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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골의 아침
 활골의 아침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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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윌리엄 쿠퍼)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지 정확히 100일 지났다.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에서 충남 금산군 남이면 활골로. 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만큼이나 삶이 극적으로 변했다. 급하게 달리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정지한 느낌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장면처럼.

그러나 누군가처럼 도시생활에 환멸을 느껴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서울을 버린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의 삶은 서울에서의 삶대로 나쁘지 않았다. 대단히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건사할 만큼 벌었고, 하는 일은 재미있었으며, 좋은 이들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쁠 게 없으니 쳇바퀴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았다. 지금 감행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을 때까지 컨베이어 벨트마냥 흘러갈 것만 같았다. 그저 막연히 자본주의 급행열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사실, 아파트 전세금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받아 올라탔던 바로 그 순간부터.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 시골에서 살 집을 빌리기로 정한 날부터였을 것이다. 늘 익숙해 새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도시의 삶에서 편히 잠자던 심장에 펌프질이 시작된 듯했다. 두근거림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이자 동시에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모든 것이 이미 다 갖춰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믿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현실과 이상은 차이가 있고 무모하거나 불안해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소박하고 고즈넉하게, 조용하고 품위 있게, 노동하고 땀 흘려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슨 독립운동하듯 비장한 것은 아니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돌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담
 돌담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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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활골은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상금리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지형이 활 모양 같다 하여 활골이다. 충남에서 세 번째로 높은 해발 732미터의 진악산 골짜기 안에 있다. 군청이 있어 번화한 금산읍에서 자동차로 25분 거리다.

활골에 내려와 정신 차리고 한 일은 '돌담'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돌담을 쌓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시작은 청소였다. 한동안 비어 있던 집이라 주변에 쓰레기가 적지 않았다. 농사용 폐비닐에서부터 깨진 그릇이나 생활 쓰레기까지. 매일 조금씩 줍기 시작했는데 100리터짜리 대형 쓰레기봉투가 금세 찼다.

하루는 예전에 있던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반쯤 묻힌 채 드러난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었다. 폐비닐을 꺼내기 위해 돌을 치우는 내게 지나가던 한 동네 어르신이 '고생스럽게 뭔 돌담을 쌓으려 하느냐'고 하셨다. 미처 대답도 못하고 서 있는데 충청도 어법으로 쐐기를 박으셨다.

"쌓으면 보기는 좋지."

기왕 시작한 것이니 돌담을 새로 쌓자는 마음과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사이에서 5초 정도 고민하다 저질러 보기로 했다. 돌이야 얼마든지 있고 남아 도는 게 시간인데 뭐가 대수랴 싶었다. 사실, 그동안 마당과 밭에서 캐낸 돌이 너무 많아 처치곤란인 상황도 한몫했다.

일단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앞집 어르신께서 돌담 양쪽 끝에 막대를 세워 줄을 띄우고 그 줄에 맞춰 돌을 쌓으면 된다고 조언해 주셨다. 호박돌들을 제일 아래 깔고 눈대중으로 쌓아올렸다. 시작이 반이라고 나쁘지 않았다. 괭이로 파고 삽으로 뜨고 돌로 쌓는다. 그 단순무식한 방법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니 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의 한 귀퉁이가 깔끔해졌다

돌담의 작업 과정
 돌담의 작업 과정
ⓒ 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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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3일 첫 삽을 뜨고 4월 26일에 마지막 돌을 놓았으니 총 공사 기간은 24일이지만, 중간에 다른 일로 일 주일 정도 쉰 날을 제외하면 실제 작업에는 18일 걸렸다. 그동안 버린 목장갑만 해도 적지 않다. 손가락도 아프고 면장갑도 금방 해져 결국 작업용 가죽 장갑까지 샀다.

또한, 무수히 많은 파스도 동원됐다. 한동안은 팔목 골절이 의심될 정도로 통증이 심해 숟가락을 들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이면 묵묵히 삽과 괭이를 들고 담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동네 어르신들도 돌담이 모습을 드러내자 예전에 해본 적 있느냐 물으며 격려해 주셨다. 심지어는 나를 '담쟁이 양반'이라고 부르는 분도 계셨다.

그 가운데 '마을이 훤해졌다'는 말이 가장 큰 찬사였다. 앞으로 이 집에서 얼마 동안 살게 될지, 또한 이 돌담이 얼마나 오래 보존될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마을에 들어와 이 전보다 더 나아졌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고, 돌담을 좋아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노동의 보상은 충분하다.

단 한 개의 돌도 예외 없이 내 손을 거쳐 15미터에 이르는 돌담이 세워졌다.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서 했던 일들 가운데 가장 값진 일이 아닐까 싶다. 이로써 지구의 한 귀퉁이가 아주 살짝 깔끔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신과 함께 시골을 일구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활골닷컴'에도 비슷한 내용이 연재됩니다.



태그:#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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