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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을 출발해 사고해역에 도착한 유가족 사이로 침몰지점을 표시한 부표가 보이고 있다.
▲ 사고 1년, 부표만 떠있는 세월호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을 출발해 사고해역에 도착한 유가족 사이로 침몰지점을 표시한 부표가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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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방문한 유가족들 헌화를 하고 있다.
▲ 국화 던지는 유가족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방문한 유가족들 헌화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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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 방문한 유가족들이 배 넘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오열하고 있다.
▲ '통곡의 바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 방문한 유가족들이 배 넘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오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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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 방문을 마친 한 유가족들이 배 넘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오열하고 있다.
▲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월호'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 방문을 마친 한 유가족들이 배 넘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오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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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바다가 됐고, 바다는 눈물이 됐다.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3km 지점. 배의 엔진 소리가 잦아들었다. 팽목항을 떠나 2시간 가까이 달리던 배 너머로 '세월'이라고 적힌 노란 부표가 보였다. 잦아든 엔진 소리 대신, 흐느끼는 소리가 뱃전을 메웠다. 부표를 향해 손을 뻗고, 국화꽃을 던졌다. 발을 동동 구르던 엄마는 그래도 부족했는지 배의 난간을 위태롭게 올랐다. 말리는 이도 함께 울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 생존자 등 400여 명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참사 현장을 찾았다. 오전 8시와 오후 4시, 두 차례로 나눠 진도 팽목항을 출발한 이들은 참사 현장을 찾아 저마다 품은 한을 바다에 토해냈다.

갓 배에 오른 희생자 가족들은 1년 전 아들·딸이 수학여행을 떠난 그날처럼, 노란 점퍼를 맞춰 입고 선실을 가득 메웠다. 고 김민지(단원고)양의 언니는 "민지야, 하늘에서 우리 지켜봐줘. 사랑한다"라고 쓴 편지로 종이배를 만들어 바다에 던졌다. 지난해 10월 마지막으로 세월호에서 나온 고 황지현(단원고)양의 아빠는 수학여행 다녀올 때 딸이 사오기로 한 초콜릿을 바다에 뿌렸다.

지난 3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머리를 박박 민 고 김시연(단원고)양의 엄마는 바다를 바라보더니 탄식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실종자 양승진(단원고 교사)씨의 아내 유백형씨는 국화꽃 한 아름을 가슴에 품고 남편을 애타게 불렀다. 바다를 마주한 고 박예슬(단원고)양의 엄마는 하나 남은 딸이자, 예슬양의 동생을 꼭 껴안고 울었다.

<오마이뉴스>는 이날 희생자 가족 및 생존자와 함께 배에 올라 유가족, 실종자 가족, 생존자 각각 한 명씩, 총 세 명을 인터뷰했다. 세 명 모두 참사 이후 처음 사고 해역을 찾았다. 세월호와 엮인 각자의 사연을 전한다.

[유가족] 동생은 영정을 들고 배에 올랐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방문하기 위해 고 최정수(단원고) 학생의 동생 최정호(15) 군이 형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 형 영정들고 팽목항 찾은 동생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방문하기 위해 고 최정수(단원고) 학생의 동생 최정호(15) 군이 형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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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방문하기 위해 고 최정수(단원고) 학생의 동생 최정호(15) 군이 배에 올라 생각에 잠겨있다.
▲ "형이 많이 보고 싶어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사고해역을 방문하기 위해 고 최정수(단원고) 학생의 동생 최정호(15) 군이 배에 올라 생각에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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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정수(단원고)군의 동생 최정호(15)군은 형의 얼굴이 그려진 영정을 들고 배에 올랐다. 바가지머리의 동생은 사진 속 형을 빼닮아 있었다. 영정에 담긴 형의 얼굴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동생과 함께 참사 현장을 찾았다.

동생은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한참 동안 바다를 내다보던 동생은 "바닷물을 보고도 별 생각이 안 든다"고 애써 담담한 마음을 내보였다. 하지만 동생은 "무섭다"고도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형을 만나러 가는 이 뱃길이 두렵다"고 말했다.

동생은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다. 떠올리기 싫은 것인지,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도 판단이 안 선다. 참사 후 3일이 지난 지난해 4월 19일, 형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도 동생은 형을 보지 못했다. 엄마는 형의 차가운 모습을 동생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학여행 떠나기 전날의 형의 모습은 동생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동생은 "짐을 싸던 형의 얼굴이 참 들떠 보였고, 좋아 보였다"고 떠올렸다.

"형과 함께 PC방 다닌 기억이 많다"던 동생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형이 만들어 준 김치볶음밥 생각이 많이 난다"며 웃었다. "주말에 엄마·아빠가 일하러 나가면 형과 둘이 있었는데 사고 이후엔 형이 없으니 쓸쓸하다"고 말한 동생은 "사고 이후, 한 번도 김치볶음밥을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생은 "형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형이 살아 있을 때 동생은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실종자 가족] "손 뻗으면 잡힐 듯... 다시 두고 가야 하다니"

참사 현장을 찾은 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의 언니 서윤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널 두고 다시 돌아가려니..." 참사 현장을 찾은 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의 언니 서윤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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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현장을 찾은 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의 언니 서윤씨가 세월호를 붙잡고 있는 노란 부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 손 뻗으면 닿을 듯... 참사 현장을 찾은 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의 언니 서윤씨가 세월호를 붙잡고 있는 노란 부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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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의 언니 서윤(21)씨는 이모와 함께 배에 올랐다. 울다 지쳐 여러 차례 병원 신세를 진 엄마는 팽목항에 남았다. 배가 팽목항을 출발하자 언니는 기자에게 "펜과 종이를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더니 동생을 향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다윤아, 벌써 1년이네. 지금 이모랑 언니랑 너한테 가고 있어. 네가 좋아하는 사탕도 던져줄게. 깜비도 데리고 왔어. 팽목항에서 엄마가 기다려. 어두운 곳에서 오래 있게 해서 미안해….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해서 빨리 나올 수 있게 해줄게.

다윤아, 엄마 많이 힘들어 해. 네가 빨리 나올 수 있게 할게! 우리 모두 널 많이 사랑해. 내 동생이어서 고맙다.♡ 이모 꿈에서 함께 놀아줘 고마워. 언니 꿈에도 나와! 몸은 함께할 수 없지만…. 마음은 늘 우리 다윤이에게 미안하고, 많이 사랑한다. 나중에 꼭 만나자.♡

언니는 편지로 종이배를 접어 바다에 던졌다. 그러더니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났지만 우는 서윤씨를 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세월호를 붙잡고 있는 부표를 향해 연신 손을 뻗으며 언니는 목놓아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언니는 "별 생각이 다 든다"며 복잡한 심경을 내보였다. "손 뻗으면 잡힐 거 같고, 지금 바로 (동생을) 꺼낼 수 있을 거 같은데"라고 말끝을 흐린 언니는 "다윤이를 두고 다시 돌아가려니 너무 큰 죄책감이 든다"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내일 다시 학교에 가 일상생활을 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다윤이에게 너무 미안해요."

[생존자] "장난치던 아이들 얼굴, 눈앞에..."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출발해 사고해역으로 향하는 배에 탑승한 생존자 박용운 화물차기사가 배 선수 바닥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 사고해역 찾아온 생존자 박용운씨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출발해 사고해역으로 향하는 배에 탑승한 생존자 박용운 화물차기사가 배 선수 바닥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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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차 기사 박용운(63)씨는 참사 현장을 한동안 둘러보다가 털썩 앉아 배 난간에 기댔다. 그는 허리 쪽을 연신 손으로 만졌다. 참사 당시 갑작스레 배가 기울어 허리를 다친 박씨는 3일 후인 19일 허리 수술을 받았다.

지금껏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박씨의 주머니엔 약봉지가 가득했다. 그는 몸도 다쳤지만, 생계 수단을 잃어 마음까지 다쳤다. 지난 달까지 화물차 할부금을 내야 한 그는 "정부와 지자체 어느 곳도 생계 유지를 위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전남 목포에 사는 박씨의 가족은 아내와 아들이 버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박씨는 "죽은 학생들에게 미안해서" 이날 참사 현장을 찾았다. 참사 직전, 선내 식당에서 아이들과 앉아 농담을 주고받은 그는 "지금도 아이들 얼굴이 눈앞에 스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구조 직후, 참사 현장 인근의 서거차도로 옮겨진 박씨는 당시 학생들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빌려주며 "집에 구조 소식을 알리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그는 생존 학생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애들아, 잘 지내니?"

1주기 위령제, 추모할 수 없는 추모사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희생자가족, 생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팽목항사고해역인양촉구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희생자가족, 생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팽목항사고해역인양촉구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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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희생자가족, 생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팽목항사고해역인양촉구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희생자가족, 생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팽목항사고해역인양촉구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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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희생자가족, 생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팽목항사고해역인양촉구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희생자가족, 생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팽목항사고해역인양촉구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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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오후 1시 진도 팽목항에선 '세월호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참사 현장을 찾은 희생자 가족, 생존자를 포함해 1000여 명의 인원이 모였다. 아래는 위령제에서 고 전찬호(단원고)군의 아빠 전명선 4·16세월호참사가족대책협의회 대표가 발표한 추모사 전문이다.

추모할 수 없는 추모사

우리는 다시 팽목항입니다. 아직도 생생하고 귀에 쟁쟁한 그 날 4월 16일. 그 날로부터 무려 1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다시 팽목항에서 365일 동안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배 안에 사람이 있다!"
"왜 구조하지 않는 것이냐?"
"도대체 누가 책임자란 말이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똑같은 나날들이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추모란 말은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세월호 안에 사람이 있고, 아직도 떠나 보낸 이가 없는데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그리워하라는 것인지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국력소진, 국론분열을 말합니다. 우리도 원치 않습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나라가 있고, 우리를 살펴주는 국가의 수장이 있으면 당연히 실종자의 수습과 인양,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와 안전사회를 위한 국가적 책임이 명백한 피해자 지원이 늦지 않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국가와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끝내 직접 찾아가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광화문 길거리에 주저앉게 됐습니다. 떠날 수 없는 곳, 만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가족들도 우리의 생때같은 자식들도 늘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가족들에게는 매일 같이 엄습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안하다! 찬호야. 우리 아이들아! 이 아비가 너희들에게 해줄 말이 없구나…."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미치도록 무서울 뿐입니다.

우리가 왜 이래야만 합니까? 제발 누가 답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아버지로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고통도 두려움도 이겨내야만 진정한 부모가 되는 것이라고 느끼며 저는 활동하고 있습니다. 열 달을 품고 나와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준 우리의 귀중한 가족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우리 모든 국민을 지키는 길임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언정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만 모두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철옹성보다 더욱 강력한 가족의 힘으로, 국민의 힘으로 국민을 책임지지 않은 자들이 뼈저리게 후회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이겨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과 가족을 만나러 다시 저 바다로 갑니다. 보고 싶은 찬호야. 사랑하는 찬호야. 우리의 모든 귀한 아이들아! 선생님들! 가족들!

그리고 은화야, 다윤아, 현철아, 영인아! 양승진 선생님, 고창석 선생님! 권재근님, 권혁규님, 이영숙님!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봐주세요! 우리는 기필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세월호 참사, #1주기, #진도, #팽목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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