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한 택배기사가 배달 물건을 옮기고 있는 모습. 택배기사 차들은 대부분 지입차들이다. (자료사진)
 한 택배기사가 배달 물건을 옮기고 있는 모습. 택배기사 차들은 대부분 지입차들이다. (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끔찍한 악몽을 겪었다.

관련기사: 최악의 영안실... 살아남은 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의 일상은 겉보기에 크게 달라진 바는 없었다. 아내는 예정대로 셋째를 낳았고, 나는 여전히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했으며, 그 대가로 따박따박 월급을 받았다. 아이가 셋이나 되니 이제는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며 주위에서는 격려 아닌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나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그 사건의 잔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회사와 유족들이 벌이는 정답 없는 다툼 때문이었다. 법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회사와 그래도 도리적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는 유족들 간의 분쟁이 법적으로 비화되기 일보직전이었다.

회사의 직원으로서, 또한 왜곡된 운송시장이 바로 잡히기를 바라는 업계의 종사자로서 그 분쟁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그것은 결국 현재 우리 사회의 왜곡된 운송시장의 관행이 의인화된 싸움으로서, 승자가 누가 되든 그 구조는 바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 분쟁의 승패 여부를 떠나서 운송 시장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다시는 작년 크리스마스와 같은 악몽을 겪지 않기 위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만 이런 구조를 바꿀 수 있을지, 직접 운전하는 기사가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도 있고 스스로가 자신의 노동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내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온 것이 협동조합이었다. 안 그래도 작년 12월 협동조합법 발의 후 여기저기서 협동조합과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혹시 협동조합이라면 위와 같은 나의 고민이 해결되지 않을까? 어쨌든 거칠게 말해 모두가 주인이 되어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것이 협동조합의 기본적인 개념 아니던가.

이후 나는 협동조합에 관계된 자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여러 종사자들을 만나 운송시장에서 협동조합의 실현 가능성을 타진해보았다. 대개가 관심을 보였지만,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빠듯한 사람들이 불확실한 조직을 세우기 위해 생업을 뒤편에 둔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일 뿐더러,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조합은 정부의 기금을 타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라 그만큼 신뢰하기도 힘든 까닭이었다.

과연 나의 협동조합의 꿈은 이렇게 공상만 하다가 끝나는 것일까?

모험에 나서다

막연하게 꿈꾸는 협동조합의 꿈. 처음에는 내 경험을 근거로 운송시장이라는 영역에서부터 시작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협동조합,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상위개념인 사회적경제는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비록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알게만 된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과 조금만 연대한다면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풀 수 있을 것도 같았다. 1등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갈 수 있다는 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 사회적경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 서울사회적경제센터

관련사진보기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적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자문했고, 스스로를 타자화시켜 바라보았다. 경력 8년 차의 직장인. 그것은 분명 현재 사회적경제에 있어서 큰 이점이었다.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많은 인력들이 비영리 쪽에서 넘어왔던 바, 나와 같이 영리기업의 생태를 아는 사람도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회적기업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지속가능성과 이를 위한 이윤의 창출이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내 자신이었다. 사회적경제에 투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고, 사회적경제에 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중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 아이를 키우는 가장으로서 연봉 절반을 포기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렇게 고민이 깊어갈 무렵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일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고, 역시나 선배는 난색을 표했다. 선배야 아내가 공무원이라 가능하지만, 아이 셋을 두고 있는 나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택은 오롯이 나의 결단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선배는 헤어지기 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영리 쪽과 달리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선한 사람들일 것이고, 어쨌든 지금의 사회적경제 분야는 아직 블루오션이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선배의 마지막 멘트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끔 마주쳤던 끔찍한 상황들이 떠올랐다. 인간의 기본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과 그들이 극단의 경쟁을 추구하는 조직 분위기에서 얼마나 많은 회의를 느꼈던가. 밑의 부하들은 졸로 보고, 상사들에게는 굽실거리기 바쁘고, 협력체 사람들은 어떻게든 쥐어짜내려 하는 나쁜 사람들.

물론 모두가 그럴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호혜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적경제의 특성상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선한 의지를 지닐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는 것은 상당한 매력이다. 서로 협동하고, 서로 나누고, 서로 아끼는 사람들. 결국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니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다음은 내 결정만이 남아 있었다. 비록 아이가 셋이지만, 비록 가장으로서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더 늦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사직서를 써야만 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그때는 진짜로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될 텐데, 그 전에 사회적경제를 배우고 지금의 구조를 갈음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고 싶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녀석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은가.

자, 그럼 이제 문제는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고마워 여보!

가장의 이직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 우리 다섯 가족 가장의 이직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현재 받고 있는 연봉의 절반으로 살아가자는 남편. 게다가 아이는 셋. 과연 어떤 아내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내 아내는 다행히 위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주었다. 비록 수입은 줄어도 내가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얻게 될 가치들을 존중해 주었다. 또한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물류업에 있는 것보다 사회학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내가 스트레스를 덜 느끼게 될 것이며, 돈을 적게 버는 대신 가족들과의 시간이 이전 회사보다는 많으리라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생각까지. 아내가 너무 고마웠다.

아내가 허락한 이상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서울시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중간조직인 강동구 사회적경제 생태계조성 지역특화사업단에 지원했고 면접까지 봤다. 심사위원들은 집이 먼 것이 걱정이라고 했지만 난 합격을 전제로 이사를 이야기 했고, 혹여 줄어든 월급으로 인해 생활이 어렵게 된다면 학원 강사나 대리운전 등 투잡을 통해서라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다.

면접 중 가장 난해한 질문은 사회적경제와 경제민주화의 차이를 이야기 해보라는 것이었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라 있는 그대로 내 생각을 이야기 했다. 경제민주화는 정치적 레토릭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지만, 사회적경제는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모두가 잘 살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될 일이라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사와 투잡까지 이야기했던 내 의지가 돋보였기 때문인 듯 했지만, 한편으론 영리기업에서 8년 동안 일했던 경력이 차별성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막상 합격이 되고 나니 목전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회사에다 사직서를 내는 일이었다. 어차피 한 번 해봤던 터라 쉬울 것도 같았지만, 그래도 2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정을 붙인 곳이라 이야기가 하기 쉽지 않았다. 내가 없어서 회사가 안 굴러가면 어쩌지라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은 없었지만, 내 빈자리 때문에 고생하게 될 같은 팀원들에게 미안함이 앞섰다.

내 새로운 직장이다.
▲ 강동구 사회적경제 생태계조성 지역특화사업단 내 새로운 직장이다.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결국 난 퇴사를 이야기 한 후 후임이 와서 나의 업무를 인수인계 받을 때까지는 남겠다고 약속했고, 이후 한 달 동안을 공중에 붕 뜬 상태로 살 수밖에 없었다. 팀장을 비롯해서 동료들은 아이 셋인 아빠가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냐는 핀잔과 함께 부러움도 내비쳤다. 더 늙기 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나의 무모함과 이를 기꺼이 받아주는 아내의 용기에 혀를 내둘렀다.

딱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난 그렇게 지난 2년을 정리했고, 또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갑자기 구로구에서 강동구로 어떻게 이사를 할 것이며, 반으로 줄어들 월급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등

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사회적경제라는 새로운 바다에서 어떤 항해를 하게 될까?


댓글19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지금은 비록 회사에 몸이 묶여 있지만 언제가는 꼭 공부를 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