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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함을 넘어 사랑하는 일도 때로는 심드렁해질 때가 있다. 딱히 명확한 이유가 없는데도 무엇이든지 그다지 신이 나지 않는 시간. 장기 여행자들에게 이런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 민박집에서 만난 한 한국인 친구는 "성당 같은 것, 이제 보기만 해도 신물이 넘어 와요"라는 짧은 문장으로 권태로운 심정들을 요약해버렸지만, 나 또한 이해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2012년 여름, 한 달 일정으로 찾은 유럽에서의 일이다. 여행 초반만큼 그리 서두르는 일 없이 늦은 식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이 시간을 다른 재미난 일들로 채워볼 수는 없을까를 고민했다. 그럴 듯한 아이디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이미 식사를 마친 두 아가씨들이 커다란 가방에 이런 저런 물건들을 담더니, 도화지 크기의 종이 위에 독어로 "학생이라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자 이렇게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적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직접 물어보니 유럽에서 노점을 해서 여행 경비에 보태고자 미리 한국에서 물건들을 사가지고 들어왔고, 오늘은 조금 일찍 광장으로 나가서 이것들을 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유럽에서 장사를요? 그것도 노점을 한다고요? 그러다가 잡혀가면 어떻게 하려고요?"
"하하. 잡혀가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이미 프랑스에서 하고 왔는데 아무 일도 없었는 걸요. 하하. 더군다나 저희처럼 가방 하나 분량의 소소한 노점상들은 애당초 신경 쓰지도 않아요. 한 번은 경찰이 보고서도 그냥 웃고 가더라고요."

이미 호기심이 시작된 나로서는 질문들을 계속 이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도대체 누가, 왜 생각해 낸 거예요?"
"저희 가요. 사실 유럽에 와서 우리가 돈을 써야만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여행을 통해 돈을 벌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방법을 찾게 되고 또 실제로 와서 해보니까 생각보다 재밌어요. 저희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이 한복 입은 열쇠고리 인형, 전통 문양의 부채, 뭐 그런 것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은근히 한국의 문화도 알리게 되는 거예요. 어차피 이들 나라에서 돈 쓰러 온 것은 맞지만, 아직 학생이더라도 부모님 카드를 들고 오고 싶지는 않았어요. 게다가 이 일을 해보면서 얻은 소중한 경험들도 너무 많거든요."

재미난 에피소드라도 생각이 났는지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이쯤에 이르자, 나에게도 더 이상 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두 번 고민도 없이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되요? 피해 드리지 않을게요. 어차피 저는 한국에서 사 가지고 온 물건이 없으니까 상품이 겹치는 일도 없거든요. 그냥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유럽에서 사둔 것이 있는데 그거라도 가지고 나가보고 싶어요"라고 물었더니 선뜻 "뭐 저희는 상관없어요. 호호. 오고 싶으면 오셔도 되요"라고 바로 허락을 해주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에서 노점 하던 모습
▲ 노점 하는 모습 독일 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에서 노점 하던 모습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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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생전 처음 해보게 되는 노점 장사가 시작되었다. 일단 광장의 한 끝에 자리를 마련하고는 허술하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우리의 상품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흔한 나무 판대도 없이 그대로 땅바닥에 물건들을 내려놓고는 세 한국인 처자 역시 그곳에 주저앉았다.

광장을 걷던 사람들은 "뭐야?" 하는 표정으로 우리 쪽을 응시하며 지나가고 멀리서 어느 한 상점 주인이 우리와 눈을 마주쳤지만 무심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멀뚱멀뚱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세 처자 사이로 깊은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한 번도 경험이 없는 내 쪽에서 먼저 질문을 건네었더니 비교적 여유 있는 표정의 그녀들이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좀 있다가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으면 그때 해도 되요"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한여름 그늘 하나 없는 광장의 햇살은 우리의 온 몸을 강타하는 것도 모자라 뼈 속 깊이 자신의 존재들을 각인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돌아다닐 수 없는 상황. 그대로 앉아 20분, 30분, 흐르는 시간만큼이나 다리는 저려오고 그나마 응급처방이라고는 그 자리에 일어나 있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하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과연 승산이 있기는 한 걸까? 행인들 중에는 대놓고 키득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의 모습을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광장 끝에 이르기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 무리의 한국인 단체 여행객들도 있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가와서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들이 건넨 첫 질문은 "여기서 뭐하세요?" 였다.

도대체 '뻘줌'이라는 걸 모르는 그녀들이 솔직하게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 중 한 아주머니께서 "우리 아들에게 가서 좀 보여주려고. 부모 돈 무서운지 좀 알고 정신 좀 차리라고. 아이고! 아가씨들이 기특하기도 해라"며 같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신다. 결국 내가 찍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고, 무엇이든 본인이 직접 해보지 않고서 섣불리 판단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 절절히 다가오는 경험이었다. '중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 상품 펼쳐 놓고 파는 일이 뭐 어려울까'라고 생각했던 노점이었다. 하지만 직접해보니 차라리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수긍이 갈 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지났을까. 성격 급한 내가 파장을 선언하기 바로 직전, 그제서야 한두 사람이 우리 상점 앞에 와서 물건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복 입은 인형, 부채 등 그녀들의 물건이 먼저 팔리기 시작하고, 뒤이어 한 독일인 할아버지께서 내 상품 몇 가지를 주섬주섬 챙기시더니 본인도 학생 때 일을 병행하셨다며 따뜻한 미소를 건네신다.

 노점에서 내가 팔았던 상품들
▲ 노점의 모습 노점에서 내가 팔았던 상품들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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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날 그가 산 물건들은 내가 독일에서 샀던 상품들이었다. 그것들을 독일 어디서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그는 사실상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 까지 마음을 베푸신 것이었다. 그 마음이 너무나 감사해서 그가 간 뒤에 이야기를 전하니, 그녀들이 자신들도 겪었던 따뜻한 경험들을 내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남자분이 몇 가지 물건들을 사가고 한 시간쯤 뒤에 다시 오셨다. 본인이 배가 고파서 피자를 하나 샀는데 급한 일로 어딜 가봐야 해서 먹을 수가 없으니 대신 먹으라는 것이었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결국 받았는데 그가 돌아가고 열어보니 이제 막 구운 뜨끈뜨끈한 피자였다. 그제서야 식사도 거르고 앉아 있던 그녀들에게 주고 싶어 일부러 사 오셨던 선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또 본인도 학생시절이 있었다며 잔돈 정도이니 그냥 받아두라고 물건도 받지 않으시고는 돈을 건네셨던 분들의 이야기. 본인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 임에도 경비에 쓰라며  먼저 다가와 도움을 주셨던 여러 어른들의 이야기 등등.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광장에서 같이 장사를 하던 그날에도 몇 푼 되지 않는 것을 오히려 더 머쓱해 하시며 여행경비에 보태 쓰라고 돈을 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하지만 그녀들의 원칙은 분명했다. 그것이 얼마이든 절대로 무상의 돈은 그 누구에게도 받지 않을 것. 노점을 하는 것은 분명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긴 하나, 본인들의 작은 행동이 외국인들에게는 결코 한 개인에 대한 인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그녀들은 명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의 숙박비를 벌고 그녀들은 그 이상의 이윤을 남긴 몇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얻은 건, 분명 돈 이상의 가치들이었다. 장사란 그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만나는 일이라는 진실을, 아무리 조그마한 규모의 장사일지라도 절대로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겸손을, 그 어떤 일이건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반드시 지켜가야 한다는 기본 됨을, 기다릴 줄 아는 끈기를, 무엇이건, 누구건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혜를 배운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날 그 흔한 의자 하나 없이 우리는 땅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을 가장 낮추고 가장 소소한 것들을 팔았다. 하지만 맨살에 그대로 파고드는 여름날의 햇살을 막아 든든한 그늘이 되어 주었던 가장 높은 마음들을 받았다. 돈이란 무엇인지를,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배운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날 수지맞은 정도가 아니라 대박을 터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잎이 무성하지는 못한 나무이지만 홀로 있는 벤치에 작은 그늘이 되어주던 독일 Gutach 의 한 풍경
▲ 독일 Gutach 의 한 풍경 비록 잎이 무성하지는 못한 나무이지만 홀로 있는 벤치에 작은 그늘이 되어주던 독일 Gutach 의 한 풍경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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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유럽여행 중에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를 쓴 에세이 입니다.



태그:#노점, #유럽여행, #돈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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