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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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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복과 파풍도를 쥔 자는 한차례 손속을 주고받고는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대치하였다.

"웬놈들이냐?"

조복이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황궁의 명(命)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물건을 건네면 없는 일로 할 터이니 순순히 내놓기 바란다."

키 큰 자가 품에서 은화사 비첨을 꺼내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하하하, 황궁의 명이 아니라 불알 없는 자들의 주구(走狗)에 불과하겠지. 하긴 씨없는 자들은 황궁에 거처하니 황궁의 명이라면 명이겠구먼."

조복이 크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본좌는 무정도이고, 옆에 계신 분은 구대문파도 벌벌 떨었던 예검비화 채대협이시다."

무정도 동백웅은 상대에게 관(官)의 위엄이 먹히지 않자 강호의 예(江湖之道)에 따라 자신과 채욱의 정체를 밝혔다. 적어도 강호의 풍문을 아는 자라면 아까처럼 조롱으로 나오진 못하리라. 이쪽의 위의를 보임으로써 상대의 기를 꺾고 진인의 유품을 진상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호오, 무정돈지 유정돈지, 예검인지 둔검인지, 본관은 강호에서 쇠꼬챙이 가지고 장난질치는 애들의 별호 따윈 관심 없다."

조복이 어림없다는 투로 말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동백웅이 파풍도를 이마 높이로 들어 거정세(擧鼎勢)를 취하고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조복은 장검을 어거세(御車勢)로 잡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언제든 동백웅의 복부를 찌를 것 같은 자세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파압,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동백웅의 파풍도가 조복의 관자놀이를 베어나갔다. 조복이 고개를 살짝 숙여 피하는가 싶었는데 파풍도가 빙그르 한바퀴 돌더니 연이어 조복의 복부를 노렸다.

팔이 긴 동백웅이 몸통을 한 바퀴 회전하며 휘두르니 속도는 물론이려니와 칼날이 넓은 도의 무게까지 더해 엄청난 위력이 되었다. 조복은 일초를 피하고 이초에선 맞부딪쳤다. 검신(檢身)으로 도의 날을 허리께에서 받았다. 쩌엉, 하는 소리가 울렸다. 손목이 시큰하더니 이어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역시 사천제일 무정도다웠다. 조복이라고 어찌 무정도의 무명(武名)을 듣지 못했겠는가. 다만 대결에 앞서 상대의 심리에 말리지 않기 위해 모른 척 했을 뿐이다. 

동백웅은 상대가 자신의 파풍도를 대놓고 맞부딪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검의 면과 도의 날이 부딪치면 검의 중동이 부러지기 십상인데 상대의 검은 지르르르 진동만 하였다. 이는 검을 쥔 자가 손목으로 검신의 충격을 제어했기 때문이다. 예사로운 자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상대의 검이 눈앞에서 현란하게 원을 그렸다. 이건 무슨 검식인가? 중원의 검술이 아닌 변칙이구나. 동백웅이 이 보(步) 물러섰다가 왼쪽으로 돌려는데 왼쪽 옆구리에 휑하니 바람이 들어왔다. 아뿔사, 당했구나. 상대의 보법이 기묘하게 자신의 보를 파고든 것이다.

물러설 때 베이게 되는 자신의 안면을 방어하기 위해 파풍도를 높게 휘두른 것이 중단에 틈을 주고만 것이다. 깊지 않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어진 연속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삼보 뒤로 물렀으나 옆구리의 상처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휘청했다. 그 순간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목을 향해 왔다. 아차! 목이 꿰뚫릴 찰나,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곁에 있던 채욱이 순식간에 끼어들어 조복의 검을 물리친 것이다.

흥, 조복은 코웃음을 치며 검을 채욱에게로 향했다. 채욱은 두 자 길이 단검을 허리께에 늘어뜨리고 조복의 향해 측면으로 섰다. 조복이 왼쪽으로 삼보 이동해 채욱과 정면으로 맞섰다. 두 사람 사이에 눈길이 교환되었다. 조복의 눈길이 투지로 불탔으나 채욱은 마치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았다. 조복이 탕, 하고 앞발을 구르며 반보 전진했으나 채욱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어 조복이 장검을 쌍수로 잡고 검극을 상대의 미간으로 향하고는 타당, 탕, 앞발을 연속 두 번 구르며 이 보 전진했다. 채욱은 이번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삼보 거리가 있었는데 조복이 일 보 반을 전진하며 공격을 하는 듯 속임수를 썼으나 채욱은 말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일보 반이 남았다. 누구든 반보만 전진하며 무기를 휘두르면 살상의 범위에 있는 것이다.

조복은 상대가 무정도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라는 걸 느꼈다. 좀 전의 허초에 상대는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공세를 훤히 꿰뚫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아무렴 전자일 것이다. 조복은 요족의 비기 붕격술(蹦擊術)로 공격자세를 갖췄다. 붕격은 권법과 각술이 주이지만 검법에도 응용한 요족 특유의 무예다. 상대가 검에 집중하는 사이 각(脚)으로 허점을 찌르는 것이 요체이다. 그동안 조복이 대결했던 경험으로 볼 때 붕격술을 사용하면 대개의 중원인은 당황하기 일쑤였다.

조복은 횡충세(橫沖勢)로 서서 검을 오른쪽 어깨 높이에서 잡고 검극을 상대의 목으로 향했다. 그런 다음 언제든지 앞발로 올려 찰 수 있도록 중심을 뒷발에 두었다. 채욱은 여전히 단검을 허리께에 늘어뜨리고는 시선은 조복의 하단전으로 향했다.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검극 따위쯤 무시한다는 태도다. 차압! 조복이 기합과 함께 장검을 가로지르며 앞발을 내딛고 뒷발을 끌어당겨 나아가면서 연속동작으로 검이 타원을 그리며 밑에서 위로 치켜올렸다. 동시에 중심을 앞발로 이동하면서 뒷발로 돌려차기를 했다.

어차피 검은 상대가 피할 예상하고 다음 동작에서 각에 걸리도록 꾸민 초식이다. 상대가 숙이면 안면이 걸리고 물러나면 복부에 타격이 오는 수(手)다. 음, 조복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나왔다. 돌려차기 한 오른쪽 다리 현종혈(悬钟穴)에 뜨끔한 자극이 왔던 것이다. 실패는 고사하고 자신이 당하고 말았다. 상처를 살펴볼 여가는 없었다. 어떻게 피했을까. 아니 피한 건 둘째 치고 어떻게 반격까지 했을까. 더욱 큰 문제는 상대의 보법을 보지도 못한데 있었다.

일합에 승부는 갈렸다. 검을 거두기에도 늦었다. 조복은 자신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침착해! 나에게는 요족의 무공이 있어. 조복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 단전에 기를 모았다. 역린세(逆鱗勢)로 수비자세를 취했다. 상대가 공격해오면 하나를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거리를 좁혀 맨몸 박투술로 엉켜들 예정이었다. 상대가 반보 씩 옆걸음 하며 전진해 오고 있다. 조복은 상대의 보법에 신경을 썼다. 단검은 거리가 확보돼야 비로소 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좀전 일합에서 놓친 보법의 운용이 내내 맘에 걸렸다. 상대가 거리를 좁힐 때 자신도 전진해버려 거리를 없앤 다음 권으로 몸싸움을 유도하겠다는 복안이다. 오른쪽 종아리에 지르르 하는 통증이 전해졌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안 된다. 조복은 입술을 앙 물었다.

이때 상대의 보가 횡으로 주욱 벌어졌다. 선공이닷! 조복은 검을 빙그르 돌리면서 상체를 방어함과 동시에 자신이 오히려 한 보 전진했다. 몸과 몸끼리 부딪칠 정도 근접했다고 생각하고 그는 무릎치기를 했다. 그 순간 눈앞에서 검광이 번쩍했다. 그의 무릎이 상대의 몸을 강타하기는커녕 땅을 찍었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보였다.

챙,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적어도 두 번 이상 났어야 했어. 그런데 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나지 않은 거지? 조복은 쓰러지면서도 자신의 공격이 왜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지 의아했다. 졌다! 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갑자기 모든 게 허무했다. 눈앞에 단검을 들고 있는 서 있는 상대가 우습게 여겨졌다. 저자는 왜 이따위 장난질에 목숨을 거나. 아니 인생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요족의 흥기를 위해 금의위에 잠입했던 시절이 짧게 스치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푸르렀던 청춘이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랐다. 곧이어 요족이 모여 살던 동네가 눈앞에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요족 의상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어릴 적 살던 고향으로 가고 싶었는데. 이번 일만 끝내고.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세상이 점점 흐려졌다.

조복은 목에 두 치 깊이의 자상을 입고 쓰러졌다. 경동맥이 잘렸는지 피가 솟구쳤다. 조복의 커다란 몸은 덜덜덜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채욱은 고개를 숙이고 시선은 땅을 향했다. 그의 단검은 여전히 허리께에서 늘어뜨려져 있지만, 아까와 다른 점은 붉은 피가 검신을 타고 검극에 맺혔다가 방울져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선을 들어 먼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물안개 사이로 비죽 솟은 태실봉이 보였다.

그때였다. 무영객이 등을 홱 둘리더니 일주문 밖으로 뛰었다. 이를 본 채욱이 놓칠세라 땅을 박차고 뒤를 따랐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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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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