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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자 말

힘내요, 다왔어요. 포터가 나를 위로했다.
 힘내요, 다왔어요. 포터가 나를 위로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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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언제나 느렸다. 고등학교 다닐 땐 전교에서 가장 늦은 시간에 등교해 지각 벌을 받기 일쑤였다. 한여름이 가까워져 오도록 혼자 춘추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이제껏 나보다 밥을 느리게 먹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으며 특히 걸음이 느리다. 그렇다고 지금 투정을 부리자는 건 아니다. 느림이란 키가 작은 것처럼, 그저 그런 것뿐인 나의 일부다. 느린 것이 나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오늘까지는.

느릿한 천성이 히말라야 꼭대기까지 쫓아와 내 발목을 부여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나의 속도에 화가 난다. 나를 곤궁에 빠뜨릴 이 느릿함이 두렵다. 나의 느림을 저주한다. 느리게 살라고 설법하던 작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와서 내 꼴 좀 보시게. 여기서도 꼴찌를 면치 못하고 눈밭 위를 기고 있는 꼴이라니. 오늘 해가 지고 나면 난 어디에 있을까. 묵티나트의 산장에서 아찔했던 오늘을 곱씹어보며 평화로운 밤을 보내게 될까. 어디 고꾸라져서 헬리콥터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생은 여기서 끝날까. 무섭다.

더스틴은 내 느림에 괜히 불똥이 튄 격이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날 좋던 이틀 전 쏘롱 라를 넘을 수 있었을 거다. 중년의 미국인 부부 따위 제치고 젊은이의 위용과 체력을 뽐내며 스키 타듯 부드럽게 산을 내릴 수 있었을 거다. 미국인 부부의 모습이 하얀 안갯속으로 사라지자 참지 못한 더스틴이 화를 뿜어냈다.

"빨리 좀 걸어!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몰라? 길이 눈에 다 덮여 있잖아. 길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 발자국이야. 그런 식으로 걷다간 눈 때문에 발자국이 다 지워져 조난을 당한다니까? 죽는다고! 죽고 싶어?"

뭐? 죽는다고!

"안 죽고 싶어! 안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죽음'이란 단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덩달아 화가 난 나는 발악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면 소리를 지를 게 아니라 빨리 걸어야 할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 걸었지만, 나의 최선은 최선이 아니었다. 나의 최선이란 너무나 미약하여 나를, 그리고 죄 없는 더스틴을 궁극의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최악이었다.

최선을 다해 걸었지만, 나의 최선은 최선이 아니었다. 나의 최선이란 너무나 미약하여 나를, 그리고 죄 없는 더스틴을 궁극의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최악이었다.
 최선을 다해 걸었지만, 나의 최선은 최선이 아니었다. 나의 최선이란 너무나 미약하여 나를, 그리고 죄 없는 더스틴을 궁극의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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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날씨도 최악이었다.
 그리고 날씨도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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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썰매와 무릎 스키로 내리는 산길


"쏘롱 라로 올라왔던 길만큼 험한가요?"


이제는 멀어져 버린 야속한 가이드에게 내가 물었다. 아니, 물었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당신이 내 손을 잡아 줬던 벼랑길 있잖아. 그 끔찍한 길. 그런 길이 또 나올 거냐고 묻고 있는 거야. 아니라고 해. 당장.

"음…. 아니요."


자신 없던 가이드의 대답은 사실이었다. 쏘롱 라로 오르는 길보다는 사정이 낫다.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차이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 두 발 앞으로 저주의 벼랑길이 다시 등장했다. 그래. 아까 그 벼랑길보다는 낫네. 길의 폭이 발 하나만큼 더 넓으며, 낭떠러지의 높이가 절반 정도 된다. 아까 그 길이 '죽을 뻔'한 길이라면 이 길은 '초주검이 될' 수 있는 길이올시다.

쏘롱 라에서 묵티나트로 가는 길은 경치가 좋다고 한다. 오늘은 경치 따위 없다.
 쏘롱 라에서 묵티나트로 가는 길은 경치가 좋다고 한다. 오늘은 경치 따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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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풍경은 이런거다. 눈, 눈, 그리고 눈
 내가 본 풍경은 이런거다. 눈, 눈, 그리고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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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길을 노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뒤에서 허연 입김을 뿜고 있던 더스틴이 10m 길이의 좁은 길을 눈도 끔쩍 안 하고 걸어가 버렸다. 포카라 한국 식당에서 빌린 다 떨어진 등산화가 반 템포씩 엇박자를 치며 더스틴의 발걸음을 쫓아갔다.

애초에 발을 구겨 넣기도 어렵게 헤져 있던 등산화는 안나푸르나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사이 밑창이 반쯤 떨어져 나갔다. 발을 들어 올릴 때마다 헤진 밑창이 누굴 놀리듯 입을 헤 벌리고 덜렁거렸다. 그래. 저런 신발을 신고도 걷는데. 못할 거 없지. 어디 나도 한 번. 길의 간을 보기 위해 한 발을 내디뎠다. 역시 안 되겠는걸.

"이 아랫길로 걸으면 어떨 거 같아?"


길 옆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푹신한 눈이 쌓여 있었다. 얼어붙은 좁은 길보다는 사정이 나아 보인다. 적어도 미끄럽지는 않을 거 아니야. 눈이 푹푹 밟히면 다리를 지탱하기도 수월할 거고. 안 그래?

"안 그래. 눈이 어느 정도 쌓였는지도 모르는데 들어갔다가 확 빠질지도 몰라. 매우 위험. 절대 안 돼."


그런가. 다시 얼음 길 위로 발을 올렸다. 음…. 못하겠다.

"길이 너무 좁아. 땡땡 얼었는데? 분명히 나자빠질 거야. 눈 위로 걸을래."
"위험하다니까 왜 고집이야!


야! 무서워 죽겠는데 왜 소리는 질러! 네가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고 내가 여길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못해! 못한다고!

"수지. 왜 그렇게 겁이 많아. 그냥 걸어와. 여기서 떨어져 봤자 죽지 않아. 고작해야 팔다리 부러지는 정도라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지금 이 상황에선 팔다리 정도 부러지는 건 대수도 아니야.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가 해라도 지면,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우리 둘만 남으면, 그게 훨씬 더 위험하다고!"


네 말이 맞다. 그래 봤자 난 겁쟁이다. 난 롤러코스터도 못 타고 스키도 못 타며 어렸을 땐 그네나 시소 따위도 제대로 못 탔던 사람이다. 해가 지건 조난을 당하건 모르겠고, 못한다. 팔다리 따위라고 하지 마라. 난 죽기도 싫지만 팔다리 부러지는 것도 싫다.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느니 이 자리에 꼿꼿이 서서 망부석이 되겠다. 아니, 남편인 넌 가버릴 테니 망부석도 못되나.

기어가자. 차가운 눈 위에 주저앉았다. 장갑을 낀 양손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힘껏 미끄러뜨렸다.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10m를 기었다. 그리고 외쳤다.

"화장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간 떨리는 벼랑길을 건너자마자 긴장이 풀린 몸이 긴급신호를 보냈다. 고산병 약의 부작용이다. 이뇨작용으로 어제부터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는 일이 잦았다. 묵티나트에 닿기 전까지 화장실은 어림도 없다. 그럼 참고 가? 그건 더 어림없다. 어차피 더스틴 말고는 아무도 없잖아. 나를 골탕먹이고 있는 이 눈 따위 더럽혀 버리겠어…. 그렇게…. 일을 치렀다. 고도 5000m 설산 위에서 일을 보는 짜릿하고 신선한 경험, 나름 괜찮을 것 같은가?

하나도 안 괜찮다.

엉덩이 썰매를 타고 길을 건너는 꼴사나운 내모습
 엉덩이 썰매를 타고 길을 건너는 꼴사나운 내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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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티나트로 이어지는 길은 쏘롱 라로 오르는 길보다는 사정이 낫다.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차이로.
 묵티나트로 이어지는 길은 쏘롱 라로 오르는 길보다는 사정이 낫다.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차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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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한 번씩 절벽이 등장했다. 이건 뭐 슈퍼마리오 게임도 아니고. 마리오처럼 점프로 절벽을 뛰어넘을 능력이 없는 못난 나는 벼랑길이 나올 때마다 차가운 길에 엉덩이를 내리밀며 위기를 모면했다. 세 번째 엉덩이 밀기를 하고 있는데 화가 치밀어올랐다. 엉덩이 밀기도 한두 번이지. 어? 이젠 지긋지긋해. 고산병 한 번 앓았으면 된 거 아니야? 위험천만한 짓도 한두 번 아니냐고. 이제 좀 나를 내버려둬!

투덜대는 내 앞에 히말라야가 내놓은 건 더 좁고, 더 얼어붙었으며, 더 경사진 벼랑길이었다. 너무 좁은 나머지 엉덩이를 들이밀기도 어렵다. 그래. 넌 미끄러워라. 난 건넌다. 두려움은 창의력을 종용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면,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면, 생각하라.

나는 엉덩이 대신 두 무릎을 꿇었다. 오른쪽 다리는 바닥에 깔고, 왼쪽 무릎은 위로 세웠다. 바닥에 깐 무릎은 기어, 위로 세운 무릎과 그 옆에 꽂은 대나무 스틱은 브레이크다. 바닥에 깐 무릎을 앞으로 밀며, 왼쪽 무릎과 스틱으로 중심을 잡았다. 좀 전까지는 엉덩이 썰매였다면, 이번엔 무릎 스키다.

두렵고 초조하고 서럽고 춥고 짜증 난다. 화가 난다. 그리고 우습다. 내 꼴을 그려봐.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하 도움도 되지 않는 대나무 스틱을 얼음 위에 꽂고 한 번에 10cm씩 겨우 기어가는 모습. 스스로를 처연해하다, 다시 한 번 화가 치밀어올랐다. 방언처럼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xx 욕 기타 등등)…! 오늘이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반대편에서 추한 꼴을 관람 중이던 더스틴. 나의 욕 방언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것도 모자라 사진을 찍는다. 야! 난 지금 인생 최악의 순간을 통과 중인데 웃어! 사진을 찍어! 씩씩대던 소리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울음도 배어 나왔다. 인생 최악의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나라는 인간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고군분투 중인 눈물겨운 내 모습. 울고있는 나를 더스틴이 찍었다. 웃으면서.
 고군분투 중인 눈물겨운 내 모습. 울고있는 나를 더스틴이 찍었다.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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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의 나
 눈 위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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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씨에 웬 문짝? 포터와 마주하다


벼랑길 여정은 끝이 없다. 한참을 내려가다, 엉덩이 썰매를 타다, 무릎 스키를 타기를 반복했다. 또다시 등장한 지긋지긋한 낭떠러지 길을 노려보며 욕을 중얼대고 있는데, 움직인다. 무언가 움직인다.

사람이다.

사람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반대 방향에서였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묵티나트로 내려가는 게 아니고, 쏘롱 라 방향으로 오르고 있었다. 포터들이다. 등에는 커다란 것이 달려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 문짝. 중요한 문짝인가 싶어 곰곰이 들여다봤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별로 중요해 보이는 물건은 아니다.

남이 지고 가는 문짝을 중요하다느니 안 중요하다느니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나름 분명한 건 지금 이 날씨에 목숨을 걸고 운반해야 할 만큼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거다. 쏘롱 라는 고도 자체로도 고산병에 노출되지만, 묵티나트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고도 차이가 심해서 그 위험이 훨씬 크다.

그게 다가 아니지. 오늘 날씨. 매일같이 쏘롱 라를 지키는 티숍 주인장도 냅다 도망쳐 버린 험한 날씨에, 눈 덮인 얼음길을, 산길을, 고도 5000m를, 쏘롱 라를, 고작 저 문짝이나 나르자고 넘고 있는 게 지금 말이나 되는가?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쏘롱 라에 마을 따위는 없으니 적어도 토롱 페디까지 가는 길일 텐데, 해 지기 전에나 갈 수 있을까? 저 거대한 짐을 이고 아슬아슬한 빙판길을 수차례 건너면서?

문짝을 나르는 포터들
 문짝을 나르는 포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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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씨에, 눈 덮인 얼음길을, 산길을, 고도 5,000m를, 쏘롱 라를, 고작 문짝이나 나르자고 넘고 있는 게 지금 말이나 되는가?
 이 날씨에, 눈 덮인 얼음길을, 산길을, 고도 5,000m를, 쏘롱 라를, 고작 문짝이나 나르자고 넘고 있는 게 지금 말이나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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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났다. 저 짐짝을 옮겨 달라고 주문한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이야? 굳이 이런 날씨에 이 험한 길을 걸어 옮겨야 할 만큼 중요한 물건이니? 포터 목숨은 목숨도 아닌 거야? 아무리 현지인이고 익숙한 길이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하루 정도 기다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알지도 못하는 문짝 주문자에 열이 올랐다. 누구는 거대한 문짝을 짊어지고도 잘만 걷는데, 고작 5kg짜리 배낭 하나 메고 자기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 열이 더 올랐다.

나마스떼(네팔어 인사말). 포터들이 인사한다. 나마스떼의 속 뜻은 '내 안에 깃든 성스러운 신성이 당신 안에 깃든 성스러운 신성께 경배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 당신의 신성이라니. 자기 신에게 매달리기에도 똥줄이 탈 마당에 내 신성 챙길 정신이 있나. 눈 위를 조심스럽게 걷던 포터 두 명이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기도깃발도 얼어붙었다.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다.
 기도깃발도 얼어붙었다.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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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사람이라고 모두 히말라야를 올라 본 건 아니다. 히말라야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훨씬 많다.
 네팔 사람이라고 모두 히말라야를 올라 본 건 아니다. 히말라야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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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후. 포터의 행렬이 다시 이어졌다. 역시 쏘롱 라 방향으로 오르고 있다. 대체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야. 뭘 하겠다는 거야. 굳이 오늘같이 거지 같은 날을 골라 문짝 따위를 나를 건 뭐냐고.

뭐긴. 돈 때문이지. 뭐 부자가 되자는 건 아닐 테고 생계를 유지할 돈. 날씨 좋은 날 받을 돈보다는 좀 더 두둑한 돈. 그래. 현지인이잖아. 쏘롱 라 같은 거야 매일 오를 테니, 무거운 짐도 매일 나를 테니, 괜찮겠지.

"전 네팔이 고향이지만, 히말라야를 본 적도, 가본 적도 없어요."


숨 가쁘게 이어지는 포터들의 허연 입김을 망연히 바라보다, 서울의 네팔 음식점에서 만난 요리사 미노의 말이 생각났다. 미노는 네팔 사람이라고 모두 히말라야를 올라 본 건 아니라고 했다. 아니, 안 올라 본 사람이 훨씬 많다고 했다.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자기 같은 저지대 농부 출신들이 돈을 벌기 위해 히말라야로 가 포터 일을 한다고 했다. 우리처럼 고도와 험한 산길과 눈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들이 포터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고산병, 눈길, 날씨에 관한 한, 지금 내가 가진 두려움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 사람들이다. 어처구니없이 커다란 짐을 이고 내 눈앞으로 걷고 있는 이 사람들.

장비라도 제대로 되어 있으면 몰라. 나는 대나무 작대기라도 있지. 등에 얹은 짐을 받쳐야 하니, 포터들은 등산 스틱은커녕 등산 스틱을 쥘 손도 없다. 이 추운 날씨에 제대로 된 의복도 없다. 장비도 없지만 경비도 없다. 장기간 산을 오르는 데 필요한 돈, 음식 값과 숙박 값 따위. 여행사에서 충분한 임금을 제공하지 않다 보니, 어떻게든 남는 장사를 해야 하는 포터는 영양 부족 상태로 산에 오른다.

히말라야를 비롯한 페루의 잉카 트레킹,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와 같이 난도 높은 산간지역에서 포터의 사망률은 트레커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 심한 경우 사고 발생 시 트레커만 구조하고 포터는 두고 간다. 왜? 트레커는 돈이 있고, 포터는 돈이 없으니까.

내 세계는 조금씩 넓어진다. 한치를 걷고 나서야 다음 한치가 겨우 보이는 이길처럼.
 내 세계는 조금씩 넓어진다. 한치를 걷고 나서야 다음 한치가 겨우 보이는 이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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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다. 돈 때문에 목숨 값이 싸고 비싸지는 세상. 세상이 이쯤 발전했으면 몸값 일값 매기는 일도 좀 우아해지면 좋으련만. 아니. 세상이 이쯤 발전했다는 것 자체가 내 환상인가. 이쯤 밥 먹고 살면 다른 것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길 바라는 건 내 환상인가. 포터의 노동비가 올라가면 여행경비도 비싸질 테고, 그러면 난 또 그런대로 투덜거리겠지. 그러면서 포터의 노동비 운운하고 있는 건 웃기는 일인가.

아니. 이제라도 네팔의 포터들에 대해 생각하는 건 우스운 일이 아니다.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 세계가. 존재 자체도 모르던 포터를 만나고, 또 그들의 삶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건, 딱 그만큼 내 세계가 넓어진 것이다.

그렇게 넓어진 세계에서 난, 포터가 등에 진 짐의 무게, 헌 신발, 추위로 얼어붙은 얼굴에 대해. 임금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그를 맞을 가족, 빠듯하게 쓰일 월급 따위에 대해 잠시 상상해 보는 것이다. 나와 다를 게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전히 세계는 점점 나빠지겠지만, 내 세계가 나빠질 때마다 히말라야에서 만났던 포터도 한 번 떠올려보곤 하는 것이다.

"힘내요. 거의 다 왔어요."

포터가 우리를 응원했다. 포터도 잠시 상상했나 보다. 낯선 고도와 험한 날씨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고통. 우리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해봅시다. 우리는 묵티나트로, 당신들은 쏘롱 라로. 씩씩하게 갑시다. 오늘 하루, 조금 넓어진 내 세계 속으로 들어온 당신들. 미국인 부부와 가이드, 그리고 포터들. 절대로 다치지 마요.

"이 소리 들려?"

두려움에 떨다, 서러움에 복받치다, 자지러지게 웃다 욕을 내뱉기를 무한 반복. 짤랑.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라니. 한나절을 미친 사람처럼 걷다 보니 이젠 정말 미쳐 버린 것인가.

짤랑. 다시 들린다. 진짜 종소리다. 산양이다. 산양이 모여 있는 곳에선 저런 종소리가 들리곤 했어. 마을이 가까워졌나. 발에 채던 눈도 얄팍해졌다. 언뜻 사람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눈앞을 답답하게 가로막던 안개도 이젠 없다. 눈을 찌푸려 초점을 맞췄다. 마을이 보인다. 묵티나트다.

종소리가 들렸다. 발에 채던 눈도 얄팍해졌다. 언뜻 사람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눈앞을 답답하게 가로막던 안개도 이젠 없다. 눈을 찌푸려 초점을 맞췄다. 마을이 보인다. 묵티나트다.
 종소리가 들렸다. 발에 채던 눈도 얄팍해졌다. 언뜻 사람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눈앞을 답답하게 가로막던 안개도 이젠 없다. 눈을 찌푸려 초점을 맞췄다. 마을이 보인다. 묵티나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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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티나트 가는 길
 묵티나트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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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깊고 아찔한 낭떠러지 위로 걸쳐진 흔들다리를 두 번 건너, 가파른 바윗길을 걸어 내려갔다. 묵티나트 마을 현판이 보였다. '웰컴 투 묵티나트.' 뒤를 돌아봤다. 쏘롱 라는 아직 눈과 안갯속에 고요히 서 있다. 쏘롱 라는 이제 지나온 길이 되었다.

지난밤 가이드 시바가 추천한 '밥 말리' 호텔로 들어갔다. 나무문을 열자 어둠이 새어나왔다.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우리 쪽을 향했다. 온종일 하얀 눈만 바라보던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어둠 대신,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토롱 페디에서 만난 미국인 제이와 제인. 하이캠프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에드와 스페인에서 온 조르디. 이스라엘인 아멧과 80세 영국 할아버지 클리포드다. 가이드 시바가 계단에서 내려오다 우리를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우리는 오랜 친구 사이처럼, 서로를 안았다. 이 산에서 내려가면 다신 볼 수 없을 테지만, 한 번 두 번 스친 인연이지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무사 귀환을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다시 만났다. 난, 우리는, 진심으로 기쁘다.

묵티나트 마을 현판
 묵티나트 마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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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롱 라는 아직 눈과 안갯속에 고요히 서 있다. 쏘롱 라는 이제 지나온 길이 되었다.
 쏘롱 라는 아직 눈과 안갯속에 고요히 서 있다. 쏘롱 라는 이제 지나온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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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배고프죠? 여기 음식 끝내줘요. 아무거나 시켜봐요."

시바가 메뉴판을 직접 가져다주며 말했다. 애플 팬케이크, 피자, 토마토 스파게티, 치킨 리소토(리조토)…. 여긴 천국인가. 열 페이지가 넘는 메뉴판엔 히말라야 산장 식당에는 어울리지 않는 메뉴들이 가득했다. 메뉴를 훑으며 내가 기억하는 이런저런 음식의 맛을 떠올리고 있자니 허기가 배 중심에서부터 손가락 마디까지 당돌하게 달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종일 배도 안 고팠네. 고산병 증세도 없었고. 다리가 피곤하다거나, 배낭이 무겁다거나, 몸이 춥다거나. 몸의 이런저런 자잘한 투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건, 그나마 다행인가.

묵티나트
 묵티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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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오…!"
"진짜 맛있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리소토 중 최고야."
"동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 않나. 그 속에 있을 땐 너무나 두렵던 쏘롱 라. 묵티나트 산장 테라스에서, 세계 제일의 리소토를 맛보며 바라보는 지금은 이렇게 아름답기만 하다.

오늘 나는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맛보았다. 순간 속에선 최악이었지만, 순간을 돌아보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인생 최고의 날이었던 것도 같다. 나는 살아남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나와 함께 먼 길을 걸어준 더스틴이 내 옆에 있고, 세계 최고의 치킨 리소토가 허기를 달래주고 있으며,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실이 있다.

뒷일은 모르겠고.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예스라고 답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겠다. 난 지금, 미친 듯이 행복하다.

묵티나트. 평화다.
 묵티나트.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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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히말라야, #쏘롱 라, #안나푸르나, #네팔, #묵티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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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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