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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옷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다행이지 뭐야. 물가도 만만치 않은데, 새 옷이라도 비싸게 주고 사 입으면, 아마 이 사람들의 생활은 더 힘들어질 걸?"

"그렇다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입고 버린 옷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인간적으로 좀 그래. 그것도 공짜가 아니라 수집업체가 킬로당 얼마씩 돈을 받고 팔잖아. 자국에선 하등 애물단지 쓰레기일 터인데 말이야. 한마디로 쓰레기 수출하는 것이지."

"그 옛날 아프리카 땅에 먼저 들어온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수탈의 첨병 노릇을 한 것처럼, 오늘날은 그 역할을 NGO들이 하고 있는 것 아닐까? 힘 없고 순진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등쳐먹는 실상을 그나마 여러 봉사 단체들이 눈 가리고 아웅은 해주니 말이야."

"이봐. 그건 좀 너무 나갔다. 둘로 나눠서 하나는 무조건 나쁘다는 얘기잖아. 너무 못된 짓을 하니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사람들이 모여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거고. 모두 다 외부인이라고 뭉뚱그려서 얘기하지 마. 실상을 현명하게 보자고."

"그래, 네 말에 동의는 해. 그렇지만 돕자고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이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대부분이 외국인이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 하잖아. 아니 호의호식하고 있잖아."

처박아 두었던 봉지를 뜯어 만든 짜장 소스가 접시 바닥에 검게 말라붙어 있다. 파리 두 마리가 그 위로 어지럽게 비행을 한다. 떠나기 전날 밤의 송별 파티. 마지막이랍시고 그간 묵혀 두었던 심상들을 토로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가난이란, 행복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문제를 얘기함은 정답이 없기에 어설프기 마련이고, 그 끝은 말라붙은 국물처럼 여운도 아닌 것이 찐득하게 달라붙어 허허로움만 후벼 판다. 하물며 세상의 가장 소외된 곳으로, 자원 봉사자란 옷을 걸치고 왔던 우리들로서는 그 소감이 여타 사람들과는 달리 가볍지 않을 터.  

떠나기 전날 밤, 공동 숙소에 머무는 자원보사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저녁 식사
▲ 송별파티 떠나기 전날 밤, 공동 숙소에 머무는 자원보사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저녁 식사
ⓒ 이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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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골 벽촌에서의 1년, 그리고 파견된 잠비아. 이제 5개월간의 소위 봉사 활동을 마치고 떠난다.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삶의 물줄기 속에서도 흐르다 돌부리에 채이고 엎어지다 다시 흘러가는 그 경계점이 있듯이, 지난 시간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비행기에서 처음 바라본 아프리카 땅, 조그만 루사카 공항, 그리고 5시간 버스를 타고 도착한 엔돌라의 밤, 붉은 크리스마스 꽃잎이 지천으로 깔린 아침거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드나들었던 시장 통.

그랬다. 난 이미 시대의 유행사가 되어버린 국제 NGO 잠비아 지부의 자원 봉사자였다. 그리고 이곳은 유럽에서 헌옷을 기증받아서 판 수익금으로 고아원, 교육, 에이즈 사업을 하는 단체였고, 5개월 동안 내가 한 일은 하루 종일 매장에서 헌옷들을 팔기 좋게 정리하는 일이었다.

혹 자원 봉사자라고 좀 달리 보이는 인간이라고 여기거나,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않냐고 나지막이 속삭이진 말라. 난 그저 스펙의 대상으로 전락한 국제단체의 자원 봉사자 신분을 빌린 속물이고, 갈수록 개인화되는 사회에서 도망쳐 그래도 서로 부대껴 살아가야 할 세상살이의 온전함을 위로 받고 싶은 나약한 사람일뿐이다. 또한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사에서,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헌옷을 파는 행위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인지조차 헷갈려 하는 소심한 자이다.

다만 내가, 여기 송별회에 모인 애들이 더불어 분노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소외된 아프리카인들을 차별하는 무중구(아프리카어로 외부인을 뜻함)의 행태다. 외국인 앞에만 서면 알아서 기는 흑인들의 습관화된 열등의식과 누군가는 희망을 노래하거나 그래도 나아진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갑갑하기만 한 것이 아프리카의 현실이다.

5개월간 머물렀던 국제 NGO 잠비아 지부의 사무실과 공동 숙소가 있던 곳이다.
▲ 잠비아 지부 NGO 5개월간 머물렀던 국제 NGO 잠비아 지부의 사무실과 공동 숙소가 있던 곳이다.
ⓒ 이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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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카메라에다 밥통까지 팔아 돈을 마련하였다. 루사카로 떠나는 버스 차장에겐 버스비로 잠바를 벗어 주었다. 돌아가기 전 한 달간의 여행이 가능할 듯하다. 어차피 허허로운 심산이기에 발 가는 대로 닿을 여정. 그러다 보면 길은 열릴 테고, 시간과 함께 조금씩 하얀색 도화지에 색칠이 더해질 것이다.

리빙스턴으로 가는 밤 버스는 자정을 넘어 새벽 4시에 도착하였다. 여관이라도 찾으려면 날이 밝길 기다려야 할 터. 마중 나온 가족이 없거나 택시비가 여의치 않는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그대로 머물러 아침을 기다린다. 서늘한 기운에 자라목을 하고 구부린 등으로 새우잠을 자는 시커먼 사람들 너머로, 세계적인 관광지 리빙스턴의 아침이 오고 있다.

왜 도시 이름이 리빙스턴일까. 150여년 전 나일 강의 원류를 찾고자 잠베지 강을 거슬러 '모시 오아 툰야'(원주민어로 천둥소리를 내는 연기란 뜻으로 훗날 리빙스턴이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을 지음)에 당도했던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도시 한가운데엔 과거 리빙스턴이 남긴 흔적의 잡동사니까지 긁어모은 리빙스턴 박물관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노예의 참혹한 실상을 진정 아파하고 노예해방을 위해 실천하였던 위대한 선지자이며, 이 암흑의 땅에 문명의 씨앗을 뿌린 영웅이라고.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단지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 서구 우월주의의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또한 당시 흑인들에게 가해진 유럽인들의 잔인성에 놀란 나머지 기독교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노예해방이란 슬로건도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더 이상 노동 인력이 필요 없게 된 시대적 상황으로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굳이 거창한 종교적 사명과 인류 평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처받은 자를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려는 마음은 시대를 관통하여 누구나 갖기 마련인 보편적인 미덕이라고 말한다면, 인간의 이성이 마비된 비정상적인 시대였음을 간과한 순진한 생각이던가?

탐험가이자 의사이며, 선교사이자 플랜테이션 농장의 지주였던 리빙스턴의 업적 중에서,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영국 왕립지리학협회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를 탐사한 자료들이 훗날 아프리카를 침략한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콩고 강을 건너 대서양까지 횡단한 후 저술한 '검은 대륙 횡단기'는 결국 천만 명의 콩고 원주민을 살해한 악명 높은 벨기에 레오폴드 2세를 불러들인 동인이 되고 말았다.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낮에 설핏 왔다 가버린 졸음처럼 하찮고 무의미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시 이름을 헌납하고, 동상과 박물관을 지어 추앙하는 오늘날의 잠비아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면 리빙스턴의 발자취와 연관된 수많은 역사물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1866년 마지막 아프리카 탐험에 나선 리빙스턴이  실제로 그곳에 갔는지, 혹은 그 곳에 머물렀는지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이처럼 리빙스턴에 관한 이야기, 신화가 사실유무와 상관없이 아프리카엔 많이 퍼져 있다.
▲ 리빙스턴이 머물렀던 집 (탄자니아 남부 미킨다니 지역)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면 리빙스턴의 발자취와 연관된 수많은 역사물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1866년 마지막 아프리카 탐험에 나선 리빙스턴이 실제로 그곳에 갔는지, 혹은 그 곳에 머물렀는지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이처럼 리빙스턴에 관한 이야기, 신화가 사실유무와 상관없이 아프리카엔 많이 퍼져 있다.
ⓒ 이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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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서부터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아... 시기를 잘 맞춰 가야 한다고 누가 그랬었지. 건기 때 가면 앙상하게 드러난 바위 절벽만 보이고, 우기 때 가면 물보라만 실컷 맞고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때는 우기가 바로 전에 끝난 5월이니 연중 가장 수량이 많을 시기다. 폭포로 향하는 산책로를 들어가기도 전부터 폭포에서 튕겨 쏟아지는 비에 벌써부터 온 몸이 흠뻑 젖는다. 사방은 온통 뿌연 물안개뿐이니 폭포는 고사하고, 길 찾기도 쉽지 않다. 계곡으로 가는 좁은 길 위에서 만나는 야생화나 귀여운 동물들, 바닥에 튕겨 치솟는 물보라와 햇살에 튕겨 영롱하게 변하고 마는 물방울들, 그리고 그 너머 잔상들이 만들어 내는 신비한 무지개...

거짓말이었다. 위대한 자연을 찬찬이 둘러보고자 했던 고즈넉함은 애당초 무리였다. 주위는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게 뿜어대는 물보라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킬킬거리며 내달렸다.

허연 분말을 토해내는 폭포를 마주하여도 감흥은 여전히 비켜서 있다. 이제 나를 현혹시켰던 잠베지 강의 선셋크루즈나 래프팅, 보름달 뜨는 빅토리아 폭포는 물 건너갔다.

에고, 소문난 맛집이란 게 다 그렇지 뭐. 돌아가자.

잠비아쪽에서 바라본 빅토리아 폭포로서 한창 우기가 절정인 시기엔 어마어마한 수량을 토해낸다.
▲ 빅토리아 폭포 잠비아쪽에서 바라본 빅토리아 폭포로서 한창 우기가 절정인 시기엔 어마어마한 수량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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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처음엔 이름난 곳을 좇다가, 자연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다 여행이 짙어지면 사람을 만나러 가는 법이다. 모든 이들이 칭송해 마지 않는 리빙스턴의 빅토리아 폭포에서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짐을 꾸린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없었음이라.
그리고 서구를 흠모하는 관광객뿐인 유럽풍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냄새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리라.

숙소로 돌아오니, 한손으로 코를 막은 매니저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쏘아 붙인다. 당신 배낭에서 이상한 썩은 냄새가 진동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 있다고. 루사카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이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맛좋게 곰삭은 총각김치를 싸주었는데 필시 그것 때문일 듯싶다. 비닐봉지로 몇 겹을 싸두었건만 냄새는 귀신같이 잘 맡는다.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내 뒤로 와서, 마치 쥐꼬리를 들고 가는 양 얼굴을 돌리고 침대 시트를 집게손가락으로 집어가는 매니저를 보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

얼마나 잤을까. 버스는 아직도 멈춰 있다. 대충 듣자하니 구제역이 발생해서 오가는 차량을 소독한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봐도 몇 대 되지도 않는데, 시간은 오후를 훌쩍 넘어섰다. 우리 같으면 수백 대는 해치웠을 시간이다.

도로를 빠져나온 루사카행 버스는 근처의 마을에 서고, 하나둘씩 승객들이 내리더니 이제 덜렁 나 혼자 뿐이다. 누군가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소리친다.

"어이 무중구, 뭐하고 자빠졌어? 운전수는 운전하기 싫다고 사라진 지 언제인데, 빨리 안 내리고 뭐 해? 히히"

빅토리아 폭포에서 출발한 버스가 도착한 이름 모를 마을의 버스 정류장. 이렇듯이 정해진 공식을 벗어난 여행은 뜻밖의 추억을 남기기도 한다.
▲ 어느 조그만 마을의 버스 정류장 빅토리아 폭포에서 출발한 버스가 도착한 이름 모를 마을의 버스 정류장. 이렇듯이 정해진 공식을 벗어난 여행은 뜻밖의 추억을 남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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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밥을 시켰는데, 그 새를 못 참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린 총각김치를 꺼내 우적우적 깨물어 먹으니 오장육부가 개운하다. 이 조그만 마을에 나타난 무중구도 신기할 참인데, 시뻘건 거시기를 깨물어 먹고 있으니 오죽하랴, 저만치서 다가오지 못하고 흘끔흘끔 쳐다보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그려어, 너 한 번 고생해 봐. 큼지막한 놈을 떼어 한 사내의 입에 넣어 주니, 아무것도 모르고 씹어댄다. 그러나 이내 눈알까지 벌게지고, '캑' 소리와 함께 식탁위의 물을 정신없이 들이마셔 댄다. 이 와중에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모였던 사람들은 저마다 배를 움켜쥐며 웃기 바쁘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11월 아프리카 자원봉사를 떠나, 5개월 동안 자원봉사를 한 후 같은해 11월에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여행을 다녔다.

기사는 아웃도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리빙스턴, #빅토리아 폭포, #노예해방, #루사카,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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