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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입니다. 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우리에게 시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연재 '전통시장 고군분투기'는 기자를 지망하는 청년들이 시장을 직접 체험하며 느낀 점들을 다룰 것입니다. 장소는 서울의 전통시장 30곳입니다. 취재 원칙은 하나 입니다. '시장문을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 기자 말

"내가 하루에도 말이야, 3번은…."

'으허허'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서울에 올 때면 제기동 약령시장에서 약초를 사간다는 손임영(62)씨다.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다 은퇴 후 충청북도 제천에서 귀촌 생활을 시작한 그의 손에 한약재가 가득하다.

"몇 년이나 된 거죠?"

흰색 카라 티셔츠에 선글라스를 걸친 채 홍삼을 살펴보던 일본인 리키(Ricky·64)씨가 영어와 일본어를 번갈아 쓰며 점원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의사소통이 힘들어 곤란해 하면서도 '동충하초'의 진위 여부나 녹용의 원산지 등 구입하는 약재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그는 일본에서 4개의 사업체를 운영 중인 '사장님'이다.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50여 년째 명맥을 이어가는 약령시장에는 다루는 약재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간다. 자칭 '정력가' 손임영씨나 기자에게 통역을 부탁하며 '흥정'을 시도하는 리키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오가는 때와 목적은 다르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같은 곳을 향했다. 약령시장 4번 아치 초입의 국산 약재상 '향이 좋은'이 바로 그곳이다.

서울 약령시장. '향이 좋은' 약재상 사람들. 기분 좋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몇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한번도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약초의 진한 향기속에 어색하지만 처음 서로를 볼 수 있는 사진을 찍었다.
 서울 약령시장. '향이 좋은' 약재상 사람들. 기분 좋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몇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한번도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약초의 진한 향기속에 어색하지만 처음 서로를 볼 수 있는 사진을 찍었다.
ⓒ 사진작가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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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 사는 가게

'가게 대문에 이런 걸 붙여 두면 손님이 들어오나?'

'향이 좋은'을 처음 방문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목재에 흰색 글씨를 장식한 세련된 간판과 별도로 이곳은 입구를 가르는 중앙에 연녹색 기둥을 세워 흰색, 노란색, 붉은 색 글씨로 국산 약초나 희귀 약초를 '산다'고 적어둔 것이다.

"좋은 약재가 있으면 언제든 사는 거죠. 국산 약재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약재를) 파는 곳이면서 저렇게 해놓은 거예요. 또 팔러 오는 분도 계시고."

실제로 '향이 좋은'의 최윤호(48) 사장은 약초를 구하는 데 적극적이다. 일주일에 두 번은 지방으로 '물건'을 구하러 다니는 탓에 그 주행거리를 소화한 그의 차는 유달리 수명이 짧다. 이번에 타는 차가 지역으로 약재를 구하러 다닌 이래 벌써 다섯 번째 바꾼 차라고.

"워낙 많이 달리니까 3년에 한 번씩은 차를 바꾸게 된 거죠. 전국에 안 다니는 데가 없으니까. 기름값만 월 평균 240만~250만 원이 나왔었어요."

가게 일을 돌보느라 올 들어 예전만큼 다니지 못했다는 그의 멋쩍은 웃음에는 상인으로 자라온 그만의 철학이 담겨 있다.

"물건을 막 팔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좋은 물건을 구해놓기만 하면 돼요. 근데 그러기 위해선 부지런히 다녀야 해요."

최윤호 사장과 손님이 약초에 대한 흥정을 하고 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간의 '기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웃는 최 사장과 진지하게 물건을 살펴보는 손님. 시장의 흥정은 우리네 삶과 닮았다.
 최윤호 사장과 손님이 약초에 대한 흥정을 하고 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간의 '기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웃는 최 사장과 진지하게 물건을 살펴보는 손님. 시장의 흥정은 우리네 삶과 닮았다.
ⓒ 사진작가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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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커플'

충남 금산과 강원도 홍천이 이번주 방문지라는 최 사장을 뒤로하고 가게에는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는 직원 두 명의 손놀림이 한창이다. 나이는 다르지만 지난 7월을 기점으로 입사동기(?)가 된 권정욱(43) 부장과 이용준(30) 대리가 그 주인공이다. 한바탕 청소가 끝난 후의 그들은 창고에서 필요한 약재를 가져와 다듬기에 돌입했다.

"민들레 홀씨는 워낙 많이 날리기 때문에 안에서 할 수는 없고…."

이번에는 파란 포대에 약재를 가득 담아 밖으로 향하더니 작은 의자에 앉아 민들레 홀씨를 포장용 비닐에 나눠담기 시작했다. 동작이 크지 않은데도 민들레 홀씨가 앉은키보다 높이 풀풀 날렸다. 일반적인 약재는 실내에서 담아 바로 포장을 마치지만 이 같은 경우에는 실외를 이용한다. 민들레 홀씨가 점포 안을 오가는 손님의 옷가지나 약재 등에 쉽게 들러붙기 때문이다.

"경력이 이십 년이 넘죠. 이쪽 일을 꽤 했었으니 약재는 조금 알아요."

권 부장은 새내기가 아니다. 말하자면 '경력직'인 셈이다. 그래서 이 대리와 입사시기는 같아도 직급이 다르다. 말레이시아 등 해외로 약재를 보러 수십 번을 드나들었다는 그는 자신의 가게를 열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한의계의 정체'나 '중의(한자)와의 차이', 약재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도적 문제점을 언급하는 등 경력만큼 박학한 그도 3개월 가량을 무역회사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그는, '못할 일'이라고 표현했다.

"주 5일제로 일을 시키더라고. 그럼 주말에 쉬어야 하는데 애가 셋이야. 자꾸 (놀러) 나가게 되더라고. 일은 6일 정도 하는 게 나아.(웃음)"

이 대리는 그런 권 부장을 보며 가끔 알 수 없는 웃음을 날린다. 약령시장과 아무 연관이 없던 그는 이종사촌형인 최 사장의 권유로 지난 7월 부산에서 서울로 '끌려' 올라왔다. 일을 시켜보겠다는 최 사장의 말에 따라 직원으로 일한 지 두 달째에 접어들었다. 일을 잘한다는 기자의 말에 권 부장이 한마디 던진다.

"멘토를 잘 만나서 그래.(웃음)"

덩달아 이 대리도 짧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하.하."

서울 약령시장.
 서울 약령시장.
ⓒ 임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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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점의 고백

국산 약재상 '향이 좋은'에는 앞서 소개한 세 명의 직원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남는다. 유일한 홍일점으로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드는 조선영(42) 씨는 바로 최 사장의 아내다. 가게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4년 전부터 가게에 나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약령시장 내 다른 가게에서 들어오는 주문부터 지역발 약재에 대한 주문까지 최 사장의 일을 '분신'답게 척척 해낸다.

하지만 최 사장이 원래 그리던 이상형은 아니었다고 넌지시 고백을 해온다. 큰오빠의 가게에서 일하던 최 사장을 큰올케의 소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생활력이 강한 그에게 끌려 결혼을 했고, 오늘날 '사모님'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가게에서는 자신의 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 못하고 '사장님'이라고 부르는데 퇴근 시간인 저녁 6시가 지나면 '규제'는 사라지고 금새 '자기야'로 간격이 좁혀진다.

"사장님이 알다시피 부드럽게 생겼다거나 그런 모습은 아니잖아요. 저는 부드러운 사람이 좋았거든요.(웃음)"

한편으로 이렇게 말하면서도 수화기 너머의 둘 사이는 애틋하기만 하다. 속이 안 좋아 밥을 먹지 않겠다는 부인에게 다른 사람과 먹겠다고 장난치는 남편이나 군말 없이 그러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부인은 결혼 17년 차의 여전한 신혼이다.

'그래도' 약령시장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향이 좋은'도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국산 한약재만 고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 탓에 입소문이 나기 전에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손님들 입장에서 굳이 비싼 약재를 고집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약재란 장기간 복용해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 사장의 약재가 주변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묵묵히 견디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성을 찾아 직장을 옮기는 게 아니라 버텨내면 그것이 적성이 된다"는 최 사장의 말처럼 힘든 과거를 참아낸 결과물로 오늘날 '향이 좋은'이 빛을 보고 있다.

사실 최 사장네만 보면 약령시장의 오늘은 순탄하게만 보인다. 그러나 과거 섭취가 간편한 건강보조식품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기호가 바뀌면서 한약재를 다루는 약령시장 상인들도 위기를 겪었다. 문을 닫고 시장을 떠나는 이들도 생겼다. 하지만 참고 버틴 상인들에게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지난 7월 서울시로부터 '한방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된 데다 내년 완공 예정인 공영주차장까지 생기고 나면 전통시장의 고질적 문제 중 한 가지인 주차장 문제가 해결되며 한층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약령시 '주민'들도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서울 약령시협회 방기문 회장은 최근 4번 아치에서 한 블럭 안쪽에 약초비누 만들기나 체질에 맞는 차 마시기, 침 맞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한방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 관광객 유치에 힘을 쏟고 있고, 직매한약방의 홍시표(69)씨나 해성당한약방의 박범선(49)씨도 각자의 자리에서 약령시장을 지키고 있다.

봉지 가득 약재를 구입한 손님.
 봉지 가득 약재를 구입한 손님.
ⓒ 임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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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의 일몰 그리고 내일

이런 약령시장 상인들도 대부분 오후 여섯 시가 되면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한다. 최 사장도 늬엿늬엿 지는 해를 뒤로하고 셔터를 내린다.

"나는 아침 3시만 되면 고(려)대 운동장에 가서 뛰어요. 마라톤 기록도 가지고 있고."

어느새 문을 닫은 최 사장은 가게 뒤편에 주차한 차로 향하며 그의 다음 날을 소개한다. 과거 몸무게가 130kg에 달하던 시절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아 80kg대로 감량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 후 달리기는 그의 일상이 됐다고.

아침운동은 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조금 더 넓은 공간에 약재를 실을 수 있는 '힘 좋은 차'와 자신이 그리던 매장, 즉 다음 목표를 갖기 위해 게으름을 경계하는 그는 꾸준한 운동 탓에 때로 '무술인' 같은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놀랄 것 없다. 조금만 다가가면 으레 사람 좋은 웃음을 보여주는 그다. 언젠가 '향이 좋은'에서 그를 만난다면 꼭 한 번 이렇게 물어보자.

"뭐 좀 좋은 물건 없어요?"

그가 약재를 살 때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는 김진석 사진작가가 기획하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재학 중인 안형준(29), 임경호(29), 박기석(27) 3명이 취재를 진행합니다.



태그:#약령시장, #향이 좋은, #한약, #약재, #서울 약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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