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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별 느낌이 없었다던, 그러나 내게는잊을 수 없는 소중하고 아끼는 도시 폴란드의 Krakow.
▲ 폴란드의 Krakow. 2010 년. 누군가에게는 별 느낌이 없었다던, 그러나 내게는잊을 수 없는 소중하고 아끼는 도시 폴란드의 Krak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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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유럽의 한 민박집이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데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부엌 식탁에 앉아 이리저리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작은 책자를 들척이고 있는 중이었다. 중간 중간 자다 깬 이들이 한두 명씩 왔다 가면서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자신들의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다시 스르륵 문이 열리더니 한 청년이 인사를 건넨다.

한국인 청년이다. 그는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잠깐 잠깐 스쳐 지나가면서 참으로 독특하다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대체로 모든 의상이 그의 하얀 얼굴에 의해 더욱 대비되는 검정색들이었고 손목에는 죄수들의 쇠사슬 같은 것이 각각 양손에 일종의 액세서리처럼 끼워져 있었다. 더군다나 발목에도 엇비슷한 것들이 장식되어 있어서 만약 그것들이 쇠였다면 정말 죄수들이 걸어다닐 때처럼 쇠사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가 역시나 그 옷을 입고 "아직 안 주무시나봐요? 사실은 내일 브뤼셀로 가는데 저도 책자 좀 보려고 나왔어요"라며 식탁 한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런데 나는 여행 아주 초기에 이미 벨기에를 다녀온 터였다. 더군다나 브뤼셀이라면 그곳 왕립미술관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는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도시이기도 했다.

한국의 여행 책자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마을 전체가 멋진 건축 박물관 같던 독일의 Goslar
▲ 독일, Goslar 2008 년 한국의 여행 책자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마을 전체가 멋진 건축 박물관 같던 독일의 Gos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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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추천한 적 없지만 내게는 최고의 보물 같은 독일의 한 작은 마을
▲ 독일 뮌헨 근처의 한 마을, 2011년 누구도 추천한 적 없지만 내게는 최고의 보물 같은 독일의 한 작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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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가 그곳을 무려 6일간이나 머무를 예정이라고 했을 때 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고 "왜요? 브뤼셀에 볼 것이 뭐가 있다고 그곳을 일주일 가까이 잡으셨어요? 세상에! 그냥 그곳은 1~2일 잡으시고 다른 곳을 좀 더 보시지요?"라며 적극 만류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정말 의상만 특이한 사람이 아니군, 아니 브뤼셀만을 6일이나 잡는 사람이 있다니 '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의 눈빛을 그가 읽었는지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사실 앞으로 패션 쪽에서 일하고 싶어요. 대학은 원래 공대 쪽 전공이었는데 중간에 제가 의류 관련 쪽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걸 깨닫고는 학교는 그만두었어요. 그리고는 이 쪽 사업을 시작했거든요. 브뤼셀은 세계적인 유명 젊은 디자인들이 그 본거지를 삼고 있는, 패션 쪽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둘러보면 좋을 곳이에요. 그래서 제게는 6일도 부족할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미처 그의 사정도 모르면서 개인적인 잣대로 모든 걸 평가했다는 걸 그 순간 깨닫게 된, 그래서 창함으로 얼굴 전체가 붉어진 내게 계속 이어졌다.

"브뤼셀에 가서 그 유명한 젊은 작가들의 목소리를 꼼꼼히 살펴보고 저는 그들을 통해 저만의 목소리로 재창조하고 싶어요. 패션은 그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저의 것이 한국의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서 그걸로 먹고 살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즉 저의 코드가 그들의 욕구에 부합할지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 길을 갈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될지는 모르기에 불안하죠. 하지만 언젠가 제 옷을 팔고 전시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와서 차를 마시거나 책도 볼 수 있는 종합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  

그 순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명확해졌다. 그것은 바로 "여행은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한 섣부른 잣대를 마구 휘둘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여행객들이 실수하기 쉬운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부분이기도 했다.

그 어느 한국인 여행객도 선뜻 가지 않는 독일의 어여쁜 도시 Ulm
▲ 독일의 어여쁜 도시 Ulm 그 어느 한국인 여행객도 선뜻 가지 않는 독일의 어여쁜 도시 U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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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도중 다른 여행객들을 만나면 우리는 서로 정보 교류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갔던 곳이나 이미 다른 이들이 다녀온 곳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답해주곤 한다. 그러면서 꼭 빠지지 않고 하는 질문이 "그곳에 가려고 하는데 어떤가요?", "거기 좋다고(혹은 별로)라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등등 이다. 답변 중에는 "거긴 정말 볼 게 없어요. 거기 가면 딱 하나 보죠. 그거 볼려고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라는 등등의 말을 듣게 된다.

여행을 다니면서 나도 그런 말들을 누군가에게 들어보기도 했고 또 앞서 언급한 대로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또 어떤 여행 책자들에는 너무도 친절한 나머지 '이곳을 둘러 보기에는 하루면 충분하다' 식의 구체적인 여행기간까지 기입되어 있곤 한다. 하지만 절대적 가치란 없는 일이다. 100인의 여행에는 100가지 각기 다른 색의 여행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내 삶의 모든 모습이 그러하듯이. 그날 밤, 겸손하지 못했던 대가는 컸지만 덕분에 얻은 소중한 교훈은 내 평생 결코 잊지 못할 것이었다.


태그:#유럽여행 , #상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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