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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언젠가부터 조금씩 절게 된 오른쪽 발목에 잔뜩 힘을 준 채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야간버스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새벽에 버스를 타는 일은 살인적이었다.

둘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강행군이지만, 혼자가 되니 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겨우' 라고 말할 수 있는 6시간.  잠을 자기에도 깨어 있기에도 애매한 시간 동안 버스는 대체 어디를 향해 가는 건지, 산골짜기를 돌아 오르고 내리는 곡예 운전의 연속이다.

멀미가 날 것 같은 몸을 추스리며 간신히 잠이 들기 직전 좌석 위 TV에서 <트랜스포머 3>를 본 것 같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른 곳도 아닌,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팔렝케에서 로봇이라니.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쳤던 마야인들이 보면 기절할 만한 장면일 것이다.

한국의 기와가 떠오르는 산크리스토발의 낮은 집들

 - 야간버스의 피로를 잊게 해준 산크리스토발 대성당
▲ 산크리스토발 대성당 - 야간버스의 피로를 잊게 해준 산크리스토발 대성당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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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쯤에 도착한 산크리스토발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독특하게 채색된 대성당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닦아 내려는 듯, 몇 번이나 색을 갈아입었을 산크리스토발의 대성당은 표면이 닳은 흔적도 없이 깨끗하다. 고산지대 기후 탓에 외투를 꺼내 입은 사람들은 그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고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지대에 위치한 산크리스토발은 멕시코에서도 가장 가난한 주인 치아파스의 주도다. 일전에 누군가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치아파스 주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원주민들이기 때문이란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는 이들. 멕시코의 언어가 스페인어로 바뀐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스페인어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도시.

 - 낮은 집에 기와를 꼭 닮은 처마, 산아래 오밀조밀 자리잡은 모습이 꼭 우리네 사극을 보는 것 같다.
▲ 산크리스토발의 골목길 - 낮은 집에 기와를 꼭 닮은 처마, 산아래 오밀조밀 자리잡은 모습이 꼭 우리네 사극을 보는 것 같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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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 사이로 계속 이어지는 낮은 집들은 우리네 기와를 닮은 지붕을 가졌다. 투숙객이라고는 채 5명도 되지 않는 조용한 숙소에서 유난히 친절한 직원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햇살 좋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여행지에서 나이 많은 사람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다. 미국 워싱턴 주에서 왔다는 그의 표정에서 좋은 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한참 어린 동양의 여행자를 대하면서도 은근하면서 정중한 매너를 보였다. 택시를 타러 나선 거리에서 한 손에는 큰 캐리어를, 다른 손으론 아내의 손을 꼭 잡은 모습 등이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갑자기 그리움이 왈칵 쳐들어왔다. 기와로 된 숙소의 처마 지붕이 자꾸만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아픈 다리도 쉬게 할 겸, 오늘은 그저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귀국을 알린 편지에 대한 답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주의 수도

 - 기념품, 보석, 세계 각국의 음식, 디자인, 커피 등, 여행자의 흥미를 끌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팔고 있는 과달루페 거리는 종일 사람들로 북적인다.
▲ 과달루페 거리 - 기념품, 보석, 세계 각국의 음식, 디자인, 커피 등, 여행자의 흥미를 끌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팔고 있는 과달루페 거리는 종일 사람들로 북적인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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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느지막하게 일어나 직원이 소개해준 식당에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감성 충만한 새벽에 찬 공기를 가르며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걷고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산크리스토발에서 만큼은 최대한 게으르기로 했다.

산크리스토발을 방문한 여행자가 모두 모인다는 과달루페 거리(Read de Guadalupe)는 이미 노천카페를 차지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블록이 10미터가 될까 말까 한 짧은 골목길들 사이로 자리잡은 가게들은 오로지 여행자들의 차지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는 역시 오감을 자극하는 다국적 맛집들. 주로 중남미의 음식부터 유럽까지, 저마다 출신과 개성을 자랑하는 가게들이 넘쳐난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아메리카를 한 바퀴 돈 느낌이다. 대문을 활짝 열고 유난히 노란 빛을 많이 띠는 닭을 통째로 구워대는 그 연기의 맛이란. 산크리스토발만 봐서는, 이곳이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주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저렴한 물가에 조용하고 서정적인 마을

해발 2200미터 고산지대에서 자란 향긋한 커피와 호박이 여행자들의 눈과 코를 즐겁게 한다.
 해발 2200미터 고산지대에서 자란 향긋한 커피와 호박이 여행자들의 눈과 코를 즐겁게 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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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면 이번에는 향긋한 커피 향이 코를 간지럽힌다. 그러고 보니 해발 2200미터 산 중턱에 비가 많이 오는 기후니 커피가 날 만도 하다. 들고 다니면 커피 냄새가 나는 사람이 될까 싶었지만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배낭 속의 코스타리카 산 커피가 생각났다. 커피가게 뒤로는 산크리스토발의 특산물인 호박을 파는 보석가게다. 이러니 여행자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 마을의 동쪽끝에 있는 언덕에 오르면 특이한 생김새의 작은 교회와 함께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다.
▲ 산크리스토발의 언덕 - 마을의 동쪽끝에 있는 언덕에 오르면 특이한 생김새의 작은 교회와 함께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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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돌려 산크리스토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언덕을 올랐다. 골탕을 먹이려는 건지, 천천히 쉬어가라는 의도인지, 굳이 지그재그로 만들어 놓은 긴 계단을 따라 언덕에 오르고 나니 폐는 터질 듯 말 듯, 아픈 발목은 부풀었다.

높은 건물이라곤 하나 없는 산크리스토발의 풍경은 그야말로 변경지대다. 반짝반짝 빛나는 카리브해를 비추던 태양이, 구름 낀 하늘아래를 포물선을 그리며 비추고 바람소리만 속삭이듯 들려온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는 풍경이었지만 서정적이고 익숙한 그 느낌이 좋았다. 마음껏 울다가 다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좋은, 아무도 없는 그 언덕이 좋았다.

간략여행정보
해발 2200미터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산크리스토발은 주민 대부분이 원주민으로 구성된 치아파스(Chiapas) 주의 주도다. 멕시코 전역에서 가장 가난한 주라고 알려져 있으나, 소칼로 광장에서는 무료 와이파이가 될 정도로 산크리스토발만 봐서는 딱히 이를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저렴한 물가에 반해 이 조용하고 서정적인 마을에 오래 머무는 여행자도 많다.

보행자 전용거리인 과달루페 거리에는 세계 각국의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 문화센터 등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만한 모든 것들이 모여있다. 근교에는 인디오 마을인 차물라를 비롯,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몬테베요(Montebello) 호수 및 수미데로(Sumideo) 협곡 등이 있어 여행 동선은 충분히 다채롭다.

좀 더 자세한 산크리스토발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6494969



태그:#산크리스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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