 안에 돌이 있어서, 그 결석을 빼내는 수술을 해야 했다. 그 결석은 알밤보다도 컸는데, 방광의 결석이 그렇게 커지도록 모친은 고통을 감내하며 사신 것이었다.

나는 모친 방광의 그 결석은 1988년의 수술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애초의 자궁적출 수술을 큰 병원에서 하지 않았던 실책을 다시금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 모친은 방광 안의 결석을 빼낸 후에도 방광에서 소변이 새는 현상 때문에 기저귀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비록 기저귀를 차긴 해도 그런대로 건강하게 생활하시던 모친이 2001년에는 대전성모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전3기라고 했다. 이번에는 대전성모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한 달 가까이 병상생활을 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지속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재발을 막기 위해 꾸준히 약 복용을 해야 했다.

대장암 완치 판정을 받고 몇 년 동안 비교적 건강하게 사셨던 모친은 2009년 6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암세포가 전이된 골반의 골절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다. 86세의 노친께는 수술도 항암치료도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호스피스 병동의 노친께 내 나름으로 대체의학 방법을 시행했다. 고비를 넘기고 한 달 만에 호스피스병동에서 나오신 노친을 집 근처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하루 세 번씩 병원을 다니며 대체의학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모친은 말기 폐암도 극복하고, 골반 골절까지 불러일으켰던 전이 암세포도 치유되어 병상생활 8개월만인 2010년 7월 5월 퇴원을 하셨다. 올해 연세 아흔이신 노친은 당신의 두 발로 걷고, 설거지도 거들어주시고 빨래도 하시고 집 안 청소도 하시는 등 건강하게 생활하신다. TV만 보시지 않고 매일 독서를 하시는 노친은 오늘도 내게 '효자' 소리를 듣게 하시지만, 노친의 지난 세월의 그 모진 병상 고통들은 내 무지와 미욱함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아들 녀석이 겪은 두 번의 수술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 수술을 받고 회복실로 옮겨지던 날(2006년 2월 20일)의 아들 녀석의 모습
▲ 수술실에서 회복실로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 수술을 받고 회복실로 옮겨지던 날(2006년 2월 20일)의 아들 녀석의 모습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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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딸 다음에 아들을 얻었다. 아들 녀석은 어렸을 때 자주 배가 아프다고 했다. 밤에 잘 자다가도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할머니 방으로 가곤 했다. 할머니 손은 약손이었다. 할머니가 녀석의 배를 살살 비벼주면 통증이 가라앉곤 했다. 그래도 고장의 내과의원에 두어 번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장염 같다는 말만 들었다.

중3 시절에는 서산의료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았다. 맹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결국 맹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나는 수술을 집도한 의사에게 맹장염이 확실했는지를 물었다. 확실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아들 녀석을 처음부터 큰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은 후회는 지속적으로 내게 불안감으로 작용했다.

아들 녀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기에 또 한 번 발병을 했다. 우리 부부가 출타를 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방바닥을 기다시피 하는 녀석을 동생 부부가 급히 서산의료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연락을 받고 급히 서산의료원으로 달려간 나는 비뇨기과 전문의를 만났다. 한쪽 신장이나 요관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신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도리질을 했다. 아들 녀석의 신장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큰 병원으로 갈 뜻을 표하고, 의사에게 서울의 큰 병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응급차를 불러 아들 녀석을 서울의 강남성심병원으로 옮겼다. 2006년 2월이었다. 함께 응급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시골에서 사는 핸디캡을 절절히 체감하는 기분이었다. 도시의 큰 병원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리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2006년 3월 <오마이뉴스> 지면에 <도시 큰 병원 근처에서 살았더라면…>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정밀 검사 결과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콩팥 하나가 정상 위치에 있지 않고 방광 가까이에 있는데, 콩팥과 방광 사이의 요관이 짧아 협착이 된 상태라고 했다. 그 때문에 신장 하나도 많이 나빠졌는데, 요관을 늘려주는 수술을 하면 신장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들 녀석의 신장 한쪽을 잃지 않게 된 사실에 크게 감사했다.

수술은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어 가족대기실의 우리 가족은 불안과 긴장 속에서 입술이 마르기도 했다. 전광판의 '수술 완료' 표시는 그대로 벅찬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 후 아들 녀석은 열흘 동안 병상 생활을 했고, 퇴원 후 곧바로 논산에 있는 고등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다.

고교 졸업 후 서울의 Y대학에 진학한 아들 녀석은 병역의무도 완수했고,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공부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지방의 의료원에서 오진으로 맹장을 잃고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지만, 신장 한 쪽을 잃지 않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긴다.   
       
아내도 수술대 위에 눕다

오른쪽 무릎 연골막 내시경 수술을 받고 아내가 퇴원하던 날(2007년 7월 31일) 일산병원에서 모친과 함께
▲ 일산병원의 1층 내부 오른쪽 무릎 연골막 내시경 수술을 받고 아내가 퇴원하던 날(2007년 7월 31일) 일산병원에서 모친과 함께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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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우리 부부는 모처럼만에 먼 길 나들이를 했다. 내 나이가 한국 나이로 예순이 되어 무안함을 스스로 달래기 위한 방책이었다. 우리 부부는 공주로 가서 계룡산에 올랐다. 잔설과 얼음 때문에 미끄럽기도 한 산길을 올라갈 때는 무사히 잘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 그만 아내의 한쪽 발이 삐끗하여 넘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한쪽 무릎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후 무릎 통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여름방학 때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태안에서 사는 내가 굳이 고양시 일산병원을 선택한 이유는 얼마 전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지인을 문병하기 위해 그 병원에 갔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환한 병원 모습과 친절한 분위기가 정말 호감을 갖게 했다.

아내는 오른쪽 무릎 관절의 연골막이 손상되었다고 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내시경 수술이라고 했다. 결국 아내도 수술대 위에 눕게 됐다. 우리 가족 중에서 모친과 아들 녀석 다음으로 세 번째 수술 환자가 된 셈이었다.      

아내의 오른쪽 무릎 관절 연골막 내시경 수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시간 만에 수술이 끝나고 또 1시간 만에 회복실에서 나왔다. 전신마취가 아닌 오른쪽 다리 마취만 해서인지 아내의 입에서 약 냄새도 나지 않고 정신도 온전해서, 1년 전 아들 녀석의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 수술(강남성심병원) 때와는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었다.

또 수술이 잘되고 상태가 좋아서 아내는 입원 나흘 만에 퇴원을 했다. 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일산병원 의료진과 직원들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그해 8월 <오마이뉴스> 지면에 <아내가 무릎 연골막 내시경 수술을 받았습니다>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을 읽은 주치의와 간호사들에게서 감사 인사도 접했던 것을 기쁘게 기억한다. 

아홉 시간에 걸친 흉부외과와 정형외과 수술

서울성모병원에서 아홉 시간의 수술을 받고 조금씩 회복되어 가던 때(2008년 6월 8일)의 내 모습
▲ 흉부외과 수술에 이어 정형외과 수술을 받고 서울성모병원에서 아홉 시간의 수술을 받고 조금씩 회복되어 가던 때(2008년 6월 8일)의 내 모습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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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족 중에서 모친과 아들 녀석에 이어 아내까지 수술대 위에 눕는 경험을 했지만(모친은 네 번, 아들 녀석은 두 번), 나와 딸아이만은 수술대 위에 눕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또 그럴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내게도 그런 행운은 허락되지 않았다. 2007년 12월 7일 태안 앞바다를 뒤덮은 유조선 원유유출 사고는 단조로운 내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천주교 태안성당의 총회장 직분을 맡은 나는 '기름과의 전쟁'에 전력투구했다. 전국 각지에서 태안성당으로 오시는 천주교 신자 자원봉사자들을 매일매일 작업 현장으로 안내하고 작업 요령을 설명하고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동료 봉사자들은 떡국을 끓여 점심 대접을 하고 나면 모두 철수를 했지만 나는 혼자 남아서 군청 직원들을 도와 자원봉사자들에게 일일이 '봉사활동확인서', '기부금확인서', '고속도로통행료 면제송장' 등을 떼어주고, 손 흔들어 배웅을 하고는 뒷정리를 해야 했다. 그런 생활을 넉 달이나 지속했다.

베트남 전쟁 고엽제후유증 환자인 나는 매일같이 오전에는 책 읽기와 글쓰기, 오후에는 2시간 가량 걷기 운동을 하며 소일했다. 그것이 내 생활 리듬이었다. 그런 단조로운 내 생활 리듬이 기름유출 사고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과로 누적으로 혈당도 조절이 되지 않았고, 면역력이 저하되어 결국 세균감염에 걸려들고 말았다. 목 아래 오른쪽 가슴뼈 부위에서 이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랜 통풍환자이기도 한 나는 이번에는 그 부위에 요산이 결집한 것으로 생각했다.

통풍 약이나 먹고 주사를 맞으며 활동을 계속했다. 점점 통증이 심해지더니 열흘쯤 지나자 온몸으로 통증이 퍼지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도리 없이 119급구차를 불러야 했다. 서산 중앙병원을 거쳐 천안 순천향대 병원에 입원했다. 보름 동안 약물 치료를 했다. 가슴과 팔과 다리에 호스를 박아 농양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병원 주치의는 내게 서울의 5대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워낙 복잡하고 위험한 수술이라 자신이 없다며 서울의 5대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입원 보름만인 2008년 6월 1일 나는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수술대 위에 누웠다.

먼저 흉부외과에서 4시간 30분 동안 종격동(심장과 폐와 식도 사이) 농양 제거수술을 했다. 이어서 정형외과에서 5시간 동안 팔과 다리의 농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수술실로 들어간 지 9시간 만에 회복실로 옮겨진 것이었다. 그 후로 꼬박 한 달이나 병상 생활을 하고, 6월 마지막 날 겨우 퇴원을 할 수 있었다.

회복실에서 나왔을 때의 내 모습은 한마디로 참혹했다. 몸 곳곳에 여섯 개의 피고름주머니가 달려서 운신을 하기도 힘들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하나씩 제거될 때의 기쁨은 실로 컸다. 해방감의 실체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내 목 아래와 양쪽 팔 다리에는 수술 자국이 완연하다. 목욕탕에서 내 목 부위를 유심히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내 팔 다리의 긴 수술 자국을 보여주면서 '삼성중공업'의 예인선과 '현대정유'의 유조선에 받친 자국이라는 농담도 한다.

병원에서 큰 수술이나 특별한 수술을 받은 사람치고 남다른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처럼 바다의 예인선과 유조선에 받혀서 장시간 수술을 받았노라는 색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다시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악몽 같게 느껴지지만, 나는 오늘도 삼성중공업의 예인선과 현대정유의 유조선에 받쳐서 수술을 받고 오래 병고를 치러야 했던 그 기억과 흔적, 그리고 후유증을 안고 고생스럽게 살아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수술 이야기’ 응모 글입니다.



태그:#자궁적출 수술, #방광결석 수술, #대장암수술, #요관협착증 수술, #종격동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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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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