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몇십 분이고 곰곰이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은 우리나라도 섭섭지 않게 오지만 이건 '클라스'가 다르다. 어딜 봐도 너무 하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너무 아름답지만 생소해 비현실적인 풍경. 하늘이 반, 별이 반이었던 인도 레 밤하늘 이후 두 번째다. 이번엔 선글라스를 벗지 못할 만큼 눈부시다.

ABC(4130m)에서 MBC(3700m)로 내려가는 길. 텅 빈 길 위에서 내 숨소리만이 귓전을 때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밭을 헉헉대며 걸어가는데 저기 앞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이~ 일찍 올라갔네! 역시 젊어서 빨라."

이틀 전 시누와(2340m) 로지에서 만난 한국인 아줌마·아저씨 그룹. 각양각색의 등산복만큼이나 그들의 경험도 천차만별이었다. 이번이 처음이라는 이부터 히말라야 트레킹만 여섯 번째라는 아줌마까지…. 그중 '지난번에 못 본 ABC 풍경을 이번엔 꼭 보고 싶다'며 눈을 이글거리던 아저씨에게서 대장의 냄새가 났다.

"아 ABC에 왔으면 일출을 봐야지."

무리를 이끌던 '대장 아저씨'의 한마디는 우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는 눈밭에 어정쩡하게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우리에게 아이패드 속 일출 사진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보여줬다.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내일 새벽에 꼭 올라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내 인생의 절경, 여기로구나

'대장 아저씨'한텐 미안(?)하지만 우린 그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우리는 사위가 조금씩 붉게 물드는 MBC에서의 일출을 본 뒤 하산을 시작했다. 마음 한편에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왕복 3시간이 훌쩍 넘는 눈길을 그것도 깜깜한 새벽에 다시 오르고 싶진 않았다(그날 밤 일행들에게 찾아온 고산병 때문에 오를 수도 없었겠지만). 

"ABC는 산 속이라, 오후에 보나 아침에 보나 비슷해요."

포터 아저씨의 심드렁한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여행을 여행처럼 즐길 수 있는 선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하기로 했다.

"잘 잤어요?"
"네, 아저씨 몸은 괜찮아요?"

어제 MBC에 도착한 직후 아저씨는 고산병인지, 컨디션 난조인지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안좋다고 했다. 그래서 MBC에서 ABC까지의 눈길도 우리끼리 다녀온 터였다. 다행히 하루만에 그의 얼굴색은 한결 나아졌다.

의아하겠지만, 포터와 가이드들도 고산병에 걸린다. 자신의 포터가 고산병에 걸려 그의 가방까지 메고 산길을 되돌아 내려왔다는 이도 있다. 고도를 낮추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고산병은 때론 경험도 초월하는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은 좀 쉬우려나 했는데, 히말라야에서 쉬운 건 없나보다. 이른 아침 꽁꽁 얼어붙은 길은 빙판처럼 미끄러웠다. '히말라야 날다람쥐' 포터 아저씨도 벌써 두 번째 엉덩방아를 찧고 있다. '하산 열등생'인 나는 오죽할까. 그나마 아이젠 덕분에 엉덩이를 쭉 뺀 채 설설 기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또 눈사태가 났네요."

지난 아침 올라올 때 눈사태가 났던 구간에 하룻밤 사이 또 다시 눈사태가 발생했다. 새로운 눈이 길을 덮었고, 트레커들은 조심조심 그 위에 다시 길을 새기고 있었다. 트레킹 내내 우리를 단 한 번도 재촉한 적이 없었던 아저씨가 "정말 위험한 구간"이라며 "빨리 빨리 가자"고 서둘렀다.

시누와까지 내려가는 길도 오르막과 내리막, 계단의 반복이다. 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스틱을 줄였다 늘렸다 하면서도 내가 이 길을 어찌 올라왔나 싶어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뭔가 빠뜨리고 온 것처럼 아련하고 아쉽고 이상한 기분. 죽기 직전에 머릿속에 스친다는 주마등이 이런 걸까. 내가 차를 마셨던 가게, 머물렀던 로지, 쉬었던 돌담을 거꾸로 훑어내려오는데 영 기분이 이상하다.

"여긴 경비행기 타고 보는 걸로... ㅎㅎㅎ"

포카라를 떠난 이후 나의 '아침 의식'은 매일 같았다. 젖었다 말린 옷에서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것으로 하루를 열었다. 그중 가장 냄새가 안 나는 옷을 골라 입는 것으로 그날의 단장은 끝. 땀에 젖은 옷을 말려 입고 있으니 샤워를 못한 하루가 일주일처럼 느껴졌다.

시누와 로지에 도착해 이틀만에 샤워를 하니 살 것 같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아귀 안 맞는 문에, 온수가 나왔다 말다 밀당하는 샤워기를 붙들고 있어도 행복하다. "으아…." 물티슈가 아닌 물로 세수를 하는 이 산뜻한 기분.

오늘 같은 날은 축배를 들어야지. 오빠 둘과 식당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500ml 한 캔에 무려 600루피(한화 6600원)짜리 금맥주! 물에 물 탄 듯 술에 물 탄 듯 밍밍한 맛도 좋다. 식당에 앉은 다른 이들도 하산길이라 그런지 다들 홀가분한 표정이다.

"다음에 다시 오실 거예요?"
"저는 그냥…, 푼힐 정도만 갈래요. 여긴 경비행기 타고 보는 걸로…. ㅎㅎㅎ"

나 역시 '꼭 다시 올 거라'는 말이 쉽게 입밖으로 안 나온다. 그건 정말…, 생각 좀 해보고…. 시원섭섭한 밤. 설산과 이별할 날도 머지 않았다.

※ 다음날 새벽, 헬기 한 대가 ABC 방향으로 향했다.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놓인 모양이었다. 지난밤 내내 앓다 동이 트자마자 헬기를 불렀음직한 시간. 그날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내내 비가 내렸다. 그나마 조금만 늦었어도 비 때문에 헬기가 뜨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될 수도 있었을 그 사람이 무사하길 빌었다.

<시시콜콜 정보>

- 와이파이(wifi)는 어디까지? : 내가 트레킹 갔던 2015년 3월 말에는 시누와(2340m)에서도 와이파이가 '터졌다'. 와이파이 이용 높이는 지금도 높아지고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론 와이파이 터지는 걸 찾는 것보다 와이파이 터지는 데서 이를 안 쓰고 '참는 게' 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