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을 여전히 알 지 못하는 50대 학부모입니다.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해 표류하는 큰애와, 은퇴 후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가 현실적인 문제가 된 저의 처지는 일응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 먼 이국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점점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문제와 베이비 부머들의 2막 인생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아울러 제 마음을 큰애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기자말

여행 기간 절반이 어느새 지나갔다

너무나 오래 기다렸던, 직장인으로서는 상당히 길어 보였던, 큰마음을 먹고 떠났던 여행기간의 절반이 어느새 지나갔다. 영 미더워 보이지 않는 큰애의 생활을 직접 보고 싶어서 계획한 여행인데 아직 확실하게 와닿는 게 없다. 오늘은 일주일 중 3일을 공부하는 큰애의 정말 편해(?) 보이는 주간 강의가 끝나는 날이다. 강의와 생활에 대해 조금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잘될지 모르겠다.

강의가 끝나는 시간까지 시내구경을 하기로 했다. 따로 구경하고 싶을 것이 많을 것 같은 작은애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우리는 엄청난(?) 인파 때문에 한국에서는 제대로 구경하기 힘든 이케아 가구점에 우선 가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지난 며칠간 트램을 타고 다니다가 차창 밖으로 본 이케아 간판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온갖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케아 광명점은 왜 그렇게 사람들로 붐비는 것일까? 북새통으로 인해 도저히 가볼 엄두를 못 내었던 이케아 가구점을 여기서 가보기로 했다.

이케아는 트램을 타고 바커스로드를 따라 가다가 야라강을 건너면 바로 왼쪽에 보이는 건물에 있다. 건물과 최단거리로 이어지는 정류장을 알 수 없으므로, 대충 근처에서 내려 걸어서 찾아갔다. 서울의 지하철과 달리 지상을 달리는 트램은 이런 점이 좋다. 지하로만 다니다 보면 나같이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수 년을 살아도 서울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지상으로 달리는 트램을 타다 보니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제는 대충 멜버른의 지리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

아침 겸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해서 약 3시간 정도 머물렀던 이케아 가구점에서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엄청난 규모의 창고형 매장인데, 의외로 물건 찾기가 쉽다'는 것이었다. 필요한 가구를 별로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디쯤 어떤 종류의 가구가 있을 것인지 대충 예측 가능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완전히 비어있는 집에 가구를 채워 넣는 것처럼, 큰 가구인 옷장에서 시작해 쇼파 테이블 등 거실 및 주방가구를 거쳐 작은 소품으로 끝나는 쇼핑 동선이 물흐르 듯 자연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결국 하나도 사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나의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인상적이었다. 침실을 우아하게 장식할 수 있는 캔들과 같은 소품들은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하나쯤 샀을 것인데, 이제는 집안에 뭐 하나 새로운 것을 들여 놓는 것이 부담스러운 나이가 됐다. 계속 집었다 놓았다 망설이다 결국은 포기하고 돌아서긴 했지만, 적당한 가격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낭만적인 감성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소품들이 정말 많았다.

-신혼부부의 살림집 같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 이케아의 쇼룸 -신혼부부의 살림집 같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 정성화

관련사진보기


매장 중간쯤에 있는 쇼룸에서는 아내가 관심을 보였다. 10평쯤 되어 보이는 생활공간에 살아 가는데 필요한 가재도구들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가구라고 하면 무겁고 둔하여 다루기 힘든 중량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케아 가구는 가볍고, 날렵한 느낌이었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민박집 침대도 이케아 제품이었는데, 단순한 구조이지만 침대에 누우면 편안했다. 결론적으로 이케아 가구는 실용적이고 가격이 저렴해서 부담없이 구입하고, 부담없이 버릴 수 있는 마음 편한 가구인 것 같다.

아직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수요일, 일주일 강의가 끝나서 그런지 큰애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들리지도 않는 강의를 듣느라 고문받다가 해방된 기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큰애는 강의를 어떻게 따라갈지, 무사히 졸업은 할 수 있을지 암담한 심정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이제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아직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번 주는 더 이상 큰애의 수업이 없으므로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놀러 나갔다. 빅토리아 마켓에서 국제 음식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멜버른에 오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다인종 국가라는 말이다. 호주는 처음에는 영국 죄수들의 유형지로, 그 다음에는 형기를 마친 죄수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중심이 돼 건설한 나라이다. 한때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같이 인종차별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백호주의를 포기하면서 유색인종의 비중이 커졌다.

큰애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인들이 몰려오기 전에는 호주에서 대학만 졸업하면 영주권을 줬다고 한다. 그만큼 일손이 부족했다는 의미인데, 중국인들이 진출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집값이 엄청 오르고 영주권 따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중국이 움직이면 남아나는 게 없는 것 같다. 제조업 일자리를 모두 가져가는 바람에 전세계 청년 실업률이 올라 갔다. 여기 호주에서는 고급 주택이 나오면 에누리 없이 바로 사간다고 한다.

요란한 음악소리, 음식 익는 구수한 냄새, 나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아직도 이런 분위기에 흥분하는 것이다. 거기에 알코올이 곁들여지는 것이 문제지만…. 난 술을 좋아하고, 한창 때에는 2차·3차 다니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아침에 그냥 출근한 적도 몇 번 있다. 그러나 지금은 보통 1차로 끝나고, 일단 술을 마시면 얼마 못 버티고 잠들어 버리기 때문에 한잔 하면 그날 스케쥴은 그걸로 끝나 버린다.

-전세계 다양한 요리를 맛 볼 수 있다.
▲ 빅토리아 마켓 국제음식축제 -전세계 다양한 요리를 맛 볼 수 있다.
ⓒ 정성화

관련사진보기


그래서 세계 각국의 음식이 즐비한 거리를 나는 구경만 했다. 하나 같이 맛있는 술안주로 군침을 돌게 했지만 유혹을 떨쳐 버리고 시장을 벗어난 곳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한잔 마시고 여기서 스케쥴을 끝내면 안 된다. 디저트는 시내에 있는 초콜릿바에서 먹었는데 레스토랑과 마찬가지로 노동이 개입되면 원가가 어떻게 반영하게 되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가격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큰애의 수업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뭐 많이 배웠어?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 거야?"
"지난 주 월요일 학교에 처음 갔는데, 쉐프들이 나와서 준비물에 대해서 다시 오리엔테이션을 해줬어."

이때 큰애는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다음 날 워크플랜 같은 실질적인 수업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했다고 한다. 오후에는 쉐프들이 조별로 학교 구경을 시켜 줬는데 내가 보기에는 하나처럼 보였던 건물이 A, B, C, D동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A, B동에는 사무실 및 도서관과 같은 학생공간이 있고, C, D동에 강의실과 실습실이 있다고 한다.

다음 날 화요일 오전부터 바로 실습이 있었는데 갈릭버터와 샐러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갈릭 버터는 냉장고에서 버터를 꺼내 놓으면 시간이 지나면 녹잖아? 그럼 마늘 하고 파슬리 다진 것, 레몬즙, 소금 약간 넣고 잘 섞어서 포장용기에 담아서 모양을 잡은 후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다른 요리 할 때 소스로 사용해. 샐러드 만든다고 야채 썰 때 좀 당황했어. 그 전에 칼을 써 본 적이 없잖아."

- 호주 배는 무우 맛과 비슷하며, 모양도 우리 배와 다르다
▲ ▶ 두 번째 주 실습요리 디저트, 레드와인에 배를 졸인요리 - 호주 배는 무우 맛과 비슷하며, 모양도 우리 배와 다르다
ⓒ 정성화

관련사진보기


이렇게 말을 시작했지만 큰애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많은 요리실습을 소화하고 있었다. 등록금을 많이 내는 유명 학교인 만큼 개인별로 스토브가 있고, 학생수도 한 반에 10명 정도로 적은 편이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타이트한 관리가 가능한 모양이다.

지난주 수요일에는 크라페와 사과 필렛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두 번째 주에는 월요일 3가지, 화요일 5가지, 수요일 4가지 요리실습을 하고 바로 이론 및 실습 시험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1학기 동안의 요리실습은 요리에 필요한 기술을 세분하여 그 것을 하나씩 배우는 데 적절한 요리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칼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샐러드를 만들고, 파스타는 끓이는 방법, 푸딩은 찌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큰애는 오늘밤은 작은애를 자기 집에 데려가서 함께 자겠다고 했다. 우리도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한다. 나는 안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아무리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동생은 왜 데려가도 괜찮은 것일까? 둘 만의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이제 성인이 된 큰애를 윽박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착실하고, 우리 편(?)으로 보였던 작은 애에게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끼면서 우리 부부는 민박집으로 가는 트램을 탔다. 언젠가는 말을 해주겠지. 그렇게 위안하면서….


태그:#맬버른, #요리, #쉐프학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