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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글쓰기> 책표지
 <삐딱한 글쓰기> 책표지
ⓒ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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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글쓰기>는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책을 쓴 안건모는 20년 동안 시내버스를 운전한 버스노동자였다.

열심히만 일하면 돈을 벌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책을 만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살아온 이야기와 일터 이야기, 버스 운전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글쓰기가 처음부터 뜻대로 된 건 아니다.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었다. 글은 '배운 사람들'만 쓰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글쓰기 규범을 먼저 알아야 글을 쓰는 줄 알았다고 한다.

1996년 어느 날 월간 <작은책>을 보았다. '아! 나같은 사람도 글을 쓸 수 있구나'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뒤로 더 자주 글을 쓰고 널리 책을 구해 읽었다. 그간 글쓰기에 관한 책만 오백여 권을 챙겨봤다.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세상 보는 눈도 길렀다.

저자는 힘들었던 지난 날 이야기를 쓰면서 치유를 경험했다. 사회를 보는 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이 글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 세상이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채 굴러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때부터 사업주와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행태를 고발하면서 그들을 마음껏 비꼬는 삐딱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통쾌했다.

저자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점차 '일하는 사람들'을 새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걸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누구나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조한다.

개나 소나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라야 좋은 세상이다. 지식인들만 글을 쓰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5쪽)

'개나 소나' 글을 쓰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모두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왜 그럴까. 저자에 따르면 사람들이 글쓰기를 어렵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세상이라야 좋은 세상"

많은 사람이 글은 배운 사람들만 쓰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못 배우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글을 써서는 안 되는 줄 안다. 그러다 보니 일상의 자연스러운 체험을 기록하는 생활글 같은 글은 제 대접을 못 받았다. 보통 사람의 글쓰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글쓰기는 배운 사람만 하는 것이라는 편견은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쉽게 써도 될 말을 공연히 어렵게 쓴다. 겉멋에 들려 글이 있어 보이게 하는 데 애쓴다. 그렇게 해서 대중이 못 알아먹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이 책에 소개된 다음 이야기를 보라.

"감각의 소산과 이지의 소산의 갭은 인위적 관념으로 메울 수 없다."

농사꾼 한 분이 이 말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그걸 배우려고 학자를 찾아갔다.

"부탁입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학자는 선선히 대답했다.

"첫째,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둘째, 되도록 '~의'나 '~적'이라는 말을 많이 쓰게. 셋째, 가장 중요한 건데 말을 할 때는 그 말을 하는 자네도 무슨 뜻인지 몰라야 하네." (187쪽)

네댓 살짜리 아이조차 한글을 읽고 쓰는 일이 흔한 세상이다. 하지만 글은 여전히 배운 사람들 차지다. 저자가 보기에 이 세상은 글을 독점한 보수지식인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쉬운 한글을 가지고도 국민들이 알 수 없도록 말과 글을 어렵게 쓴다. 관공서에서 쓰는 글이나 정치인들이 쓰는 말이 생생한 사례다. 쉬운 글을 쓰면 모두 알아먹으니 일부러 어렵게 쓰는 것이다. 한마디로 글쓰기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글쓰기'가 아니라 '글짓기'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의 문제도 있다. 교과서는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담긴 글을 싣고 있다. 제도교육은 삶과 일치해야 하는 글쓰기를 외면한다. 글은 있는 경험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임을 가르친다. 하지만 저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의 말을 빌려 글과 책은 '쓰는' 것이지 '짓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문학이란 본래 '순수 문학' 또는 '진실 문학'밖에 없다. 이쁜 거 보고 이쁘다고 하고 더러운 걸 보면 더럽다고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쓰는 문학이 진짜 순수 문학이다. 무너질 듯 가난한 오막살이를 보고 "오, 아름다움이여!" 하고 읊는 건 '공갈 문학'이다. 문학이든 생활글이든, 글은 자기 삶과 일치해야 한다. 삶은 떠난 글쓰기는 없다. (111쪽)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쓴다'

글은 왜 써야 하는가. 저자는 세 가지로 정리한다.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데 효과적이다.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글이든 술술술 풀릴 것이라고 한다. 가슴에 맺힌 것을 풀기 위해서도 글을 쓴다. 글쓰는 과정에서 분한 마음이 치유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세상의 진실을 알리고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해서다. 저자가 가장 중시하는 글쓰기 목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쓴 다음 구절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책을 썼을지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이 책 25쪽에서 재인용)

글을 왜 써야 하는지를 알았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 같다. 저자는 목적에 맞고, 관점이 올바르며, 감동을 불러일으켜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좋은 글로 본다. 쓴 사람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도 좋은 글이다. 이들 중 저자는 특히 관점이 올바른 글을 강조한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하는 글이나, 데모하는 군중도 나쁘고 폭력 진압하는 정부도 나쁘다고 하는 글을 쓰면 안 된다. 피지배자는 피지배자 세계관으로 글을 써야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자본가들이 세뇌시킨 생각을 갖고 글을 쓰면 안 된다. (138쪽)

글 쓰는 이유와 쓰는 글이 어떠해야 하는지까지 알았다. 이제 글 쓰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 무턱대고 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전에 좀 더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자는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수첩이나 공책을 갖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메모하기, 문장을 과거형과 현재형 중 어떤 것으로 해야 할지 정하기, 말끝을 반말 투로 할지 존대 투로 할지 정하기, 글을 주로 누가 읽고, 글감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정하기 등이다.

'삐딱한 글쓰기'가 필요한 시대

어찌 보면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다. 하지만 메모가 없으면 글의 뼈대를 세우는 일이 막연해진다. 문장의 종결시제나 말끝 형태들도 글 색깔과 인상을 좌우하는 데 크게 작용한다. 글감 구하기에 관한 언급은 특히 중요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면 쓸거리가 없어 글을 못 쓴다는 이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주부들은 집안에서 글감을 찾으면 된다. 아이 이야기, 남편 이야기, 부모와 시부모 이야기, 자기 생활 속에서 나오는 글감은 무궁무진하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찮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은 절대로 소소하지 않다. ··· 어떤 사물을 보거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이들은 그걸 글로 쓰는데 어떤 이들은 무심코 넘어간다. 결국, '그것이 글감이 될까?'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사물이나 사건을 보는 눈이 예리해진다. (222~223쪽)

나는 2012년 12월 말부터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써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500개 정도 되는 기사가 실렸다. 주로 교육·사회 분야의 주장글과 서평이다. 모두 합해 보니 1343쪽 분량이다. 200자 원고지로 계산하면 1만400장 분량이다. 매일같이 원고지 20장 정도 채워야 가능한 양이다.

평소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김 선생님은 나를 보고 가끔 놀라신다. 어떻게 그 많은 양의 글을 쓸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쓸 말이 술술 나와서 그러는 게 아니냐고 하신다. 막힘 없이 글이 써질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문장을 있는 힘껏 쥐어 짜내듯 할 때도 많다.

그래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글을 쓸 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늘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내 생각을 다른 이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쉬이 용납하지 않는 이 팍팍한 세상에 맞서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감히 자평하건대 내 글은 나 스스로 봐도 거의 항상 '삐딱했다'.

저자는 글이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다. 이 시대는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 가혹한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했다. 저자의 말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글보다 삐딱한 글쓰기가 필요한 이유다. 나는 삐딱한 글쓰기로 자주 힘을 얻곤 했다. 세상 보는 눈이 훨씬 넓어진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 오묘한 세계로 들어서는 데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삐딱한 글쓰기>(안건모 지음 / 보리 / 2014. 7. 1. / 323쪽 / 13,000원)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삐딱한 글쓰기

안건모 지음, 보리(2014)


태그:#<삐딱한 글쓰기>, #안건모, #보리, #생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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