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진보에겐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이 아닐까 한다. 지난 19일 헌법재판소가 헌정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을 감행했고 그 결정에 따라 통합진보당은 합법적 질서 아래 정당활동을 할 수 없는 불법집단으로 전락했다. 2007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래 가장 폭넓은 진보세력의 정치적 결합체로 출범한 통합진보당은 2012년 부정경선 의혹과 폭력 사태로 내홍을 겪으며 휘청이다 북한 추종성을 이유로 정당해산을 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로인해 진보의 대통합과 정치적 주류세력화를 기대했던 상당수 국민들의 기대 역시 무참히 꺾였고 한국사회의 진보는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더하기 등 여러 군소 정치세력으로 나뉘어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지난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한 이래 한국의 진보세력은 오랜 숙원이던 정치세력화에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비록 몇 차례 크고 작은 분열을 겪기도 했으나 꾸준히 의회로 의원들을 진출시켰고 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이 의미있는 성적표를 받아들기도 했던 것이다. 무상의료와 무상급식 등 복지이슈를 부각시켜 공론화시키는데 성공했고 몇몇 스타 정치인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진보정당의 지난 10여 년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부분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 진보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진단하는 책하지만 2014년 겨울 진보정당이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암담하기 짝이 없다. 한 때 20%에 육박했던 정당 지지율은 곤두박질쳐 그 이름조차 각인시키지 못했고 거듭된 정부의 실정에도 유의미한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지 못할 만큼 폭삭 무너져내린 것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을 거치며 한국 진보의 중심에서 활약해온 노회찬 정의당 대표의 책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는 이처럼 위기에 처한 한국의 진보를 냉철하게 평가하고 진단한다.
책은 노회찬 대표와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의 문답을 통해 진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폭넓게 조명하며 진보의 실패와 약점, 그럼에도 존재하는 가능성까지를 거침없이 풀어낸다. 구영식 기자의 날카로운 물음과 노회찬이란 정치인의 속 깊은 답변이 진보정치의 현안을 아우르고 문제를 진단하며 진보가 나아가야 할 지향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책의 제목인 '어디로 가는가?'의 유래를 밝힌다. 탄압받던 로마에서 도망치던 베드로가 갑자기 나타난 예수에게 물었다는 말,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가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저자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앞날을 물었듯 한국사회에서 무너져버린 진보의 현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그 미래를 묻기에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진보정당이 작지만 작지만은 않은 변화를 이끌고 많은 잘못들을 범한 뒤 다시 어려움에 처했다. 그 사이 유망한 진보정치인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노회찬 대표는 진보의 과오와 한계, 희망에 대해 작심하고 답변한다.
그는 이석기 사태에 대해 언급하며 국민의 요구에 맞춰 발빠르게 변화하지 못한 진보정치의 책임을 묻기도 하고 진보정치의 기본덕목은 실사구시라며 진보가 더욱 세속화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 위에서 현실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미래의 정치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될 것이며 수구보수와 자유주의적 보수의 대립으로 이루어진 작금의 한국정치가 새롭고 재편될 국민적 요구에 직면하리라 예견한다. 나아가 그는 진보의 오늘에 책임있는 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의 실패에 대해 성찰하기도 하고 그가 겪어온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의 과정을 알기 쉽게 풀어놓기도 한다.
노회찬이 바라보는 진보의 미래, '노동'무엇보다 인상적인 지점은 진보의 미래가 노동에 있다고 보는 저자의 시각이다. 진보정당이 스스로의 혁신을 통해 노동권과 고용문제를 해결하는데 역할을 하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복지국가적 이상을 실현하고 사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진보의 지향이다. 그는 노동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민주당의 정치를 통해 구현하기 어렵다며 시대가 진보정치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87년 6월의 민주화와 7,8월의 노동운동이 단절된 것이 지금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만들었다고 보는 저자는 민주주의와 복지의 핵심과제로 노동의 문제를 선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영식 : 지금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강력한 기준은 무엇인가?노회찬 : 요즘으로 따지면 경제민주화다. 시장에서, 특히 노동시장에서 약자의 편에 확실히 서는 것, 재분배를 통해 서민의 편에 확실히 서는 것이 진보다. 노동 보호와 재분배를 강력히 추진하느냐, 아니면 그 불만을 무마하는 수준으로 가느냐를 보면 진보와 보수를 판가름할 수 있다.구영식 : 노 대표가 생각하는 진보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노회찬 : 진보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다. 기회의 균등과 차별의 최소화를 통해 평등을 지향하는 일체의 노력이 진보의 근간을 이룬다.- 본문 중에서책을 읽는 독자는 노회찬이란 한 정치인의 성찰과 통찰을 통해 진보는 물론 한국사회와 정치에 대해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노회찬이 그려낼 앞으로의 진보적 지향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도 있다. 유신독재시절보다 지금이 진보의 더욱 큰 위기라고 주장하는 노회찬이 어떤 진보를 희망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이라면 이 책은 좋은 선택이 되리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노회찬, 구영식 지음 / 비아북 펴냄 / 2014.11. / 1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