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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김장이 늦는구나. 작년에는 음력으로 10월 29일에 했었는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시어머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네. 이번에는 그렇게 되었어요. 형님이 좀 바쁘셔서요. 이번 주말에 하신다니까 그날 일찍 올라갈게요."

나는 궁색한 변명을 대답으로 하고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못해 괜히 달력을 뒤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장한 날까지 기억하시는 시어머님과는 달리 김장을 그저 하루 날 잡아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며느리의 모습이 가벼워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집안 대소사를 맡아 하시는 형님이 직장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바빠서 그렇기도 하지만.

"김장이라는 게 김치를 많이 담는 게 아니라 겨울 한 철을 나야 하기 때문에 뭐든지 배로 들어가는 거야. 재료도 그렇고 마음가짐도 그렇고. 특히 재료는 원산지에 가서 직접 보고 사야 한다. 다른 데서 파는 것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요즘에야 김치 냉장고가 있어서 옛날처럼 많이 담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러냐?"

시어머님의 이른바 김장에 대한 철학이다. 덕분에 김장을 할 때면 배추를 비롯한 재료는 직접 원산지에 가서 구입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주변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이 계시는 것도 아니어서. 고춧가루는 형님 회사에서 알음으로, 젓갈은 소래와 광양에서 게다가 특이한 향이 나는 고수까지... 모두 찾아다니며 구입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서른 포기 남짓 하는 김장을 하려면 준비과정이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시어머님께서 만족해사시니 그렇게 따를 수밖에.

그렇게 해서 하는 김장은 배추김치, 깍두기, 보쌈김치를 하는데 보쌈김치에는 배, 감, 밤, 대추 그리고 코다리가 들어가 특별한 맛을 준다. 거기에 모양까지 예뻐서 김치보다는 근사한 요리 같은 느낌도 갖게 한다.

결혼 하고 나서 지금까지 해마다 김장을 하면서 배우다보니 이제는 나도 시어머니 손맛을 익혀 나중에는 내 딸들에게 전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김장이 그저 겨울 한 철 먹을 김치를 담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외에 다른 것들도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나로, 다시 또 나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소중한 기억들로.

내 기억 속의 김장은 겨울을 대비하는 가장 큰 일이었다. 작은 몸집에 유난히 바지런하셨던 엄마의 김장 준비는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계시던 외삼촌을 통해 고춧가루를 준비하는 일부터, 그리고 어느 날 하루, 엄마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지금 인천의 소래포구였다. 그곳에서 새우젓, 멸치젓, 황석어젓 등의 젓갈을 사오고, 그런 날은 얼마나 젓갈을 많이 먹었는지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곤 했었다.

본격적으로 김장이 시작되는 것은 입동이 지나고, 마당 한 쪽에 배추가 쌓이는 날이었다. 그때는 품앗이 형태로 김장을 했기 때문에 이웃들과 날을 맞추어 미영이네가 오늘이면 우리 집은 내일, 선희네는 그 다음 날로, 거의 일주일 동안은 김장하는 시기였다. 배추장사 아저씨가 부려놓고 간 100포기의 배추는 맨 먼저 두 쪽으로 갈라 마당에 늘어놓은 커다란 고무다라에 소금에 절여놓고, 다음 날이면 새벽부터 배추를 씻고, 아침이면 한 쪽에서는 무를 채 썰고, 각종 양념을 준비하고...

그 모든 게 마당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엄마와 이웃 아주머니들은 두툼한 옷에 빨간 고무장갑으로 무장을 해서 마치 전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배추를 건져 올리고, 무채를 썰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경쾌하게 울리는 채 써는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웃음소리는 잔칫집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오고 가며 무를 집어 먹기도 하며 나름 한 몫을 담당했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동태찌개와 함께 하는 점심이다. 버무린 속을 배추에 싸서 먹으면, 그리고 얼큰한 동태찌개와 함께 먹으면 속도 풀리고 개운한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각자 커다란 그릇을 앞에 두고 본격적으로 배추에 속을 넣으면 엄마는 완성된 김치를 마당 뒤쪽에 묻어 놓은 항아리에 몸을 구부려 차곡차곡 담는다. 그 모습은 마치 신선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은 느낌도 갖게 했다. 그렇게 해서 김장이 다 끝나면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아주머니들의 손에는 우리 집의 김장김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엄마가 선희 네로 김장 품앗이를 하고 가고, 나도 엄마 치마꼬리를 붙잡고 따라 가고.

다른 집의 김장을 끝내주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엄마는 나를 업어주시곤 했었다. 그럴 때면 가슴으로 전해져오는 따뜻함에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나를 따라오는 별을 세며...

내 딸들이 지금의 내 모습이 되었을 때 김장은, 그 속의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괜히 마음이 바빠진 나는 김장준비를 시작했다. 김치 통을 챙기고 고무장갑, 칼, 앞치마... 또 하나 아이들이 기억할 김장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덧붙이는 글 | 김장응모글



태그:#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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