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산수국꽃으로 보석처럼 화려하고 솜사탕처럼 풍성하게 피는 꽃이다.
 산수국꽃으로 보석처럼 화려하고 솜사탕처럼 풍성하게 피는 꽃이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관련사진보기


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

우리 일행은 넓디 넓은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는 항일 유적지를 열하루 만에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고 귀국했다. 귀국 후 나는 한동안 멍했다. 아마도 늘그막에 새로운 세계를 본 탓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그제야 장님이 눈을 뜬 기분이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독립 운동사에 까막눈이었던 내가 짧은 시일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멍하고, 그 경이로움에 얼떨떨했을 것이다.

특히 연변대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의 말씀은 두고두고 내 폐부를 찔렀다.

"요즘 젊은이들은 역사를 너무 모르고 있어요. 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입니다. 모름지기 민족에 대한 자호감(自豪感,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이 있어야만 젊은이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웁니다. 남조선에서는 위만군(만주군) 출신들이 전과(前過)에 대한 참회도 없이 사회 각계 지도자가 되고, 심지어 가장 악질 친일파였던 간도 특설대 출신조차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지요.

그런 자가 영웅 대접을 받는다면 그 자들 총칼에 돌아가신 조선의 독립 지사들은 뭡니까? 그런 사회에 무슨 정의가 있습니까? 아마도 하늘에 계신 선열들은 눈도 감지 못하고 통탄하실 겁니다. 이는 선열들의 독립투쟁사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기성 세대의 책임입니다."

나는 이제 막 독립운동사를 배우는, 걸음마를 하는 어린이처럼 그분에게 물었다. 아래는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연변대 민족연구소 박창욱 소장
 연변대 민족연구소 박창욱 소장
ⓒ 박도

관련사진보기


- 선생님, 기록에 따르면 1920년대 이후 만주로 이주해 온 젊은이들이 공산당에 많이 입당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당시 대다수는 항일의 한 방법으로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거나, 당시 유행병처럼 번진 ML(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휩쓸린 탓입니다. 애초부터 무슨 대단한 이념으로 입당한 게 아닙니다. 특히 코민테른은 중국의 소수 민족에게 해방이 되면 토지와 자치권을 준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고무되어 소작인 계급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겁니다. 해방 후 냉전의 시각으로 그때를 봐서는 안 됩니다. 한 예로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혁명군 제2사 최윤구 사령은 항일을 하기 위해 60명의 대원을 이끌고 동북 항일연군 제1로군에 정식으로 가입해 끝까지 일제와 투쟁했습니다."

- 1919년 3·1 독립 만세 이후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들불처럼 번졌던 무장 항일투쟁이 1930년대에 들어와서 침체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괴뢰 만주국을 세운 후 대대적인 토벌 작전(일명 빗질 토벌)으로 독립 투사 가운데 일부는 지하로 숨거나 본국으로 잠입했고, 또 일부는 상해로 가거나 일제에 투항했지요. 하지만 또 다른 독립 투사들은 중국 공산당과 연합해 항일반만(抗日反滿, 일제에 항거하고 괴뢰만주국에 반대함) 전선을 형성해 동북항일연군으로 눈부신 공을 세우며 해방될 때까지 오히려 중국인민보다 더 줄기차게 투쟁했습니다. 허형식 장군도 그 가운데 한 분이지요."

'민족해방운동사' 가르쳐야

헤이룽장성 빈현 가는 길에서 만난 소를 몰고가는 농부
 헤이룽장성 빈현 가는 길에서 만난 소를 몰고가는 농부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독립운동사 관련 문헌을 섭렵한 뒤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를 집필했다. 집필한 지 10개월 만에 탈고했다. 다행히 한 출판사에서 원고를 받아줬다. 출판사는 내게 가능한 한 고명한 역사학자의 추천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래서 대학 시절 강의를 들은 바 있는 강만길 교수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강 교수님은 그새 정년퇴직을 하시고 성북동에 '여사서실(黎史書室)' 연구실을 낸 뒤 <내일을 여는 역사>라는 역사 잡지를 발간하셨다. 나는 강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지 30년이 지난 타과 학생이었지만, 내 이름이 별난 탓인지 다행히 기억해 주셨고, 그날 동행한 애제자 이범증(전 중앙중 교장, 석주 이상룡 증손) 선생 덕분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여신 뒤 대화를 나눴다.

나는 답사 기간 중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 장군을 만난 것이 가장 뿌듯했다는 얘기를 한 뒤, 동향으로 그때까지 그 분을 알지 못했던 것이 참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건 박 선생 잘못이 아닙니다. 크게는 대한민국 전체가, 좁게는 우리 역사학계의 잘못이지요. 남의 강제 지배에서 벗어난 민족 사회는 당연히 전체 교육 과정에서 '민족 해방 운동사'를 따로 가르쳐야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사 학계가 196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독립 운동사가 일부 연구되고, 교육됐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분단 상황 때문에 우익 독립 운동사에 한정되었고, 현장 중의 현장인 중국과 내왕이 전혀 불가능한 조건에서 연구되고 쓰였지요."

강 교수님은 허형식 장군에 대해서도 잘 아셨다.

"허형식 군장이 1942년에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해방 후 북한 정권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인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소련이 상당히 주목했던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향이라는 점은 참 재미있군요. 한 사람은 동지를 살리고자 자기 목숨을 희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조직한 동지들을 고자질하고 살아난 인물이고..."
"..."

도원결의

하얼빈의 두 원로 사학자. 서명훈(왼쪽) 선생과 김우종 선생(2009. 10. 촬영)
 하얼빈의 두 원로 사학자. 서명훈(왼쪽) 선생과 김우종 선생(2009. 10. 촬영)
ⓒ 박도

관련사진보기


그 해(2000년) 여름, 성균관대 동아시아연구소 장세윤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허형식 장군을 국내 신문에 최초로 보도한 대한 매일의 정운현 기자를 만나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분의 저서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를 읽은 바가 있기에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고 했다. 곧 우리 세 사람은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장 박사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날의 만남은 마치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난 '도원결의'처럼 이후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그날 만남에서 얻은 허형식 자료인 1999년 8월 14일자의 대한매일신문의 기사 "만주 항일영웅 허극(허형식의 이명)은 한국인"과 연변의 소설가 유순호의 "만주 항일파르티잔의 제일가는 별", 그리고 조선족혁명열사전의 <허형식>은 내게는 '위편삼절(韋編三絶)과 같은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나는 그런 자료를 보면 볼수록 더욱 목이 말랐다. 그래서 허형식 장군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자, 또한 그분 순국지에 찾아가 묵념을 드리는 것이 동향 출신 한 문사로서 최소한 예의요, 그동안 부끄러움을 면하는 일일 것 같아 마침내 헤이룽장 성 희생지를 답사키로 했다.

애초에는 그곳 지리에 밝은 김중생 선생님과 동행하려 했으나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았고, 여비도 만만치 않아 혼자 떠나기로 했다. 그동안 나의 답사 여행 체험에 따르면 혼자 미지의 곳으로 떠나면 지리나 언어를 몰라 방황도 하지만, 그 대신 자유로움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지난해 하얼빈에서 서명훈 선생과 안면은 텄고, 그분의 명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 장세윤 박사를 통해 중국 공산당흑룡강성 당사연구소장이며 작가인 김우종 선생의 주소를 알아 두 분에게 편지를 썼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들꽃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