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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Torino)'. 2300여 년 전, 켈트족이 건설한 도시. 프랑스 사보이 왕가의 지배에 있다가 한때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기도 했던 대표적인 공업 도시. 고백하자면,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토리노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내 자신이 공부가 부족했던 탓이겠지만 미술 중심으로 여행 준비를 하다 보니 토리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것은 철저한 착각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역시 이탈리아였습니다.

토리노 역에 내리자 아침 공기가 많이 차갑습니다. 주요 거점 도시에 숙소를 마련하고 필요에 따라 외곽 도시를 하루씩 방문하는 식으로 짠 일정은 나름 효과가 있었습니다. 로마와 피렌체 일정에서 만났던 오르비에토, 산 지미냐노, 시에나, 아시시 등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 토리노는 앞서의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시입니다. 인구도 200만이 넘죠. 따라서 하루에 토리노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토리노 관광의 핵심인 '레알레 궁전'을 중심으로 일정을 짰습니다. 물론 오늘도 열심히 걷습니다.

토리노의 중심부 '산 카를로 광장'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분수입니다.
▲ 포 강의 분수 토리노의 중심부 '산 카를로 광장'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분수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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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석상으로 상징되는 '포 강의 분수(Fontana del Po)'를 지나자 이내 나타나는 '산 카를로 광장(Piazza San Carlo)'. 부쩍 차가워진 날씨 탓인지 나란히 서 있는 두 성당과 광장 중앙의 '엠마누엘 공작의 기마상'만 눈에 띌 뿐 텅 빈 광장은 황량한 느낌마저 듭니다.

하루 만에 토리노를 보려면 부지런히 서둘러야 된다는 생각에 뒤편 '카스텔로 광장(Piazza Castello)'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레알레 궁전'을 비롯하여 '마다마 궁전(Palazzo Madama)', '산 로렌초 성당(Chiesa di San Lorenzo)', '왕립 도서관(Biblioteca Nazionale Reale)', 그리고 토리노의 두오모 '산 지오반니 바티스타 대성당' 등이 모여 있는 '카스텔로 광장'은 토리노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바쁜 걸음은 아름다운 '마다마 궁전'도 '산 로렌초 성당' 그냥 스쳐 지나가고  곧바로 '레알레 궁전'으로 향합니다.

토리노 사보이 왕가의 왕궁이었던 '레알레 궁전'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통일 이탈리아를 선포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레알레 궁전 토리노 사보이 왕가의 왕궁이었던 '레알레 궁전'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통일 이탈리아를 선포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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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레 궁전(Palazzo Reale di Torino)' 즉 '팔라초 레알레'는 영어로 번역하면 Royal Palace, 즉 '왕실의 궁전'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사보이 왕가의 왕궁으로 이후 사르데냐 왕국의 궁전으로 사용되었고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통일 이탈리아를 선포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죠.

프랑스 영토인 사부아에서 시작된 사보이 왕조는 11세기에 처음 역사에 등장해 알프스 이남으로 세력을 확장한 후 북이탈리아로 진출한 가문입니다. 나중에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는 왕국으로 성장해 유럽사의 흐름에 큰 획을 긋기도 하죠.

오랜 세월 피에몬테 지방을 지배하며 니스와 제노바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사보이 왕조는 그 기원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문입니다. 실제로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어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카부르, 가리발디 같은 인재들을 통해 입헌군주제로의 이행 및 각종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통일 이탈리아를 만드는 데 성공하죠. 또한 탁월한 외교 감각으로 이탈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동시에 겸손하고 주어진 의무에 충실한 성격 탓에 지금도 국부(國父)로 많은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후손들이 무솔리니에게 협력한 탓에 1947년의 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해 사보이 가문의 정치 참여 및 사보이 혈통 남자의 이탈리아 입국이 금지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왕궁치고는 조금은 심심한 외관과는 달리 '레알레 궁전'의 실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합니다. 특히 중국식 자개로 장식한 방은 독특한 화려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 중국풍의 방 왕궁치고는 조금은 심심한 외관과는 달리 '레알레 궁전'의 실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합니다. 특히 중국식 자개로 장식한 방은 독특한 화려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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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치고는 조금은 심심한 외관과는 달리 '레알레 궁전'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나는 방들마다 온갖 장식들이 가득하죠. 특히 황금과 중국식 자개로 장식한 방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로마나 피렌체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궁전의 화려함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여기저기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다른 관람자들을 피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런데 이곳 토리노의 '레알레 궁전'에서는 내 눈길을 끌만한 새로운 볼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기입니다.

'레알레 궁전' 안 박물관 한 쪽, 길게 이어진 홀에 중세의 갑옷과 투구와 방패와 칼, 그리고 근대의 총기들까지 각종 무기들이 그야말로 빽빽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군사 박물관입니다. 나름대로 평화주의자인 나에게 이 수많은 전쟁과 살인의 도구들이 멋지게 보일 리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중세와 근대 유럽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대륙이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넓지 않은 지역에 수많은 민족들이 수많은 국가와 왕조들을 만들고 허물었던 유럽. 로마 시대부터 20세기 전반의 2차 세계대전까지 2000년이 넘는 유럽의 역사는 사실상 '전국시대(戰國時代)'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던 아서왕 전설, 캔터베리 이야기, 지크프리트 전설, 십자군 원정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웅담과 기사담의 흔적들이 이렇게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레알레 궁전' 안 박물관 한 쪽, 길게 이어진 홀에 중세의 갑옷과 투구와 방패와 칼, 그리고 근대의 총기들까지 각종 무기들이 그야말로 빽빽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 군사박물관 '레알레 궁전' 안 박물관 한 쪽, 길게 이어진 홀에 중세의 갑옷과 투구와 방패와 칼, 그리고 근대의 총기들까지 각종 무기들이 그야말로 빽빽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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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살인의 도구이긴 하지만 유럽 역사와 문화의 또다른 한 축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 무기들 폭력과 살인의 도구이긴 하지만 유럽 역사와 문화의 또다른 한 축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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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박물관을 끝으로 '레알레 궁전'에서 나와 토리노의 두오모, '산 지오반니 바티스타 성당(Cattedrale di San Giovanni Battista)'으로 향합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예수의 형상이 나타난 수의가 있는 곳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로선 아직까지 논란 중인 수의의 진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의가 십자군 원정 당시 터키에서 발견된 후 1572년 이곳 토리노 대성당에 보관되어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종교란 그렇게, 자신들이 믿는 대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수의는 보존 문제 때문에 일반 공개를 하지 않고 화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발길은 미술기행답게 '사바우다 미술관(Galleria Sabauda)'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한 번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곳 '사바우다 미술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로마나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볼로냐의 수많은 미술관들을 공부했지만 '사바우다 미술관' 에 대해서는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죠. 애초에 정보 자체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곳 '사바우다 미술관'에서 스탕달이 느꼈다는 그 현기증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이나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과 '아카데미아 미술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처럼 세계적인 대(大) 명작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무시하지 못할 작품들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져 정말이지 현기증과 구토가 일어날 지경이었습니다.

복싱으로 치면 한 방에 상대를 때려눕히는 K.O 펀치는 아니지만, 쉬지 않고 몰아치는 잽과 스트레이트 연타에 넋이 나간 것 같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곳이라 그런지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 외에도 플랑드르나 독일 등 중북부 유럽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얀 반 아이크, '성 프란체스코의 성흔',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얀 반 에이크의 그림으로 '필라델피아 예술 박물관'의 그림과 쌍둥이 작품입니다.
▲ 성 프란체스코의 성흔 얀 반 아이크, '성 프란체스코의 성흔',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얀 반 에이크의 그림으로 '필라델피아 예술 박물관'의 그림과 쌍둥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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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만날 작품은 얀 반 에이크의 작품 '성 프란체스코의 성흔'입니다.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얀 반 에이크는 극단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경건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의 인물화와 성화를 많이 그린 작가입니다. 특히 온갖 도상적 기호와 상징에 둘러싸인 신랑 신부의 모습을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려낸 그의 대표작 '아르놀피니의 결혼'(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지향점을 제시한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죠.

얀 반 에이크가 서양 회화에 남긴 가장 또 다른 업적은 바로 유화 기법의 발명입니다. 당시 피렌체 르네상스의 작가들이 원근법과 단축법, 해부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사실적 재현에 몰두했던 것과 달리 얀 반 에이크는 유화 기법을 이용하여 대상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화면의 질감을 통해 대상을 그대로 옮긴 듯한 환영을 불러일으켰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양 회화의 근간인 유화 기법이 얀 반 에이크에 의해 완성된 것입니다.

내 눈 앞의 '성 프란체스코의 성흔'도 얼핏 보면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비록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물감이 갈라지긴 했지만 얀 반 에이크의 리얼리즘을 확인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림의 내용은 제목처럼 성 프란체스코의 몸에 예수의 상처와 같은 성흔이 생긴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필라델피아 예술 박물관'에 똑같은 주제의 더 큰 작품이 있어서 모작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밝혀진 바로는 얀 반 에이크가 두 사람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똑같은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얀 반 에이크에 이어 곧바로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또다른 대가 한스 멤링의 명작을 만납니다.

한스 멤링, '예수의 수난',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 1미터 못되는 작은 화면에 23개에 이르는 예수의 수난 에피소드를 시간 순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 예수의 수난 한스 멤링, '예수의 수난',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 1미터 못되는 작은 화면에 23개에 이르는 예수의 수난 에피소드를 시간 순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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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터가 채 못 되는 그다지 크지 않은 화면에는 15세기 플랑드르의 복잡한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 내부와 외곽 곳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한 부분 한 부분이 모두 하나의 주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빌라도의 재판과 십자가 형벌, 부활까지 이어지는, 바로 '예수의 수난'입니다.   

우선 수많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예수의 수난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내는 예수, 유다의 배신, 최후의 만찬, 산상 기도,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는 예수, 빌라도의 재판, 채찍질 당하는 예수, 면류관을 쓰는 예수,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십자가형, 십자가에서 내려짐, 무덤에 안치, 부활, 나를 만지지 마라 등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23개의 에피소드 중 내가 찾은 것은 이 정도입니다. 각각 하나의 화폭에 묘사해도 충분한 에피소드들을 이처럼 촘촘하게, 그것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한스 멤링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한스 멤링은 15세기 중반, 플랑드르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브뤼헤(Bruges)에서 주로 활동했던 화가 중 한 명입니다. 당시 브뤼헤는 직물 생산과 교역을 통해 이룬 눈부신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자동맹의 중심지로, 피렌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 수도로 발돋움하고 있었죠.

이곳에서 얀 반 에이크의 혁신을 이어받은 한스 멤링은 유화 기법을 이용한 리얼리즘과, 이 그림처럼 한 화면에 여러 개의 복잡한 장면들을 구성하는 데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대부분 화려하고, 비교적 소형 패널로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가정의 개인 예배당에 소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죠. 그래서 한스 멤링은 당시 브뤼헤에 줄을 대고 있던 유럽 각지의 상인, 은행가 등 부르주아들에게 최고의 인기 작가로 대접받았습니다.

한스 멤링, '예수의 수난'(부분),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 이 작은 부분에도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함께 배치되어 있습니다.
▲ 예수의 수난 한스 멤링, '예수의 수난'(부분),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 이 작은 부분에도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함께 배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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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예수의 수난'도 피렌체 메디치 은행의 브뤼헤 지역 대표를 맡고 있던 포르티나리 가문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주문 제작된 것입니다. 그림 속 예루살렘이 플랑드르의 상업 도시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서의 내용이 자신들의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상상, 그리고 그 도시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고 있다는 우월감. 한스 멤링은 주문자의 구미에 딱 맞는 작품을 제작한 것입니다.

아무 준비없이 찾은 '사바우다 미술관'에서 뜻밖의 명화들을 연이어 만나니 그 감동이 생각보다 큽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미술 기행을 이어가야 할 것 같아 다리에 힘도 꽉 주고 심호흡도 합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눈길을 돌려보니 보티첼리도 보이고, 베르나르드 반 오를리도 보입니다. 페라리, 소도마 등 대가들이 숨쉴 틈 없이 나타납니다.

(제목이 알려지지 않아) 도무지 알 수 없는 주제의 이 그림은 16세기 초반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했던 베르나르드 반 오를리의 작품입니다. 주제 묘사도 그렇지만 모노크롬의 색채부터가 특이합니다.
▲ 무제 (제목이 알려지지 않아) 도무지 알 수 없는 주제의 이 그림은 16세기 초반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했던 베르나르드 반 오를리의 작품입니다. 주제 묘사도 그렇지만 모노크롬의 색채부터가 특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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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토리노2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얀반아이크, #한스멤링, #사바우다미술관, #토리노,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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