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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을 여전히 알 지 못하는 50대 학부모입니다.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해 표류하는 큰애와, 은퇴 후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가 현실적인 문제가 된 저의 처지는 일응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 먼 이국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점점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문제와 베이비 부머들의 2막 인생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아울러 제 마음을 큰애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기자 말

1990년대에 무주에 있는 스키장을 자주 갔었다. 회사에서 스키장 회원권을 구매해서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당시만 해도 회사에 스키 인구가 많지 않아서 쉽게 예약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부킹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

회사가 구매한 회원권으로 사용하는 콘도는 '세솔동'으로 무주 리조트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스키 슬로프 바로 옆에 콘도 출입구가 있어서, 무거운 스키를 들고 불편한 스키신발을 신고 뒤뚱거리며 힘들게 멀리 걸어 가지 않아도 된다.

스키를 타다가 힘들어서 쉬고 싶을 때, 또는 배가 고파서 간식을 먹고 싶을 때에는 스키 슬로프와 연결되는 출입구를 통해 바로 콘도로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그 스키 슬로프 옆에 노천탕이 있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 야외에서 수영복만 입고 들어 가는 노천탕이 스키슬로프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노천탕은 자그마한 수영장과 몇 개의 원형 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키를 타면서 뭉친 근육을 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몇 미터 밖은 눈이 쌓여 있는 스키 슬로프이고, 머리 위로는 찬바람이 몰아쳤지만, 탕에 뜨거운 물이 있으면 전혀 춥지 않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 나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아직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한번 가보고는 그 다음부터는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수영복만 입은 노출이 심한 상태에서 남녀가 마주 보며 좁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이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TV 다큐멘터리나 여행기에서 야외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여행도 실력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 사방 어디를 봐도 끝 없는 지평선이 펼쳐진다
▲ 페닌슐라 온천 정상 - 사방 어디를 봐도 끝 없는 지평선이 펼쳐진다
ⓒ 정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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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모닝턴 페닌슐라 온천(Mornington Peninsula Hotsprings)이 우리의 호주 여행 6일째 방문지이다. TV에서 보았던 노천온천과 같이 자연적으로 지상으로 분출되는 온천이 아니라, 지하 깊은 곳에서 펌프로 뜨거운 물을 산 정상까지 퍼 올려서 흘러내리도록 했다.

산 정상에서 흘러 내린 온천수는 낮은 지대에 있는 클럽 하우스까지 오는 동안 여러 군데에 아름답게 구성된 노천탕을 거치지만 출발할 때와 거의 비슷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리인들이 수시로 온도계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온을 체크하면서 탕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중간중간 있는 탕에 뜨거운 온천수를 공급하는 별도의 배관은 있는데, 각 탕의 온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하여 기계적으로 자동 제어하는 시스템은 아닌 모양이었다.

인터넷에서 모닝턴 페닌슐라 온천을 검색해서 여행기를 읽어 보면 야경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갖가지 조명을 사용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금 다시 거기에 간다면 당연히 오후 늦게 입장하여,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고, 환상적인 조명 사이로 호주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과 함께 하는, 오래 남을 아름다운 추억을 담아 올 것이다.

호주 가기 몇 달 전부터 어떻게 여행을 할까 고민했지만, 생각만 있었을 뿐 체계적인 사전조사를 하지는 못했다. 여행도 실력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통해서 잘 알지 못하는 곳을 여행할 때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아무튼 그래도 괜찮았다. 온천에 들어 가기 전에, 일단 온천에 들어가면 뭘 해먹지 못하니까, 근처 공원에서 숲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여 바베큐를 먹으면서 놀았던 것도 괜찮았고, 뜨거움과 시원함을 함께 즐겼던 한낮의 노천탕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온천에 들어 오기 전에 스테이크를 안주로 해서 위스키를 마신 나는 이미 얼큰해진 상태였다. 몽롱한 상태에서 용감하게(?) 수영복을 입고 노천탕으로 들어갔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 틈에서 예전에 느꼈던 민망함을 털어 버리고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야외의자에 누워 피곤이 만들어 준 달콤한 수면을 즐겼다. 여러 가지 테마로 만들어진 온천탕들을 들락날락 하며, 우리는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모닝턴 페닌슐라 온천은 한국과 같이 산악지형에서 살아 온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넓은 평야지대에 약간 솟아오른 야트막한 야산에 있다. 산 정상의 노천탕에 앉아 있으면 아름답게 펼쳐진 목장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후좌우로 펼쳐지는 광활한 목장지대를 뭔가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가지고 오랜 시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D'를 받으면 다음 학기에 등록금을 더 내야 한다

-‘유출 시 피의 복수가 있을 예정’이라는 큰애의 엄포 때문에 성적부분은 삭제를 했다. 가장 오른쪽 열에 있는 ‘배정시간’을 보면 과목별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다.
▲ ▲ 큰애 1학기 성적표 일부 -‘유출 시 피의 복수가 있을 예정’이라는 큰애의 엄포 때문에 성적부분은 삭제를 했다. 가장 오른쪽 열에 있는 ‘배정시간’을 보면 과목별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다.
ⓒ 정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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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디테일은 사라지고, 아련한 느낌만이 남아 있는 여행 기억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1학기를 마친 큰애가 성적표를 메일로 보내 왔다. 'D'가 하나도 없는, 내 소박한 바람을 충족시켜 주는 성적표였다.

대학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장학금을 받은, 작은 애의 성적표에서 느꼈던 기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배움의 길에 다시 들어선 증거를 받은 느낌, 돌을 전후에서 큰애가 처음 벽을 집고 일어나 걸음마를 시작하였을 때 느꼈던 신기함이랄까.

솔직히 도저히 배움의 실타래를 잡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큰애의 고등학교, 대학교 성적표에서 받았던 낙담에서 비로소 벗어나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마법의 메일이었다. 공부 잘 하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겠지만.

윌리엄 앵글리스에서는 수시평가를 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이렇게 모아서 시험을 치르지 않고, 요리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17개 과목으로 세분하여, 해당 과목 수업 진행 중에 수시로 평가한 것을 종합하여 수료 여부를 판단한다.

큰애 이야기에 의하면 17개 항목 중에서 이론만 있는 과목은 주로 'C'를 받았고, 이론과 실습이 같이 있는 항목은 평균을 내는데, 이론은 'C'에서 'B'로, 실습은 'B'에서 'A'로 발전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로'B',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A'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Work effectively with others(다른 동료들과 협력하여 효과적으로 일하기)' 과목은 'C'를 받았는데, 이 과목은 동료 학생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한 결과를 평가 받는 순수 이론 과목이다. 실습은 샐러드나 소스 농도 조절과 같은 섬세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요리 과목이 어려웠다고 한다. 'D'를 받은 과목은 그 다음 학기에 다시 수강해야 하는데, 한국과 달리 그에 해당하는 등록금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큰애의 성적표를 분석해보니 시간이 많이 할당된 과목은 거의 'A', 'B'를 받았고, 10시간 내외의 짧은 시간이 배정된 과목은 'C'가 많았다. 이건 영어실력 때문인 것 같다. 강의가 길어지면 큰애가 모자란 영어 실력을 다른 방법으로 커버할 기회가 많아지고, 짧은 강의는 그럴 여유가 없이 끝나 버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큰애의 성적표를 반복해서 보고, 1학기 커리큘럼을 여러 번 읽으면서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글자들이 이제는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법전 읽는 방법을 익혔던 것처럼, 요리 공부하는 아들을 둔 덕분에 요리학교의 커리큘럼을 어느 정도 읽고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 이야기에 그동안 파악된 내용을 내 수준에 맞게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해 볼까 한다.


태그:#호주유학, #멜버른, #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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