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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청년유니온은 '고객님 10분만 쉬어도 될까요?'라는 주제로 9월부터 매주 콜센터 노동자의 근무환경 개선과 감정노동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한 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콜센터 노동 사례를 모아 사례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릴레이 인터뷰는 콜센터 노동자의 사례집 발간을 위해 시작됐다. 콜센터 노동자 릴레이 인터뷰 연재를 통해 많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 기자주

삶은 그녀에게 고난과 혼돈의 도돌이표였다. 야간 대학을 다니던 시절, 이현지씨는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면서 공부했지만 결국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2011년, 난생 처음으로 전화 헤드폰을 귀에 꽂고 콜센터 상담일을 시작했다. 여자의 몸으로 먹고 살기 위해 잡게 된 전화줄이었다.

낮에 걸려오는 접수 전화는 많으면 400콜 정도. 하루 24시간 3교대로 일을 하면서 이현지 씨는 최저 임금 수준의 월급을 손에 쥐었다. 근근이 10만 원을 저축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생활비로 나갔다. 갈수록 물가는 올랐지만 월급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5년 넘게 일한 직원과 신입의 월급은 같았다. 다른 상담원들도 마찬가지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였다. 청춘의 시간, 매일 일을 했지만 여전히 내일을 꿈꿀 수가 없었다.

상담원의 희생과 친절만을 강요하는 두리발 콜센터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지역지부와 두리발 콜센터지회는 두리발 공공성 확보, 경력직 콜센터 상담원 해고규탄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전국공공운수노조 부산지역지부와 두리발 콜센터지회는 두리발 공공성 확보, 경력직 콜센터 상담원 해고규탄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 김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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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에서 일을 하다 보면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전화가 많이 와요. 제가 자리를 비우면 다른 상담원이 그만큼 전화를 많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제조 공장을 다닐 때는 중간 중간 휴식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콜센터 같은 서비스 업종은 쉬는 시간 자체가 아예 없다는 걸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두리발 콜센터로 걸려오는 전화는 발음이 부정확한 뇌병변 장애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출발지, 도착지를 제대로 알아듣고 그때그때 운행 차량과 동선, 거리, 시간을 생각해서 배차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야간은 낮에 비해 전화가 그리 많지 않지만 대신 민원이 많은 편이에요. 밤에 운행하는 두리발 차량은 2대밖에 없어서 연결을 해 드리기가 사실상 굉장히 어렵거든요. 야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보통 30~50콜 정도지만, 실제 기사님이 담당하시는 건수는 각각 5~6콜밖에 되지 않아요. 장애인분들은 두리발이 아니면 아예 이동 자체를 할 수가 없는데 그에 비해 차량은 너무나 부족한 상태인 거죠. 장애인분들은 차량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취소 전화를 하세요." 

'두리발'은 1, 2급 중증장애인들의 이동권 보호를 위해 부산시가 2006년부터 운행하고 있는 장애인 콜택시다. 서울, 대구와는 달리 부산시는 두리발 콜센터를 직접 운영하지 않는다. 두리발 콜센터를 위탁 운영하고 있는 부산택시조합이 다시 민간업체(TMKC)에 재위탁한 이중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민간업체가 운영하는 콜센터 사무실은 그야말로 열악했다. 상담원들은 '닭장'이라 불리는 사무실에서 낮과 밤을 수시로 바꿔가며 줄곧 전화를 받았다. 별도의 휴식 공간은 없었다. 근무 환경이 이렇다보니 콜센터를 찾은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상담 인력은 늘 부족했지만 제대로 충원된 적은 거의 없었다.

콜택시 상담원도, 장애인도 모두가 약자

"전화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제 머리 위에서는 전화 벨소리가 계속해서 울려요. 모든 상담원이 통화를 하고 있지만 이 전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오고 있는 거예요."

모든 상담원은 2대의 전화벨 소리에 반응해야 한다. 하나는 전 상담원에게 각각 할당된 전화로, 전화를 받고 있는 중이면 상대방에서 통화중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통화중이어서는 안 되는 '즉시콜'이다. 전 직원들이 쉼 없이 밀려드는 전화에 매여 있지만, 일손이 부족한 탓에 제때 받지 못하는 전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받아야 하는 상담 업무는 녹록지 않았지만 사회인으로서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장애인분들의 입장에서는 정작 전화 신호는 가는데 연결이 안 되니까 상담원의 업무 태만으로 오해하시는 경우가 생기기도 해요. 헤드폰 너머로 '대체 무얼 한다고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았냐'는 식의 지청구를 듣게 되는 거예요. 저희 모두는 전화를 받느라 화장실도 제때 못가고 있는 상황인데 순간 억울한 감정이 드는 거죠."

장애인들이 택시를 부르기 위해서는 수차례 전화를 해야 하고 기본으로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차량 수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차량을 한정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장애인뿐 아니라 독촉전화를 받는 상담원들도 마찬가지로 고되고 힘이 들었다. 콜센터 상담원은 모두 11명, 직원 한 명이 배차 업무를 전담하고 나머지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24시간 장애인들의 전화를 받았다. 시간별로 분담하고 나면 전화 상담 인력은 많아야 고작 4명 정도에 불과했다.

두리발은 지난해 12월, 차량 17대를 추가하여 현재 117대의 콜택시를 운행하고 있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과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지자체는 1, 2급 중증장애인 200명당 1대 이상의 장애인 콜택시를 의무적으로 운행해야 하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부산의 1, 2급 중증장애인은 현재 2만5000여 명에 달한다. 법정대수를 채우기에는 아직 부족한 데다 서울시 등에 견줘 이용 요금이 4배 가량 비싸고 경남 양산을 제외한 시외 지역은 차량 운행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두리발 콜센터 노동조합 결성 그리고 해고와 투쟁

결국, 그녀의 사회생활은 투쟁이 되었다. 한낱 노동자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의 사회생활은 투쟁이 되었다. 한낱 노동자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밖에 없었다.
ⓒ 이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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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 관리자는 직원들에게 '애미 애비도 모르고 관리자를 개똥으로 알고 미쳐 날뛴다'는 식의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관리자로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곧잘 직원들에게 내뱉었다. 접수 전화를 걸어온 어느 장애인에게 '도저히 못 알아듣겠으니 말을 똑바로 해 달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거침없는 욕설과 막말로 상처받은 장애인들이 항의도 했지만 그는 지금도 콜센터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현실의 굴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동자의 처지는 애석했다. 상흔의 아픔을 견디는 건 변함없이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내버려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존중 받으며 일해야 한다는 당연한 권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 당연한 행동에는 먼저 용기와 연대가 필요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일할 수 없다는 상담 직원들의 마음이 한데 모여 2013년 5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위탁 운영에 따른 두리발의 부실 운영을 비롯한 노동 문제들을 하나하나 거론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근로 환경 개선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동안 없었던 근속 수당과 명절 상여금이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지급됐다.

"저것들, 어찌 될지도 모르면서 어디 마음대로 한번 해 봐라."

시간이 갈수록 관리자는 보란 듯이 노조원들을 대놓고 적대시 했고 회사와 택시 기사 사이에서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몇몇 상담원들의 이름이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1월, 부산택시조합이 민간에 위탁해 운영하던 두리발 콜센터를 직영체제로 전환하면서 전에 없던 '두리발 총괄본부장' 자리가 신설됐다.

작년까지 부산시 대중교통과 계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공무원이 그 자리에 앉았다. 이 과정에서 콜센터 직원 11명 가운데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상담원들은 모두 고용승계 되었다. 그러나 노조원 출신 4명의 경력직원들은 고용승계 과정에서 서류 미비 등을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이현지씨를 포함한 30대, 50대 상담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회사 측은 "공정한 면접을 거쳐 상담원들을 뽑았다"며 "노조탄압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결국, 지난 8월 그녀의 사회생활은 투쟁이 되었다. 한낱 노동자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밖에 없었다. 사람으로서 제대로 살기 위해 거리로 나와야만 했다.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들어주는 이가 없는 외침은 때때로 공허한 메아리 같았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고 밥을 굶어가며 철야농성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두리발 콜택시의 부산시 직영화, 경력직 상담원의 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했다. 이번 여름, 부산에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다.

"이번에 장애인분들을 직접 만나면서 실상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를 제대로 배우게 됐어요. 콜센터의 노동 환경만큼이나 장애인분들의 이동 문제도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에요. 지금 우리 사회 구조는 알면 알수록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프고 비참한 것 같아요."

사람,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는 언제 올 것인가. 오전 9시, 콜센터 해고 상담원들은 매일 아침 부산택시조합으로 향한다. 불의에 맞서는 그들의 투쟁은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노동조합을 지키는 것, 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다.


태그:#두리발, #감정노동자, #콜센터 , #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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