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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일정을 100퍼센트 소화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좋은 여행이 아니다."

이 말은 이번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행 선배들에게 숱하게 들은 말입니다. 여행이란 (특히 자유 여행의 경우에는) 어차피, 의외의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정해진 일정에 연연하는 것은 오히려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는 말이겠죠. 나 역시 이번 이탈리아 여행 중 뜻하지 않은 상황과 여러 번 맞닥뜨렸고 그때마다 나름대로 잘 대처해서 큰 고비없이 이곳 나폴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정 중 거의 70~80퍼센트는 소화했으니 충분히 좋은 여행이라 할 만하지요.

연말 연시가 겹친 탓에 제대로 된 나폴리 미술 기행은 진행하지 못했지만 산타 루치아 항에서 눈부시게 푸른 나폴리의 바다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베수비오산도 보입니다.
▲ 산타루치아 항 연말 연시가 겹친 탓에 제대로 된 나폴리 미술 기행은 진행하지 못했지만 산타 루치아 항에서 눈부시게 푸른 나폴리의 바다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베수비오산도 보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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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 나폴리에서의 4박 5일은 도착 첫날부터 일정이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이후에도 원래 준비했던 '미술 기행'으로서의 일정을 무엇 하나 계획대로 소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산 세베로 예배당'과 '카포디몬테 미술관' 등 '미술 기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들은 몇 번이나 그 앞에 찾아갔지만 갈 때마다 헛걸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연말 연시라는 시기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미술 기행'으로서의 나폴리 여행은 포기하고, 나폴리와 남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바다를 중심으로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여행 막바지에 뜻하지 않게 주제가 바뀌어 '나폴리 미술 기행'은 '미완의 여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기행'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미술 작품들을 만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짜별로 일기처럼 이어갑니다.       

세계 3대 미항 나폴리 입성, 첫날부터 꼬였다

베네치아가 너무 좋았던 것일까요? 세계 3대 미항이자 남부 이탈리아의 중심 도시, '나폴리(Napoli)'의 첫인상은 지금까지 이탈리아 여행 중 최악입니다.

베네치아에서 출발한 기차가 파도바, 볼로냐, 피렌체, 그리고 로마를 거쳐 2014년 12월 29일 나폴리까지 온 것은 정말 좋았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행에서 5시간 동안의 기차 여행은 시간 낭비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해 보는 시간으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죠. 하지만, 나폴리에 도착하면서부터 조금씩 불안한 조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나는 나폴리의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곧장 '국립 고고학 미술관'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기대를 가득 안고 나선 나폴리 거리. 그런데 다른 곳들보다 남쪽이라 그래도 좀 따뜻할 거라 예상했는데, 무슨 바람이 그리도 세차게 부는지요. 거의 태풍 수준의 강풍이 거리를 온통 휘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호텔까지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 몇 번이나 멈춰 섰는지 모릅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 무거운 캐리어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강풍이었습니다.

나폴리에서의 첫날, 호텔에서 한바탕 곤욕을 치룬 탓에 관람을 진행하지 못한 국립 고고학 미술관입니다.
▲ 국립 고고학 미술관 나폴리에서의 첫날, 호텔에서 한바탕 곤욕을 치룬 탓에 관람을 진행하지 못한 국립 고고학 미술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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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호텔에 도착해 보니, 객실 상태가 또 최악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다른 호텔들도 모두 저렴한 가격으로 예약한 탓에 훌륭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가격 대비 만족도는 매우 높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호텔은 너무도 어두컴컴한 객실에, 예약과 다르게 공동 구역에서만 WiFi를 이용할 수 있고, 역시 예약과 다르게 객실내 미니바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방을 밝게 해보려고 TV를 켰더니 TV마저 먹통입니다.

최악은 난방이 제대로 안 되는지 객실이 너무 춥다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프런트 직원에게 달려갔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직원은 얼버무리더니 오늘은 객실들이 다 차서 안 되고 내일 객실을 바꿔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호텔에서 직원과 법석을 떨다보니 어느새 해가 져버렸습니다.

결국 '국립 고고학 미술관' 일정은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다시 거리로 나섰더니 여전히 강풍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쓰레기 많기로 유명한 나폴리 거리. 그리고 야간 치안이 불안하기로 유명한 나폴리 거리. 그래도 따뜻한 스파게티나 리소토라도 먹으면 좀 나아지겠다 싶어 그 북새통 속을 또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역 주변엔 그 흔한 파스타 집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별 수 없이,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맥도날드로 향했습니다.

저녁을 빅맥과 차가운 콜라로 때우고, 다시 강풍 부는 거리를 지나 호텔로 돌아와 몸을 씻으려고 하니, 이번엔 온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 이런! 그동안 내가 너무 구름 속을 떠다닌 탓일까요? 낭패감이 몰려옵니다.

아예 나폴리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그럴 경우 1박의 호텔비와 미리 결제한 기차표가 날아가 버리는데) 차라리 로마나 피렌체 일정을 새로 잡을까? 아니면 '폼페이'와 '아말피 해변'만 보고 일정을 줄일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나폴리를 포기한다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 아닐까? 아직 나폴리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 늦게까지 객실에 짐도 풀지 않고 호텔 공동구역에 혼자 앉아서 답도 없는 고민을 이어가다 겨우 잠을 청했습니다.

속상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수많은 문화 유산들

차가운 겨울 날씨 탓에 더 황량하게 느껴지는 나폴리. 하지만 이들의 공연이 그나마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 거리의 공연 차가운 겨울 날씨 탓에 더 황량하게 느껴지는 나폴리. 하지만 이들의 공연이 그나마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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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전날의 실망감이 계속 이어질까하는 의구심을 안은 채 아침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여전히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 이탈리아에서 가장 추운 날을, 그것도 가장 남쪽인 나폴리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기온은 영상 2도. 그런데, 어제에 이은 강풍 때문에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 이하라고 합니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어제 소화하지 못한 일정인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탓일까요? 이탈리아의 다른 박물관들과는 달리 나폴리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화요일에 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월요일인 전날 일정으로 잡았던 것인데)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실망하고, 아니 자책하고 '산 세베로 예배당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선 환상적인 조각 작품을 만나리라는 기대로 말입니다.

좁고 차가운 나폴리 길을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 콧물을 훔쳐가며 얼마나 걸었을까요? 그런데, 힘들게 도착한 '산 세베로 예배당'도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화요일 쉰다는 공지와 함께 말입니다. 아, 이런! 이 정도면 나와 나폴리는 정말 맞지 않은 것일까요?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후회감이 밀려 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근처에 있는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Chiesa di San Domenico Maggiore)'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성당 문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틀 동안의 실망감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한 탓일까요? 성당 내부의 여러 문화 유산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훌륭한 천장화와 제단화, 조각들을 봐도 그냥 무덤덤한 기분만 이어졌습니다.

 바로크 양식 특유의 화려한 실내 장식이 눈에 들어왔지만 실망감 때문에 그냥 무덤덤한 기분으로 지나 갑니다.
▲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 바로크 양식 특유의 화려한 실내 장식이 눈에 들어왔지만 실망감 때문에 그냥 무덤덤한 기분으로 지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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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수 없이 서둘러 성당을 빠져나와 그래도 나폴리 일정 중에서 가장 많이 기대하고 있는 '산타 키아라 성당(Basilica di Santa Chiara)'으로 향했습니다. 성당 자체는 예상대로 아담하고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나고 싶은 장소는 성당 뒤쪽에 있는 '산타 키아라 수도원'의 정원입니다.

마졸리카(majolica, 화려한 이탈리아식 도자기) 타일로 장식된 기둥과 의자들이 있는 수도원 정원은 역시 기대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목가적 풍경과 이탈리아의 풍속이 그려진 의자들, 꽃무늬로 장식된 기둥들, 그리고 주변의 식물들과 작은 분수들까지 어우러져 정원 전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눈으로 보는 만큼의 예쁜 장면이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장면을 담기 위해, 칼바람이 불어오는 정원 이곳 저곳을 얼마나 많이 누비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산타 키아라 수도원의 정원은 이처럼 아름다운 타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 마졸리카 타일 정원 산타 키아라 수도원의 정원은 이처럼 아름다운 타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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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부속 박물관에 들어가 별 관심도 없는 유물들을 몇 번 훑어보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사진은 여전히 엉망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내 언짢은 기분이 사진으로 이어진 탓일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정도로 예쁜 곳이면 셔터를 대충 눌러도 어느 정도 그림이 나와야 됩니다.

문제는 빛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막 11시를 지나고 있는 시간. 겨울의 낮은 태양빛은 정원 전체가 아니라 3분의 1 정도만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주변의 건물이 만들어낸 그늘에 가려져 어두컴컴했죠. 더구나 낮은 태양빛은 마졸리카 장식 기둥들마저 긴 그림자를 만들어 이곳 저곳에서 그림들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햇빛이 밝은 곳엔 조금이나마 따뜻한 햇빛을 쬐려는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 결국 이렇게 나폴리와 나는 맞지 않는 것이구나' 하는 순간, 그나마 괜찮은 사진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연인들의 달콤한 키스 장면. 이탈리아의 수많은 곳에서 수없이 많이 키스신을 보아왔지만 그 장면들을 사진으로 담지는 않았습니다. 사생활 문제도 있고, 굳이 그런 장면을 찍을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우연히 아름다운 마졸리카 기둥 사이에서 키스를 나누고 있는 한 커플이 내 눈에 포착된 것입니다.

서둘러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랬더니 나름대로 예쁜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키스신 사진 한 방으로 그동안 언짢았던 기분도 적잖이 누그러졌습니다. 여전히 춥긴 했지만 가슴은 조금씩 따뜻해져 갔습니다.

한동안 카메라에 예쁜 장면을 담을 수 없어서 애태웠는데, 이처럼 아름다운 키스씬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 정원의 키스씬 한동안 카메라에 예쁜 장면을 담을 수 없어서 애태웠는데, 이처럼 아름다운 키스씬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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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분을 안고 정면의 벽돌 무늬가 특이했던 '예수 누오보 성당(Chiesa del Gesù Nuovo)'으로 향했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간 탓에 특별히 관심가는 문화 유산이나 예술품이 없었지만, 여타의 이탈리아 성당들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그런 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당에 의자에 앉아서 나폴리 일정을 새로 정리하고,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여행 끝까지 여행자로서의 태도를 잊지 말자는 다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내가 관광이나 휴양의 목적으로 이탈리아에 온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여행 선배들의 말처럼 작은 고생이나 괴로움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카스텔 누오보'로 향했습니다.

검정 벽돌 장식의 소박한 외관과 달리 예수 누오보 성당의 실내는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 예수 누오보 성당 검정 벽돌 장식의 소박한 외관과 달리 예수 누오보 성당의 실내는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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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나폴리 2편. 폼페이와 포지타노로 이어집니다.)


태그:#나폴리, #산타키아라성당, #산도메니코마조레, #마졸리카,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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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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