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트레킹에 혼자왔다면 외로웠을 것이다. 지칠 때 옆에서 응원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면, 그 지난한 길들이 더 길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단체 관광객들에게 밀리고(?) 있는 오늘 아침도 혼자였다면 더 외로웠을 것 같다.

어제 저녁 늘 그래왔듯 시간까지 정해 다음날 아침을 미리 주문해놨지만 예정된 시간이 지나고도 감감무소식이다. 대신 테이블을 모두 차지한 수십 명의 중국 관광객들 앞으로 아침밥이 끊임없이 배달됐다. 그들의 가이드는 힘찬 목소리로 오늘 일정을 설명했다.

로지 식당 구석, 배낭들 사이에 앉아 있는 우릴 보고 포터 아저씨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10분만", "15분만"을 외치고 있었다.

"어제 눈사태가 나서 MBC 가는 길이 덮였어요"

"원래 이 길로 가는데 눈사태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가야 겠네요."

데우랄리에서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3700m)로 가는 길. 포터 아저씨는 여기에 길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눈이 수북이 쌓인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 덮인 언덕인 줄 알았던 그곳이 MBC로 가는 빠른 길이었다는 거다.

3000m가 넘어가고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130m)에 가까워오니 그간 못 봤던 눈 쌓인 구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데우랄리에서 MBC로 가는 길은 눈사태 상습 구간이기도 하다. 곳곳에 눈사태를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도 어제 눈사태가 났네요."

MBC까지 돌아서 가는 길에도 눈이 쏟아져 있다. 흘러내린 눈의 규모가 상상 이상인데, 순식간에 길을 덮쳤을 걸 생각하니 아찔하다. 저 멀리서 우르르 쾅쾅 하는 소리가 들리자 포터 아저씨는 "눈사태 소리"라고 알려줬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다.

오늘도 역시 시간과 머릿수와의 싸움이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ABC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지만 빈 방이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벌써 중국 단체 관광객 20여 명, 캐나다 관광객 40여 명, 네팔 관광객 20여 명이 ABC로 올라가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다.

"찌아요우.(중국어로 '힘내')"
"오, 헤이~ 안녕."

시누와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인리를 길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의 크고 작은 가방 여러 개를 양손에 주렁주렁 든 포터도 힘겹게 뒤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너희들은 오늘 어디까지 갈 거야? ABC에서 잘 거니?"
"글쎄 상황을 봐야 할 것 같아. 스프링 시즌이라 방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해서. 넌?"
"난 ABC까지 가보려고."

인리는 ABC에서 꼭 묵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포터는 다이닝룸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했지만 인리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ABC에 방이 없대요."
"트리플룸도요?"
"네.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올라가서 어제같은 다이닝룸도 없을 수 있어요."

슬픈 소식은 생각보다 일찍 날아들었다. 빈자리가 있다 해도 묵을지 말지 고민되는 다이닝룸마저 없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ABC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MBC엔 빈 방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욕심내지 않고 MBC에 짐을 풀고 ABC에 다녀오기로 했다.

"술 마신 다음날 같아" 느닷없이 찾아온 고산병

ABC로 가는 길. 맨몸인데도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 평지에 비해 산소량이 부족한 고산지대라 2시간 넘게 이어지는 눈길이 조금 더 힘겹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밟아 다져놓은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금세 허벅지까지 눈에 빠졌다. 내 몸 하나 이끌고 가기도 힘든 눈길을 단체 관광객들의 커다란 짐을 멘 포터 10명 가량이 오르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구름이 잔뜩 몰려, 올라가는 내내 뿌옇다. 다행히 ABC에 도착하니 날이 맑아져 사방이 모두 보인다. 푼힐 전망대가 멀리서 설산을 조망하는 느낌이라면 ABC는 설산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사람들은 그 설산의 품에서 볕을 쬐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익숙한 얼굴들도 눈에 띈다. 타다파니 로지에서 만났던 캐나다 관광객이 보이고, 며칠 전 식당에서 봤던 중국 단체 관광객들도 있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인리는 중국 단체 관광객들 방에서 하룻밤 같이 잘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ABC 풍경을 충분히 감상한 뒤 다시 MBC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수월했다. 문제는 그날 밤 로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요."
"저도요. 꼭 술 마신 다음날 숙취같네요."
"저는 괜찮은데... 혹시 몰라서 포카라에서 다이아막스(고산병 치료제) 사왔는데 그거 드릴게요."

MBC까지 같이 올라온 두 오빠가 가벼운 고산병 증세를 호소했다. 어젯밤 머문 데우랄리(3230m)와 오후에 다녀온 ABC(4130m)는 고도가 900m 가량 차이가 난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둘은 속이 좋지 않다며 저녁으로 주문한 라면과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다행히 약을 먹은 뒤 증상은 더 나빠지지 않았다. 무리해서 ABC에 묵지 않은 게 다행인 순간이었다.

MBC의 밤하늘은 고산지대답게 수많은 별들로 빛났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다. 트레킹 중 가장 아름답지만 힘든 밤이 지나고 있었다.

<시시콜콜 정보>

- MBC vs. ABC, 어디서 잘까? : ABC는 4130m에 위치해있다. 많은 여행자들이 다음날 일출 등을 위해 ABC에 묵길 원한다. 하지만 약간이라도 고산병 증세가 있거나 자신이 고산병 증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경우라면 ABC에 묵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벼운 고산병 증세는 많은 이들이 겪지만 하루 사이에 얼마나 나빠질지 장담할 수 없는 것도 고산병이다. 고산병이 뇌와 폐에 물이 차는 뇌수종이나 폐수종으로 악화된다면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도 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찾아올 수 있는 것이기에 미리 조심하는 게 좋다.

- 스패츠 그리고 선글라스 : 트레킹을 할 때 아이젠은 많이들 챙기는데 스패츠는 빼놓는 경우가 적지않다. 하지만 스패츠도 같이 챙기는 게 좋다. 바지와 등산화, 양말 등이 젖지 않게 막아준다. 더불어 눈에 반사된 햇빛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이로 인해 포카라에선 판다처럼 동그랗게 눈만 빼고 얼굴이 벌겋게 익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코끝이 타는 경우도 부지기수. 선글라스와 선크림 역시 꼭 챙기자.

- 가방은 하나로 : 가방 여러 개를 주렁주렁 지고 산에 오른다면 어떨까? 당연히 불편하고 성가실 것이다. 우리가 그렇다면 포터 역시 불편하다. 가방 하나에 짐을 정리해 맡기자. 큰 가방이 없다면 포카라에 있는 트레킹숍에서 60리터 기준, 하루 70루피(한화 800원) 가량에 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