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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목양원 미술심리치료사 이상원씨
 군산 목양원 미술심리치료사 이상원씨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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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률은 2000대 1. 외국 국빈을 영접하고 국가 경축일에 의전을 하는 국방부 의장대. 흐트러지면 안 된다. '떨어지는 낙엽도 의전할 때는 멈춘다'는 곳. 상원은 제식 훈련을 통해 자세와 각을 잡았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 이·취임식 때는 미세하게 팔이 덜덜거렸다. 퇴임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느릿느릿 걸었고, 상원이 든 깃발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저는 운을 타고난 사람이에요. 의장대처럼, 대학도 운으로 붙었어요. 완전 황공 감사죠."

상원은 군산 중앙고 1학년 때 반에서 꼴찌였다. 공부 시간인데 '땡땡이'를 치고 나와서 어묵을 사 먹었다. 분식집 2층에는 미술학원이 있었다. 눈 한 번 깜빡거리고 나니, 어느새 상원은 미술학원에서 상담을 받고 있었다. 학교는 재미없는데 그림 그리고 뭔가를 만드는 것은 달랐다. 이 재미있는 미술을 계속하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상원은 처음으로 공부했다.

400점 만점의 모의고사, 상원의 점수는 45점. 고3이 된 상원은 닥치는 대로 문제집을 사서 풀었다. 미술학원에서 실기도 준비했다. 수능 점수 230점, 영어 과목은 세 문제만 틀렸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이 많아졌다. 상원은 캠퍼스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진학했다. 1학년 마치고 의장대에 갔다가 2학년으로 복학했다.  

"군대 갔다 와서 피아노 치는 한 친구랑 친해졌어요. 그 친구는 위 아랫집에서 '피아노 소리 시끄러워요!' 항의를 많이 받으니까 방에 온통 달걀판을 붙여놓고 있더라고요. 제가 눈썰미가 좀 있어요. 한 번만 봐도 따라서 만들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스튜디오 같은 느낌으로 방음부스를 만들어줬어요. 집 안에 노래방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방음부스 만들던 상원, 작가를 꿈꾸다

직접 방음부스를 제작해서 판매하던 상원씨. 큰돈을 벌었지만 철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서울로 갔다.
 직접 방음부스를 제작해서 판매하던 상원씨. 큰돈을 벌었지만 철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서울로 갔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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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봄, 상원씨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삼촌한테 돈을 빌렸다. 군산시 대야면에 있는 30평짜리 공장을 빌려 방음부스 회사를 차렸다. 전국에 방음부스 회사가 네 곳뿐이던 시절, 상원씨는 톱밥을 압축한 피비판으로 직접 제작했다. 처음 두 번은 실패. 재룟값 천만 원을 까먹었다. 상원씨는 담담했다. 뭔가를 배운다면, 시행착오를 겪는 게 당연하니까.

혼자 연주하기에 딱 좋은, 가로 2미터에 세로 2미터짜리 방음부스. 미술을 전공한 덕에 디자인에 더 신경 쓴 상원씨의 방음부스는 인기를 끌었다. 색소폰 연주가 유행하던 때라 7백만 원짜리 물건은 인터넷 판매가 잘 됐다. 이사를 가더라도 떼어 갈 수 있고, 중고로 팔 수 있는 방음부스. 주문이 하루에 3천만 원어치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회사 차릴 때 삼촌한테 빌린 돈은 다 갚았다. 꼬박 2년 동안 방음부스 만드는 일을 한 상원씨는 벌어놓은 돈도 제법 됐다. 그때 상원씨 아버지가 공장으로 찾아왔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재단하며 몸 쓰는 일을 하는 아들을 봤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아직까지는 네 뒷바라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미술 공부를 더 해라"고 했다.

"공부를 더 한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건 아니죠. 근데 흔들리더라고요. 맨날 공장에서 혼자 일했어요. 방음부스가 워낙 비싸서 날마다 주문이 들어오는 건 아니에요. 직원을 두고서 다달이 월급 줄 형편은 못 됐죠. 젊으니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작가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사람이 잘 될 때는 뭐든지 다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회사를 정리하고 남은 돈 1억. 스물아홉 살 청년 상원씨는 서울로 갔다. 홍익대 미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큐레이터 일을 하는 동생 경민씨가 있어 집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조소 전공을 살려 미니어처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다. 박물관마다 전시되는 각종 전쟁 장면 미니어처를 만들었다. 작품하는 기분으로 다녀 밥벌이가 고달프지도 않았다. 

다음 해 봄, 상원씨는 작업을 활발하게 하는 성신여대 대학원 거리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여대라는 환상도 작용했다. 집하고 가까운 것도 장점이었다. 공부하면서 개인전과 단체전 전시회를 여러 번 했다. 거리 조형물 변형 작업도 진행했다. 군산시 옥산면 산업 계장이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군산 청암산 어귀의 소 작품과 토끼 피규어도 만들었다.

"청암산은 수십 년간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이었어요. 전혀 훼손되지 않고, 원래 모습대로 살아 있는 곳이죠. 아버지는 은파(도시 안에 있는 군산의 큰 유원지)처럼 접근이 쉽게 길을 낼까도 고민하셨죠. 저는 생태 그대로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연 속에서 걸을 수 있는 몇 개의 청암산 코스를 만드셨어요. 지금은 군산 구불길이 됐죠."

아버지의 빈 자리...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

상원씨는 목양원 장애들과 1년 동안 미술 작업을 해서 전시회도 열었다.
 상원씨는 목양원 장애들과 1년 동안 미술 작업을 해서 전시회도 열었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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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씨 인생은 서른 살부터 몇 년간 '피크'였다. 그는 철을 재료로 쓰는 작가. 작품 하나당 백만 원쯤 들어도 한 학기에 일곱 작품씩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화려한 서울에 있는 것 같았다. 방음부스하면서 벌어놓은 돈 덕분에 힘들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대학원 다니는 아들, 딸 뒷바라지 해야지"라면서 개업한 숯불갈비 집도 장사가 잘 됐다.

세상이 낙원만 같던 어느 날, 상원씨의 아버지는 직장도 못 갈 만큼 아팠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 말기, 남은 삶이 3개월이라고 했다. 상원씨와 동생 경민씨는 아버지를 살려 보겠다고 병원 순례에 나섰다. 아버지가 텃밭이라도 가꾸면 조금이라도 좋을까 싶어서 군산시 외곽으로 이사했다. 쉰네 살 아버지는 투병 7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암 치료하면서 아버지 퇴직금이랑 연금을 미리 썼어요. 5천만 원 나오는 보험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아버지 간병 하느라고, 어머니가 하던 숯불갈비 집도 신경 못 쓰니까 망했어요. 집이랑 차부터 팔았어요. 그러고도 동생이랑 둘이서 큰 빚을 떠안은 거예요. 친척들한테 빌린 거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대출 이자 내는 날이 어찌나 빨리 오던지, 문자 올 때마다 경기가 났어요. 그때 제가 서른세 살이었어요."

제 때 밥을 챙겨먹는 일마저 사치. 상원씨는 라면을 주로 먹었다. 어쩌다 친구들을 만나면 무조건 많이 먹어뒀다. 그는 되새김질 하는 소가 아닌 사람, 다음 끼니에도 배고픔은 닥쳐왔다. 상원씨의 동생은 서울 생활을 접고 군산에서 미술학원을 열었다. 상원씨도 모교 교수들이 일거리를 줘서 돈 되는 작업을 많이 했다. 밤에는 동생네 학원 일을 도왔다. 2년 만에 상원씨 남매는 친척들 빚을 청산했다.

2013년 12월, 상원씨는 사회복지시설 '구세군 군산 목양원'의 미술 심리 치료사로 취직했다.  그와 미술 수업하는 장애인들은 주로 지적장애 3급(초등 1, 2학년 수준). 알려준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 그리지 않는다. 상원씨는 그림 그릴 곳에 테이프를 미리 붙여 놓는다. 장애인들은 물감을 문지른다. 나중에 테이프를 떼고 나면 '작품'이 나온다. 1년간 작업해 전시회도 열었다.

일본은 장애인들이 만든 그림으로 지하철역을 꾸며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예산 비율이 꼴찌, 장애인 작가가 나올 만한 환경이 못 된다. 그래서 상원씨가 도전하고 있다. 장애인들은 지붕이 뾰족하거나 창문은 네모라는 고정 관념이 없다. 색다른 작품들이 나오는 비결이다.

상원씨는 올해 9월에 작품 전시회를 하는 자폐장애 1급 김정훈씨를 지도하고 있다.
 상원씨는 올해 9월에 작품 전시회를 하는 자폐장애 1급 김정훈씨를 지도하고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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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가족 분들(그가 목양원 장애인들을 부르는 호칭)도 자부심이 생겼어요. 저를 따라다니면서 그림 그리자고 해요. 맨날 누워있거나, 텔레비전 보려고만 하는데 작품 한다고 붓이라도 들면 운동까지 되잖아요. 그림 그릴 때 '이거 전시장 가요' 하면 알아들어요. 그 중에서 김정훈(23, 자폐장애 1급)씨는 9월에 개인전을 해요. 글자는 읽어도 대화는 안 돼요. 어릴 때부터 미술치료를 해 와서인지 붓질하는 게 정말 남달라요."

장애인들에게 직업을 만들어 주고 싶은 상원씨. 그들이 만든 작품으로 수익 사업을 해보고 싶단다. 얼마 전부터 목양원 장애인들과 함께 어성초 비누를 만들어 판매했다. 다른 단체에서도 목양원으로 견학을 올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어성초는 아토피에 좋아도 먹기에는 고약하다. 그래서 상원씨는 어성초를 넣은 벽지도 만들고 싶다.

일상적인 대화도 잘 되지 않는 정훈씨. 그림 그릴 때는 다르다. 그래서 상원씨는 적극적으로 나서 정훈씨의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일상적인 대화도 잘 되지 않는 정훈씨. 그림 그릴 때는 다르다. 그래서 상원씨는 적극적으로 나서 정훈씨의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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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해 본 목양원 식구들. 상원씨에게 먼저 다가와서 그림 그리자고 한다.
 작년에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해 본 목양원 식구들. 상원씨에게 먼저 다가와서 그림 그리자고 한다.
ⓒ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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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씨는 지난해 10월 박유정(30)씨와 결혼했다. 아내에게 한 달 용돈 15만 원씩 타 쓰는 게 몹시 행복하다. 주말에는 창고 짓는 현장을 찾아가 용접 알바를 한다. 평일 밤에는 군장대학 사회복지과에 다닌다. 학교를 졸업하면, 교도소에 가서 재소자들에게 그림 봉사를 하고 싶다. 작품 전시회도 열고, 교도소를 미술관처럼 바꿔보고도 싶다.

예전부터 상원씨는 '누군가한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대 시절에 미술치료사 자격증을 땄다. 사실 그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도 말을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장애학교로 보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아홉 살이 되어서야 말문이 트인 상원씨는 공부도 늦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심각하게 자퇴를 고민했다. 점집에 갔다 온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상원아, 너 가방끈 되게 길다더라."
"뭔 소리야? 공부 못해서 고등학교도 포기하려고 하는데..."
"너, 나랏밥도 먹는다는데?"
"엄마는 공무원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 그거 다 뻥이라고, 뻥!"

좋은 일이라면, 그의 것이리라. 점쟁이가 한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은 상원씨는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른다섯에 다시 야간대학을 다니는 중. 그가 일하는 목양원은 국가 시설을 위탁받아 하는 사회복지시설, '나랏밥을 먹는다'는 말도 맞는 셈. 큰돈도 벌어보고, 부모님 빚도 갚아본 상원씨는 안다. 그는 '운을 타고난 사람', 인생은 상원씨가 생각하는 대로 나아간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매거진군산 5월호에 실렸습니다.



태그:#군산 목양원, #목양원 장애인 전시회, #자폐장애인 김정훈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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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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