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꽃> 해제 |
|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망국의 한 내가 늦게 우리 역사, 특히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통탄한 점은 국난의 고비마다 자주성 없이 외세에 휘둘려 총 한 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한 채 나라를 잃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시 나라를 온전히 되찾을 천재일우의 기간에도 또 다시 외세에 놀아나 끝내 나라가 분단이 되었다는 안타까움이다.
일찍이 이 나라는 아득한 옛날부터 친원파다, 친명파다 하여 국론이 분열된 가운데 사대부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좌고우면 강대국에 줄서기에 바빴다. 그런 악습은 계속 이어져 조선말에는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한반도는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결국 나라마저 이웃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한 시인은 외세에 휘둘려 나라가 망한 한(恨)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號哭)하리라. - 조지훈의 '봉황수(鳳凰愁)' <문장> (1940) 하지만 연합국의 승전으로 참으로 어렵게 맞은 조국 해방의 공간에서도 다시 친미를 대표하는 극우파와 친소를 상징하는 극좌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런 가운데 조국의 분단만은 막아야겠다고 좌우합작으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던 여운형, 김규식 등 중간파는 끝내 암살 당하거나 제거되고 말았다. 끝내 극우와 극좌는 친미, 친소 두 동강난 나라를 세운 뒤 이후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쟁을 불러일으켜 수백만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미군정청 여론조사1945년 해방 후부터 1948년 단독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민의는 공산주의 국가도, 자본주의 국가도 아닌 사회주의 국가였다.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파들은 일단 좌우합작의 조국을 세운 뒤 장차 민의에 따른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한 그 무렵으로서는 그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 당시 미군정청여론조사국에서 조사한 보도다.
군정청여론조사국에서는 조선인민이 어떤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가를 규찰하기 위하여 30항목의 설문을 열거하고 여론을 조사하였는데 설문에 반영된 민의는 다음과 같다. [문 1] 일신상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가) 생활안정을 실현할 기회 3,473인(41%) (나) 정치적 자유 4,669인(55%) (다) 모릅니다 311인(4%) [문 2] 귀하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어느 것입니까? (가) 개인독재(민의와는 무관계) 219인(3%) (나) 수인독재(민의와는 무관계) 323인(4%) (다) 계급독재(타 계급의 의지와는 무관계) 237인(3%)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7,221인(85%) (마) 모릅니다 453인(5%)[문 3]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릅니다 653인(8%) - 동아일보 1946. 8. 13.이 여론조사에서 볼 때 해방 후 민의에 따른 새나라는 중도통합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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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얼빈 조린공원으로 원래 하얼빈공원을 항일연군 이조린을 추모하고자 이름을 바꿨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른 아침 산책을 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할 거사계획을 가다듬은 곳이다. |
| ⓒ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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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타고 오는 초인' 역사의 가정은 어리석을지언정, 만일 허형식과 같은 인물이 살아 해방정국을 주도했으면 이 나라 운명은 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근거로 그분은 항일동지들이 러시아로 월경하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그분이 끝내 만주의 동포와 인민을 버리지 않은 것은 외세(일본)를 제거하고자 또 다른 외세(소련)의 힘을 빌리면 끝내 자주국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 젊은 나이에도 미리 알고서 끝내 자주성을 지킨 점이다. 이러한 그의 위대한 점을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연변작가 류순호도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제일가는 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도 흑룡강지방을 나가면 허극(허형식의 이명)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지 않게 얻어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허극에 대해 회고할 수 있는 생존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월이 가고 있고 지난 역사도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 물론 조상지의 기념관에 가면 어느 한 구석에 그의 전우, 동지로서 허극의 초상화도 함께 모셔져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최후로 동북항일연군의 제3군 군장과 제3로군 총참모장직까지 담임한 바 있는 허극의 위용에 대하여서는 어떤 사람들도 시비가 없다. 비록 그가 가담해서 싸웠던 동북항일연군이 공산계열의 중공당 조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상은 공산주의 혁명보다 자기 조국의 독립이었고, 일본군 패망과 함께 자기의 조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는 떳떳하게 동북항일연군의 역사에서 빛나는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참으로 의병 후예답게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한인들 속에 제일가는 기수로서, 별로서 빛을 뿌리고 있다. -류순호(연변작가) 작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제일가는 별>에서 나는 허형식이 "그의 이상은 공산주의 혁명보다 자기 조국의 독립이었고, 일본군 패망과 함께 자기의 조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라는 이 한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을 알게 되면서 더욱 그분을 열렬히 흠모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이 진정한 금오산이 낳은, 내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인물이요, 그리고 일찍이 이육사가 노래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이 세상에 알리는 소명으로 다시 길을 떠나고자했다.
나는 하얼빈에 사시는 서명훈·김우종 두 분 선생에게 편지로 다음 세 가지 점을 부탁했다.
첫째, 허형식 열사께서 주로 거주하였던 빈현 일대와 전사하신 경안현 청봉령을 비롯한 주요 전투지를 답사하고 싶다. 두 분께서 저와 그곳을 동행해 주시면 그지없는 영광으로 알겠으나 만일 여의치 못하면 현지 지리에 밝은 조선족 동포를 소개해 달라.
둘째, 동북항일연군에 참전하셨던 분(가능한 李敏 여사), 그 방면에 대해 잘 아시는 역사학자나 공산당원 또는 조선 역사에 조예가 깊은 분을 만나게 해 달라.
셋째, 동북에서 발간된 동북항일투쟁사나 조선족항일열사전과 같은 책을 구해 달라.
넷째, 하얼빈 시내 중급 정도로 우리말이 통하는 빈관(숙소)이나 민박집을 물색해 달라.
편지를 띄운 뒤 열흘 후 중국 하얼빈 김우종 선생 댁으로 전화했다. 이미 내 편지를 받아 읽고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시면서 조금도 현지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 편히 오라고 일렀다.
두 선생사실 그 전 해 서 선생은 하얼빈 역,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동북열사기념관 등을 우리 일행에게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고, 정확하게 안내해 주셨다. 나는 그날 바쁜 일정으로 점심 대접도 못하고 떠나오면서 사례금을 봉투에 담아 드렸다. 하지만 서 선생은 극구 사양하고는 끝내 떠나는 차창 안으로 돈을 넣은 봉투를 던지셨다. 그때 동행 김중생 선생은 나에게 말했다.
"저 분의 자존심은 대단한 분입니다. 돈 몇 푼 받자고 안내해준 게 아닙니다."나는 그 일로 서명훈 선생은 달리 보게 되었다.
2000년 8월 17일 나는 마침내 김포공항에서 하얼빈 행 여객기에 탑승했다. 오전 10시 3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오전 11시 30분에 하얼빈 공항에 닿았다. 시간으로는 1시간 조금 못 미쳤지만, 중국과 시차로 두 시간 조금 덜 걸린 셈이었다. 하얼빈 공항 도착 대합실에는 내 이름 팻말을 든 한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동포 김택현으로 서명훈 선생이 보낸 사람으로 하얼빈에서 자가용으로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서 오는 손님을 안내하는 기사였다.
서명훈 선생과 김우종 선생은 그날 조선문화궁전(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기에 공항에 나오지 못하였다며 그는 그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곧 조선문화궁전에서 서명훈 선생과 1년 만에 다시 만난 기쁨을 나누고, 초면의 김우종 선생과도 인사를 나눴다.
김우종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목단강조선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그 즈음에는 흑룡강성 성위 당사연구소 소장이었다. 바로 중국 공산당 핵심 당원이 아닌가. 그분은 내 선입관과는 달리 앞이마가 벗겨진 마음씨 좋은 예사 할아버지였다. 내가 그런 첫인상을 말하며 경계심을 풀자 옆의 서명훈 선생이 말했다.
"내가 남조선 포항에 가서 집안 손자를 만났는데, 그 녀석이 내 머리를 유심히 쳐다보면서 그러더군요. '할아버지 머리에 뿔이 없다'고요."그 말에 네 사람은 크게 웃었다. 우리는 거기서 가까운 밥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답사 일정을 짰다. 다음 날은 빈현 답사하고 그 다음 날은 허형식 군장이 희생된 경안현 희생비를 찾기로 하고 김택현씨 차를 떠날 때까지 이용키로 했다. 그는 하루 차량 이용비와 통역 및 봉사료 800위안을 요구했는데, 나는 모두 2000위안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그 이튿날 내가 하얼빈을 떠날 때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했다.
김우종 선생은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한 리민 여사에게 연락했으나 그분은 허형식 군장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어 잘 모른다는 말과 함께 하필이면 내가 방문하는 시기에 자녀들과 남쪽으로 여행을 가기에 유감스럽게 참석 못했다는 사유를 말했다. 허형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날 빈현에서 돌아온 뒤 중앙대가 모던호텔 찻집에서 나누자고 약속한 뒤 서명훈 선생이 알선해 준 도리구 경위가에 있는 민박집으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나는 여장을 푼 뒤 혼자 조린 공원으로 갔다. 그곳은 원래 하얼빈공원으로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른 아침 산책하면서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할 계획을 세우던 곳이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