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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향욱 '설화' 사건으로 온 사회가 떠들썩하지만 정작 학교는 차분하리만큼 조용하다.
 나향욱 '설화' 사건으로 온 사회가 떠들썩하지만 정작 학교는 차분하리만큼 조용하다.
ⓒ 변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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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과 애먼 개, 돼지가 주요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세월호 참사 때도 이랬나 싶을 정도로 언론들마다 여전히 머리기사를 채우고 있다.

여기저기에 달린 댓글만 이미 수십 만 개가 넘고, 끝내 교육부는 '제 식구 감싸기'를 포기하고 인사위원회에 그에 대한 파면을 요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성난 여론에 떠밀려 투항을 한 셈이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희대의 '설화' 사건이지만, 정작 분노로 차고 넘쳐야 할 학교는 차분하리만큼 조용하다. 언뜻 학교의 분노를 울타리 밖 사회가 대신 해주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누리과정, 대학구조 개편 등 굵직한 교육정책들을 총괄해왔다. 사실상 그가 우리 교육의 '디테일'을 좌지우지해왔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말하자면, 학교는 해바라기가 되어 '나향욱표 정책'에 따라 춤을 췄고, 교육부 이름으로 내린 그의 지침을 추상과 같이 여겨 충실히 따라야만 했다. 항상 그는 '두뇌'였고, 일선 교사들은 그에 따라 움직이는 '수족'이었다.

교육부 내 요직을 두루 거친 고위의 직업 공무원이니, 학교 입장에서야 잠깐 왔다 떠나는 '문외한' 장관보다도 더 힘센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의 손을 거친 정책은 고스란히 아이들 일상을 지배한다. 그에게 '사육' 당하고 있는 '핵심 당사자'인 아이들은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부러 학년별로 여러 아이들을 불러 졸지에 개, 돼지가 된 '소감'을 물어보았다. 포털에 달린 댓글과 비슷한 욕지거리부터 나올 줄로 예상했는데, 아이들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물론, 첫 마디는 "기자가 오버한 것 아냐?"였지만 말이다.

'나향욱'을 통해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아이들

한 아이는 영화 '내부자들' 속 이강희(백윤식 분)이 나향욱이 되어 나타난 것 뿐이라고 말했다.
 한 아이는 영화 '내부자들' 속 이강희(백윤식 분)이 나향욱이 되어 나타난 것 뿐이라고 말했다.
ⓒ 영화'내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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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아이들은 '나향욱'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과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몇몇 아이들은 숫제 그를 편들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고 설파한 예수의 말을 인용하며, 그에게 당당히 돌팔매질 할 수 있는 이 땅의 어른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 반문했다.

부모도 교사도 입만 열면 "경쟁에서 이겨 1%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무슨 주술처럼 되뇌는 판에, 개, 돼지라는 말 좀 썼다고 무슨 대수냐는 거다.

비유가 거칠었을지언정, 그의 말이 새삼스럽진 않다며 거드는 아이도 있었다. 영화 <내부자들>을 두 번이나 봤다는 그는 내게 영화를 보며 내내 우리 현실의 반영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느냐며 물었다. 그 영화를 판타지 같은 오락물로 여긴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단 한 명도 없을 거라면서, 영화 속 '이강희(백윤식 분)'가 현실 속 '나향욱'이 되어 나타난 것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 속 유명한 대사처럼 냄비 끓듯 하는 그를 향한 여론의 돌팔매질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것이라며 내기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번 일은 그저 대한민국엔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한 사례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층의 전유물로 여겼던 '헬조선'이라는 말은 이제 은유를 넘어 고등학생 아이들에게조차 엄연한 현실로 굳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의 '비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구동성 대한민국은 이미 신분제 사회라고 규정했다. 어디 헌법 조문에 명시되어 있어야만 신분제 사회냐면서, 온 사회에 만연한 '갑질'이 그 증거라고 했다.

'을'의 자리에 있을 땐 설움에 분노하면서도, '갑'의 자리에 올라서면 보복이라도 하듯 '갑질'을 해대는 모습이 봉건시대 신분제와 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대학과 고등학교 서열은 이미 공고한 상태이고, 학군과 아파트의 시세에 따른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서열까지 공공연한 상태라는 건 유치원생들도 다 안다고 했다. 그저 신분의 기준이 '혈통'이 아닌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학교 내에서도 특별반을 꾸리고, 수준별로 수업하는 걸 합리적이라 여기는 마당에 "상하 격차가 존재하는 사회가 합리적"이라는 그의 말에 분개하는 건 괜한 트집이라는 의미다.

구조 문제 깨트리지 못하면 제2, 제3의 나향욱 나온다는 아이들

아이들은 그를 그 자리까지 올라오게 한 승진 구조가 더 문제며, 그것을 깨뜨리지 못하면 제2, 제3의 '나향욱'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사진은 우리 사회를 풍자한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중 한 장면)
 아이들은 그를 그 자리까지 올라오게 한 승진 구조가 더 문제며, 그것을 깨뜨리지 못하면 제2, 제3의 '나향욱'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사진은 우리 사회를 풍자한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중 한 장면)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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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렇듯 그의 '말'은 '두둔'했을지언정 그의 '속내'엔 혐오로 맞받았다.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를 내 자식의 일처럼 생각하는 건 위선"이라고 못박아버리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한 아이는 맹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측은지심조차 없는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고위공직자가 되고 1% 안에 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마저 버려야 하는 것이냐고 꼬집기도 했다. 2년이 넘도록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가 여태 전가의 보도처럼 이야기하는 예산과 법 규정 문제가 아니라,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나향욱'들이 정부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 아니냐는 거다. 추모의 마음을 단박에 위선으로 여기는 정부라면, 진상규명은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다.

대화는 사뭇 깊이를 더해갔고, 구조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한 아이는 그를 '희생양' 삼아봐야 달라질 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교육부가 그의 인격과 자질을 몰랐을 리 없고, 그럼에도 최고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번 사건을 결코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곧, 그를 그 자리까지 올라오게 한 승진 구조가 더 문제며, 그것을 깨뜨리지 못하면 제2, 제3의 '나향욱'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책기획관이라는 요직은 그처럼 인식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면, 이미 교육부는 '나향욱'들에 의해 장악돼 있다고 단언했다.

"술에 취해 나온 말실수"라는 교육부 대변인의 어이없는 해명이 그걸 증명해주는 것 아니겠냐며 덧붙였다.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그는 국회에 나와 머리를 조아렸지만, 아이들은 그 행동이 이런 뜻이라며 조롱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재수 없이 걸렸네!"

"그의 신상을 털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는 한 아이는 쓸 만한 건 하나도 못 건졌다면서도, 대신 교육부 고위공직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게 됐다며 뿌듯해했다.

그는 교육정책을 만드는 교육부 고위공직자들이라면 당연히 대부분 오랜 경험을 한 교사 출신인 줄로만 알았단다. 그런데, 대부분이 노량진에서 오랜 기간 책과 씨름해 온 행정고시 출신이라는 데 대해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교직 경력이 전무한 사람들이 어떻게 교육정책을 기획할 수 있는지 의아하다면서, 면허도 없이 운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또, 전국의 수십 만 교사들이 그걸 알고도 지금껏 잠자코 있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교육과정과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대학입시제도도 결국 '선무당이 사람 잡은 셈' 아니냐면서, 이를 방조한 무기력한 교사들의 책임도 작지 않다고 말했다.

나 기획관은 99%를 두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되는 개, 돼지라고 규정했지만, 열띤 대화의 장에서 만난 자칭 99% 아이들은 그의 바람대로 개, 돼지처럼 살 것 같지는 않다.

비록 1%를 위한 온갖 교육정책이 쏟아지고 학교에 하달돼 강제된다고 해도 순순히 응할 아이들도 아니다. 당장 그가 앞장서 추진했다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부터 힘 합쳐 되돌리자고 의기투합하는 아이들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지금껏 교사는 교육부의 충견이었냐"는 한 아이의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돈다. 고백하건대, 수업 때마다 요즘 아이들이 시든 배추 마냥 아무런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다고 나무랐는데, 어쩌면 그가 꼬집은 교사들의 무기력이 그들에게 시나브로 전염된 건 아닌지 순간 반성하게 됐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마음이 바빠졌다.


태그:#나향욱,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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