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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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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객은 협봉도를 손목 위에서 한바퀴 빙글 돌렸다. 손안에 착 감기는 감이 나쁘진 않았다. 무영객은 얼굴 옆으로 비스듬히 칼날을 세우고 맹호은림(猛虎隱林)의 자세를 취하며 다시 좌측 방향으로 원을 그렸다. 상대도 원을 그리며 자신과 정면을 유지했다. 하나, 둘, 셋, 무영객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일곱 보에서 상대가 바위를 등지게 된다. 여섯, 일곱. 무영객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화원출동(火猿出洞)으로 도를 그으면서 상대를 교란시켰다. 화원출동은 오공이 수렴동에서 뛰쳐나오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팔짝팔짝 보법을 밟는 것이 특징이다.

무영객이 현란한 보법으로 좌우를 밟으며 채욱의 보를 차단할 듯하다가 오른쪽을 열어 두고 맹렬하게 내딛었다. 채욱이 좌보로 피해버리자 깊숙한 전진으로 무영객의 등이 노출됐다. 앞에는 두 길 높이의 바위가 버티고 있다. 기회를 놓칠세라. 채욱이 무영객의 등을 향해 따라들어 퇴로를 차단하고는 상대가 한바퀴 돌며 도를 수평으로 벨 것을 예상했다.

채욱은 한 박자 늦추고 기다렸다. 도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갈 때가 기회다. 상체가 훤히 비어 있게 된다. 순간 무영객이 바위에 발을 딛고 도약하더니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채욱의 안면을 향해 도를 그었다. 채욱이 멈칫 하며 고개를 돌리며 선인봉반(仙人捧盤)으로 상단을 막았으나 이미 그의 귀가 반쯤 떨어져나갔다. 선홍색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무영객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도를 땅으로 향하고 제자리에 섰다. 채욱도 검을 거꾸로 쥐고 포권을 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채욱이 검을 들어 덜렁대는 남은 귀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허리에서 남은 단검 하나를 마저 뽑았다. 채욱은 쌍검으로 승부하려는 것이다.

무영객이 찬격세(鑽擊勢)를 취했다. 찬격은 비비어 치고 부딪혀 훑는 기술이다. 손목으로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맞서 채욱은 곤패(滾牌)의 자세로 섰다. 우측으로 비스듬히 서서 오른쪽 검을 왼쪽 허리에서 수직으로 세우고, 왼쪽 검은 아래로 늘어뜨려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기술로 기격(奇擊)의 변화를 줄 수 있는 검법이다. 서로를 노려본 지 일각이 지났을까.

채욱이 이 보 앞으로 나오며 치잇, 하는 기합과 함께 솟구치더니 태산압정(泰山壓頂)으로 무영객의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노리며 쌍검으로 찔러 들어왔다. 무영객은 상체를 숙이며 요략(腰掠)으로 채욱의 허리를 베어내며 전방으로 빠져나갔다. 솨악, 새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 허공에 퍼지며 둘 다 비껴갔다. 채욱은 돌아서자마자 사행(斜行)으로 왼손 검을 누이고는 연이어 경기룡편(硬騎龍偏))의 수법으로 오른손 검을 회전하며 찔러들어 갔다.

무영객 역시 돌아서다가 채욱의 갑작스런 연속동작을 예상치 못한 듯 화들짝 놀라며 도를 휘두르며 뒷걸음 쳤다. 챙, 챙, 챙 무영객이 채욱의 회전쌍검을 세 번 튕겨내며 후퇴하자 어느새 계류 가장자리까지 밀리고 말았다. 무영객이 순간 힐끗 하더니 뒤돌아서 펄쩍 펄쩍 두 개의 바위를 디뎌 계류의 한가운데 바위로 뛰어올랐다. 채욱도 펄쩍 뛰어 맞은편 바위에 섰다. 좔좔좔 바위 사이로 계류가 흘렀다. 각자 바위 위에서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검을 겨누고 노려보았다. 무영객이 딛고 선 바위는 계란형에 가까워 거의 한쪽 다리로 버티고 있고, 채욱이 서 있는 바위는 장정의 어깨넓이만큼 넓어 두발로 설 수는 있으나 살짝살짝 물이 넘쳐 신발을 적셨다.

무영객은 순간적으로 주위 바위를 훑어보았다. 어느 바위를 의지하고 어느 바위를 피해야 하는가. 무영객이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반동을 주었다가 허공으로 번쩍 치솟아 양 무릎을 가슴까지 오므린 채 공중에서 회전하면서 협봉도로 채욱의 면상을 향해 두 번의 획을 그었다. 채욱은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쪽 검으로 막고 다른 검으로 무영객의 신영을 찔렀다. 챙, 소리가 나더니 무영객이 착지하자마자 채욱이 있던 바위를 디딤돌 삼아 네 자 떨어진 북쪽 바위로 튕기듯 날아갔다.

북쪽 바위에 선 무영객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휘청했다. 그의 왼쪽 대퇴부에는 채욱의 단검이 박혀 있다. 곧 쓰러져 계류 사이에 처박힐 것 같았다. 그 틈을 타고 채욱이 무영객이 서 있는 바위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 일검으로 승부를 보려는 듯 역린(逆鱗)의 자세로 용의 비늘을 거슬러 찔러 들어갔다. 무영객이 막 채욱의 검을 받으려는 찰나 채욱이 허청, 하더니 계류 속으로 미끄러졌다. 채욱이 착지한 곳에는 파르스름한 이끼가 얇게 덮여 있었다.

채욱이 급히 일어서 자세를 바로 하려는 순간 허공에서 거뭇한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덮쳤다. 아차, 검을 치켜올리며 흔격으로 베었지만 물보라만 얼굴에 튀었다. 당했어! 내가 평정심을 잃었어. 가슴에 쏴아 하고 바람이 들어왔다. 자신이 왜 당했는지 알고 싶었다. 실수였어! 상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지만 숨이 자꾸 새어나온다. 채욱은 자신이 당한 건 실력이 아니라 실수 때문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저승에 가서라도.

무영객은 정강이까지 잠긴 계류에서 빠져나왔다. 왼쪽 허벅지에 박힌 단검을 뽑자 피가 울컥 솟았다. 대동맥이 상한 것 같으나 솟구치는 양으로 봐서 절단되진 않고 찢긴 것 같았다. 그는 상의를 벗어 주욱 찢고는 상처를 싸맸다. 채욱이란 자는 그가 여태까지 상대했던 자들 중 가장 고수였다. 그동안 겪어왔던 수많은 살전에서 오늘처럼 반 박자 이내 차이로 승부가 갈린 적은 없었다. 한 호흡에 생사가 오가고 반 박자에 승패가 갈리는 게 검의 대결이다.

애초 무영객이 채욱과의 대결을 위해 택한 첫 번째 수(手)가 지형이었다. 소림사에서 향적암으로 오는 길에 이곳 계곡을 지났었다. 조복이 당하고 그와의 대결이 피할 수 없으리라고 여긴 순간 이곳이 떠올랐다. 이곳으로 유인해야 한다. 젖은 땅과 미끈거리는 바위. 이것이 그의 동작을 흩트리게 할 것이다. 이기는 자는 결투에 이기기 전에 결투의 조건을 만드는 자다. 하수는 조건에 휘둘리고, 중수는 조건을 이용하고, 상수는 조건을 뛰어넘는다. 그와 나의 대결은 내가 택한 지형 조건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 그는 검을 다룰 줄 아는 자였다. 다만 검기(劍技)에 치중해 지형을 가벼이 여겼고, 승부에 집착해 평정을 잃었다.

덜렁대는 귀를 수습하라고 한 것은 그 자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과연 그는 승부에 모든 걸 건 자였다. 옷을 찢어 귀를 싸매지 않고 아예 떼어내 버렸다. 귀를 감싸면 청각에 지장이 있게 된다. 고도의 대결에선 청각도 시각 못잖게 중요하다. 덜렁대는 귀는 집중을 방해한다. 생사를 건 대결에서 귀 한쪽이 중요하랴. 자신이 배려한 이후 그 자는 급해졌다. 적으로부터 배려를 받았다는 처지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수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아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자는 결코 계류 속으로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열 살 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마다 향로봉을 오르내렸던 그에게 계곡의 바위를 타는 것쯤은 환한 달빛 속에서 걷는 것만큼이나 편한 일이다. 비 온 뒤의 바위가 얼마나 미끄럽고 경사면에는 대개 이끼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이기려 하지 말고 살아남으려 하라! 노인의 육성이 귓가에 머물렀다. 

무영객은 의뢰인과 약속한 보름밤을 지키기 위해선 바로 출발해야 했다. 그는 무엇보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좋았다. 빠르게 서둔다면 오늘밤 수월정에 약속 시간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임무는 길고 고됐다. 당분간 살수의 길을 접어야겠군. 무영객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날은 완전히 개어 오후의 햇살이 숲 사이로 비쳐들었다. 산새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했다. 무영객은 바랑과 대나무통을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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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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