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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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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웅이 공중에 도약해 있을 때만 하더라도 서생이 자신의 살수(殺手)에 희생될 것을 확신했다. 그는 도를 양손으로 잡고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그 찰나 회색빛 물체가 서생의 몸을 덮었다. 그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도를 마저 그어내렸다. 동시에 자신의 복부가 화끈 달아올랐다. 뜨거운 쇠꼬챙이가 복부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

동백웅은 자신의 도를 버리고 복부에 꽂힌 뜨거운 것을 잡았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더니 한쪽 무릎이 꺾였다.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은 실패하지 않았다. 도를 잡은 손에 전해오는 감각은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의 묵지근한 질감이었다. 자신의 칼을 받은 자가 어찌 이런 반격을 한단 말인가. 이따위 비검술에 어찌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는 자는 자신이 아니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칼날을 뽑으려 애썼다. 

관조운은 상체를 벌떡 세우고 사숙을 안았다. 그의 등판 왼쪽 어깻죽지에는 파풍도의 자국이 깊게 패여 있다. 살갗이 허옇게 벌어졌고 한 치 깊이 붉은 근육 사이로 허연 뼈가 보였다. 순식간에 피가 베이더니 곧이어 콸콸 쏟아졌다. 조운은 장포를 벗어 사숙의 어깨를 지혈했다. 사숙의 입에서 선혈이 울컥 쏟아졌다. 사숙의 가슴은 진홍색 피로 물들었다.

상처를 싸맨 관조운이 사숙을 다시 안았다. 눈에 초점이 없다. 혁련지도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승모가 얼굴을 들어 조운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사숙의 눈에 초점이 맺혔다. 사숙이 손을 들더니 검지로 쓰러진 조복을 가리켰다. 관조운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사숙이 관조운의 단삼의 깃을 잡아당겼다. 조운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사숙은 검지로 자신의 가슴에 흘러내리는 피를 묻혔다. 그리고 조운의 흰 단삼 속옷에 글자를 썼다. 

'…낙(洛)'
'…수(水)'
'…월(月)'

천천히 써내려간 사숙은 더 이상 쓰기 힘든지 손을 내리고 숨을 헐떡였다. 기도에서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사숙이 다시 손을 올리더니 다시 피를 묻히고는 글자를 썼다.

'두(亠)…'

여기까지 쓰고는 멈췄다. 사숙은 크게 호흡을 들이킨 후 다시 손을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사숙의 검지가 조운의 옷에 대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사숙의 손이 털썩 떨어졌다. 동시에 사숙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도 그쳐 있다. 

"사숙님!"

관조운이 소리를 질렀다. 사숙님, 사숙님, 혁련지가 흐느끼며 사숙을 불러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관조운은 사숙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이고 상처에 추가 지혈을 하며 기다렸으나 더 이상 어떠한 소생의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비로소 혁련지가 거실 바닥에 쓰러진 정운수좌를 살폈다. 관조운과 혁련지의 시선이 마주치자 혁련지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정운수좌도 절명한 모양이다.

관조운과 혁련지 그리고 필진진은 거실의 탁자에 앉았다. 어린 섭월은 요사채의 방에 뉘이고 쉬게 했다. 관조운이 정운수좌의 거처에 가서 퉁소와 문병이 들어 있던 바랑을 아무리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정운은 그 기물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감춰둘 리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관조운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갖은 고생 끝에 유품을 손에 넣었으나 괴한들에게 빼앗기고 보니 한편으론 허탈하고 한편으론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건 유품이 강호에 몰고 올 파장이다. 굶주린 맹수들이 우글우글한 울 안에 신선한 고깃덩이를 던진 셈이다. 앞으로 무림에 바람 잘 날이 있을까 싶다.

"사숙께서 죽음의 문턱을 넘으면서도 사형에게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알아내야 해요."

혁련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낙(洛), 수(水), 월(月), 그리고 …두(亠)."

관조운이 한 자 씩 되뇌었다. 낙, 수, 월만 해서는 무엇을 가리키는 지 알 수 없었다.

"두(亠) 자는 부수예요. 사숙님께서 두 자를 머리 부수로 하는 글자를 쓰시려다, 마저 쓰지 못한 것 같아요."
"두 자를 머리부수로 하는 글자가 한 두 개여야지."

혁련지의 말에 관조운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건 낙수의 정자를 일컬어요."

잠자코 있던 필진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관조운이 놀란 듯 되묻자.

"두 분의 사숙께서 남기신 글자는 낙수와 수월을 이어서 쓴 것이에요. 낙수(落水)는 다들 아시다시피 낙양을 흐르는 강 이름이고, 수월은 낙수의 정자(亭子) 수월정(水月亭)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강물에 비치는 달빛이 아름다워 문인들의 시심을 돋워주고 한량들의 흥취를 달래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 연전에 저희 부군께서 낙양을 지나가다 잠시 들러 남긴 시(詩) '등수월정(登水月亭)'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필진진은 마치 남에게 얘기하듯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관조운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사숙님께서 쓰시려던 부수 두(亠) 자가 정(亭) 자를 쓰시려던 것이었겠네요."  

혁련지가 말했다.

"낙수의 수월정이 맞는다면, 사숙님께서 숨이 넘어가시는 와중에 왜 굳이 그 글자를 쓰셨을까? 수월정이 뭘 의미하는 거지?"

관조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혹시 흑의인과 저 금의위 관헌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걸 사숙님께서 들으신 거 아닐까요? 그들은 사숙님이 농인이라 여기고, 자기들끼리 그림과 부채를 입수하면 수월정에서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아무런 경계심 없이 발설했지 싶어요."

혁련지가 조복의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어떡하지?"
"어떡하긴요? 한시라도 빨리 낙수의 수월정에 가봐야죠. 그들은 틀림없이 유품을 누군가에게 전할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그들끼리는 약조한 시간이 있지 않을까?"
"현재로선 조금이라도 빨리 수월정에 가서 무작정 잠복하는 수밖에 없죠."

남녀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연 혁련지가 아, 하고 다시 돌아서 필진진을 보며 말했다. 

"아, ……어쩌면 두(亠) 자는 정자를 가리키기보다 해(亥) 시를 가리키는 거 아닐까요? 사숙께서 수월까지 쓰셨다가 잠시 멈췄다 다시 쓰려고 하셨어요. 중간에 멈춘 이유가 다른 맥락의 글자를 쓰시려다 기운이 다하셨다고 보는 게 정황 상 맞지 않을까 싶네요."
"맞아요. 혁련 소저의 생각에 저도 동의해요. 여기는 제가 수습할 테니, 두 분은 빨리 수월정으로 가보세요. 수월정이 낙양성에서 육십 리 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가면 그만큼 더 가까이 있어요. 서두르면 오늘밤 해시까지 도착할 수도 있어요."

필진진이 말했다.

"영실(令室)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안심이 됩니다. 이 사건이 한 개인의 사사로움에 그치는 게 아니라 관이 개입돼 있고 나아가 강호의 안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인지라 저희가 한가로울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먼저 발걸음을 떼더라도 용서바랍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따로이 사죄드리겠습니다." 
"번례(煩禮)는 저도 사양하오니 염려 마십시오. 소저."

혁련지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필진진도 흔쾌히 받아 주었다.

"그럼 뒷일을 형수님께 미루고 저희는 먼저 길을 나서겠습니다."

관조운이 진진을 향해 목례를 했다. 남녀가 채비를 갖춘 후 거실을 나서려는 데 필진진이 혁련지를 향해 말했다.

"혁련 소저!"
혁련지가 고개를 돌렸다.

"잘 부탁드려요"

진진이 허리를 천천히 숙이며 인사했다.

"제가 어찌…… 사형께서 저를 잘 이끌어주시는데 ……가당찮습니다."

혁련지가 당황하며 맞절을 했다.

진진은 남녀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주문 앞에 섰다. 길모퉁이를 돌기 전 관조운이 뒤돌아 손을 흔들자 진진도 손을 들었다. 산들바람이 이마를 스치자 진진은 흠칫 놀라 섭월에게 뛰어갔다.  

향적암 대웅전 뒤에는 대숲이 울울하다. 두 개의 신영이 대숲 안에서 서서 관조운과 일행을 바라보고 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다른 한 명은 보통 키이지만 둘 다 짙은 감색 장포에 당건을 쓰고 있다.

"하마터면 또 끼어들 뻔 했군."

보통 키의 신영이 말했다.

"미친 늙은이가 그런 식으로 뛰어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막 도와줄 참이었는데……."

키 큰 신영이 말했다.

"조복을 단 한 두 합에 보내버리다니. 과연 예검비화 채욱이야. 강호의 소문이 헛되다고만 할 수 없군 그래. 은화사에 몸담고 있는 자들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되니 이를 어찌할꼬."
"대나무통을 가지고 간 자를 추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시기를 놓쳤으니 할 수 없지. 둘 다 경신술이 너무 뛰어나 우리가 쫓아간들 과연 따라잡긴 했을까?"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죠?"
"서생과 낭자가 뒤처리도 미룬 채 길을 서두는 걸 보니 분명 뭔가 있을 걸세. 뒤를 밟으면 뭔가 나타나겠지. 자, 가세"

두 신영은 대숲의 뒤로 빠져나가 향적암을 우회하여 돌아나갔다.

안개비는 할 일 마친 자객처럼 어느새 사라지고, 향적암 뒤로 자실봉이 갓 세수한 얼굴처럼 뽀얗게 내밀었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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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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